1부 26장 회임
동년 겨울 대설을 사흘 앞두고 연향을 진맥한 황실 어의가 황귀비의 회임을 황제께 고하였다. 황제와 황귀비 사이의 금슬이 무척이나 좋더라 하는 풍문이 돌기가 무섭게 날아든 포태 소식이라 황궁은 물론이요 조당의 신료들 모두가 나라의 홍복이라 입을 모았다. 황태후는 매서운 추위에 귀한 황실의 혈손을 회임한 연향이 행여나 덧날까 문안을 오는 것을 공공연히 금하였고, 황제는 태화전에 연향을 돌볼 어의와 의녀를 상주시키고 조석으로 몸을 보하는 탕약을 지어 올리라 하명하였다.
연향의 회임은 태예국 전체의 경사였다. 황태후는 자희궁에서 태화전 근처의 영명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포태한 연향에게 향하는 모든 음식과 약재를 살피고, 행여나 태아에게 해로운 냄새가 있을까 저어하여 연향이 머무는 태화전 근처에서는 향을 피우는 일조차 막았다. 모두의 보살핌 아래 연향의 배는 조금씩 부풀어갔다.
황제는 동실하게 나온 연향의 배에 귀를 대고 태동을 느끼기도 하였고, 태어나지도 아니한 아이의 태명을 지어주고, 태어날 아이가 남아라면 황태자로 삼을 것이며, 여아라면 황태녀로 삼으리라 천명하여 총비의 회임을 축하하였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 회민 2년의 새해가 밝았다. 조당에서도 황제의 첫 아이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는 의미에서 동년 가을쯤 해산을 하게 되면 겨우내 산후조리를 마치고 건강을 되찾을 이듬해 봄에 정식으로 국혼을 거행하고 황귀비를 황후로 책립 하자는 논의가 마무리 지어졌다. 기쁨 속에서 겨울이 저물고 꽃피는 계절이 찾아왔다.
“입춘이 지났다 하여도 아직 조석으로 바람이 삽삽하옵니다. 찬바람을 맞으시면 손발이 차가워지셔서 저리실 터인데 어찌 창을 열어두셨나이까.”
황태후가 영명전으로 일시 거처를 옮기면서 자희궁에 속해 있던 채란은 황태후 윤씨의 명으로 연향의 수발을 들었다. 내전 소속 여관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리만큼 영리하고 싹싹한 채란이니 만큼 그녀가 곁에 있으면 최근 몸이 부쩍 불은 연향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새소리가 들리기에 보고 싶어 열어 보았단다. 다 닫지는 말고 반만 닫으면 아니 되겠느냐? 겨우내 내당에만 갇혀 있다 보니 갑갑하구나.”
“알겠습니다, 마마. 대신에 답답하셔도 표의를 한 겹 더 걸치셔야 하옵니다. 갑자기 찬바람을 맞으면 수족냉증이 생겨 해산하신 이후에도 고생하신다고 어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나이까.”
“내 어찌 너를 당하리. 그리 하마.”
채란은 밤새 이불 사이에 넣어두어 따스해진 표의를 꺼내와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연향에게 걸쳐주었다. 무거워진 사지를 받들고 지탱해 주는 손길이 부드러우면서도 꼼꼼하여 채란의 시중을 받으면 다른 이들이 곁에 있는 것보다 훨씬 편하였다. 온기를 품은 비단옷이 바깥바람을 맞는 동안 차가워진 그녀의 팔과 다리, 등과 배를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옷을 보료 사이에 넣어 두어 따스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한 이도 채란이었다. 내명부의 최고 어른인 황태후의 시중을 들다가 본인의 의중과 상관없이 연향에게 보내졌으니 싫을 수도 있으련만 채란은 그 어떤 내색도 없이 연향의 시중에 최선을 다하였다.
“마마, 요의가 느껴지시지는 않으시옵니까? 몸이 불면 자주 그러하다 들었습니다.”
옷을 다 걸쳐준 채란은 연향의 다리를 들어 올려 주무르면서 나직하게 물어보았다. 몸이 불어나면서 다리의 부기가 심해져 종종 쑤시고 결리는데 항상 채란은 그런 연향의 마음을 한수 앞서 읽고 말하기 전에 움직였다.
“아직은 괜찮다. 네가 곁에 있어준 이래 한결 편해졌다. 너는 어찌 그리 내 마음을 잘 아느냐? 말을 내지 아니하여도 알아서 다 챙겨주는 이는 네가 처음이다.”
채란이 잔잔하게 웃었다.
“해주의 대부인께서 환갑연을 지내신 이래 기력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소녀 그분 곁에 있다 보니 병을 구완하는 약간의 요령을 익혔을 따름이옵니다. 소녀가 곁에 있어 마마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다리의 부종을 야무진 손길로 매만져 풀어준 채란은 연향의 발까지 꼼꼼하게 주물렀다. 채란이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섬세한 손길로 만져주고 나면 돌덩이를 매달고 있는 양 무겁기 그지없던 사지가 한결 가벼워져서 온몸이 나른해지고 낮잠이 솔솔 왔다.
“황태후 마마께서 너를 보내주셔서 내 얼마나 감사하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훗날 네가 포태할 날이 오면 그때에는 네가 내게 그러하였듯이 내가 너를 돌보아주고 싶을 정도란다. 물론 나는 너와 같이 능숙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천진하게 중얼거리는 연향의 말에 채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진실로 그러한 날이 온다 하여도 연향이 채란의 수발을 들어주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채란이 아이를 잉태하고 싶은 사내는 하늘 아래 지엄한 관을 쓰고 있는 황제 조효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향이 선량하고 온후하다 한들 하늘 아래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내를 나눌 수 있는 여인은 없었다.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연향의 선량함도 악의 없는 천진함도 황제의 사랑이 오롯이 그녀에게만 향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채란은 믿었다. 그러나 채란은 언제나 연향 앞에서 그래왔듯이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었다.
“소녀는 평생을 이 황궁에서 여관으로 지낼 것인데 수태라니 가당치도 않나이다. 다정하신 황귀비 마마의 말씀만은 감사히 새기겠습니다.”
“내 아이가 태에 깃들어 있을 때부터 너의 돌봄을 받고 자랐으니 이대로 무사히 태어나거든 너를 대모라 부르게 하리라.”
“과만하신 말씀이옵니다.”
“물리치지 말거라. 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