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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Nov 14. 2024

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25

25장 황귀비와 시녀

1부 황실의 꽃 




25장 황귀비와 시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이야기꽃이 피었을 때였다. 황태후궁에서 나온 젊은 여관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자태가 몹시도 고와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여인이었다. 


 “태후 폐하께서 두 분 마마께 다과를 내리셨습니다.”


 낯선 황궁에서 만났으니 그녀와 따로 인연이 닿았을 리가 만무하였건만 기기하리만큼 기시감이 들었다. 찬찬히 여관의 생김을 뜯어보던 연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이는 신전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채란이었다. 


 채란을 신전 아닌 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하물며 이곳은 황성이었다. 그녀가 황성에, 공교롭게도 연향이 제안하고자 하였던 대로 황실 여관이 되어있으리라고 연향이 어찌 상상인들 하였으랴.


 당장이라도 아는 체를 하고 그간 어찌 보냈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연향은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부디 진중하라고, 황성에는 무엇이 또 어떻게 트집이 잡힐지 할 수 없으니 언행을 무겁게 하고 쉬 감정을 드러내어서는 아니 된다고 간곡히 당부하였던 모친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채란과 따로 만나보고 싶어진 연향은 부드럽게 웃으며 주위에서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할 만한 구실을 지어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로구나. 태후마마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씀 올려라. 그대의 수고가 커서 내 그를 치하하고 싶으니 석반 후에 잠시 태화전에 들리도록 하라.” 


 “황감하옵니다, 마마.”


 채란은 연향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식으로 대면하여 이야기조차 나누어 본 적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채란은 조용히 절을 하고 물러났다. 연향은 그녀에게서 즉시 눈길을 떼고 말문을 열었다.


 “황실의 다과는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드셔보시지요. 이 중에서도 파초실로 만든 유전병(파초실은 바나나이며, 유전병油煎餠은 곡분을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떡을 가리킨다), 연유로 만들어진 과자, 호박을 갈아 만든 차가운 식혜가 특히 맛이 납니다.” 


 혜명공주가 추천해 주는 대로 조금씩 먹어본 연향은 함박 웃었다. 


 “모두 오묘하지만 깊은 맛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떠한 다과를 즐기십니까? 폐하께서는 저에 대해 많이 아시는 데에 반하여 저는 그분에 대해 잘 모르니 사소한 것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황귀비께서는 온통 폐하 생각뿐이로군요. 화목하니 보기에 좋습니다. 모두 황실의 지복입니다.”


 그렇게 운을 떼어낸 혜명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황제인 오라비와 차를 함께한 것이 여태까지 채 열 번도 되지 않았다.  

 “폐하께서 사사로운 자리에서 다른 이와 다과를 즐기시는 모습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짐작으로는 차와 단 음식을 싫어하신다기보다는 사석에서까지 사람을 마주 대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시는 듯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황귀비를 아끼시니 오늘 밤 주안상을 차려 무얼 좋아하시는지 직접 알아보시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좋은 충고를 해주어 감사합니다, 공주.”  


 곱씹어 볼수록 좋은 생각이었다. 하고 보니 황제는 자신이 권하여 주면 저자의 음식도 흔쾌히 들지 않았던가. 딱히 음식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같이 식사나 다과를 함께 하여 그의 기호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성싶었다. 


 연향의 의중이 온통 주안상 마련 준비로 옮아가 있음을 느낀 혜명은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연향은 일반적인 귀족가의 공녀들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었다. 악의라곤 조금도 없는 얼굴에 순덕하고 천진한 성정도 그녀를 처음 보았던 삼 년 전과 하등 다르지 아니하여 혜명은 그녀가 조금 신기하였다. 연향이 연상인데도 세월은 그녀 아닌 자신에게만 흘러간 듯하였다. 


 “폐하께 올릴 주안상을 마련하려면 마음 쓸 데가 많을 것이니 이만 돌아가 보시어요. 다음엔 소녀가 태화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모로 마음 써주신 것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태화전에 오시면 제가 정성껏 대접할 터이니 조만간 꼭 오시어요.”


 연향은 인사를 하고 태화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황제의 주안상을 마련하고자 한다는 말을 내자 그녀를 섬기는 여관들은 기쁜 듯 보였다. 그저 화병에 장식된 꽃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던 여주인이 난생처음 무엇을 하고자 한다는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연향의 뜻을 받들었다. 


 연향이 무엇을 더 거들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준비는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채란이 석반을 즈음하여 태화전에 방문했을 즈음에는 태화궁 내에는 황제를 맞이할 준비가 거의 다 끝나 있었다. 


 “자희궁 소속 여관, 도가 채란. 황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황귀비에 대한 예를 차린다고 채란이 그녀의 발치에서 깊게 허리 굽혀 예를 올렸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지밀 여관조차 내실에서 물리친 연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채란의 손을 붙들었다. 


 “기주성에서 헌천화무를 추었던 이가 아니냐. 이렇듯 궁에서 다시 보아 기쁘구나.”


 “어찌 귀하신 마마께오서 소녀와 같은 이를 다 기억하십니까.” 


 “처음부터 알아보고 부른 것이었다. 다만 신전에 간다던 이가 궁에 있기에 필시 그 사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생겨난 것일 테고, 그렇다면 많은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알은체를 하면 내 너를 곤란케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이렇듯 따로 찾은 것이다. 그간 잘 지냈는가?”


 연향의 언사는 채란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채란에게 연향은 기주성의 현주였고 대수협의 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자신을 찾는 까닭은 응당 수협과 관련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말하는 투로 보나 순진한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그들 사이의 거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마음 써주신 덕분에 평안하였습니다. 마마. 늦었지만 황귀비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고맙구나. 내 어머님의 친족이면 내게도 친족인즉, 내 친척의 축하를 받으니 기쁨이 더 크구나. 황궁의 여관이 되었으니 일이 많이 고될 터인데 힘든 일은 없느냐?”


 “태후 마마께서 관후하셔서 전혀 힘들지 않사옵니다. 마마께서야 말로 입궁하신 지 얼마 아니 되어 낯설고 외롭지 않으십니까?”


 연향은 부친인 대수협과도 모친인 소선경과도 달랐다. 그들 모두 채란을 재주와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대수협은 그를 이용하고자 하였으며, 소선경은 그를 경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연향이 그녀에게 보이고 있는 순수한 호의는 어딘가 그녀를 딸처럼 아껴주었던 해주성의 대부인 협영옥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채란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능숙하였다.  


 “그건 내가 네게 묻고 싶은 말이로구나. 나야 후궁으로 들어와 받들리며 지내는데 어찌 고된 하루를 보내는 너와 비견할 수 있겠느냐. 내 눈으로 본 너의 재주가 아름답고, 너의 기상이 남다르다기에 내 기실은 기주에서부터 무던히 너와 벗이 되고 싶었느니라. 아쉽게도 우리의 인연이 닿지 않아 그를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이리 다시 보니 머나먼 타국에서 동기를 만난 듯 반갑고 기쁘구나.”


 그렇게 말한 연향은 채란을 데리고 다과상으로 이끌었다. 


 “이리 와 좀 앉으렴. 네가 가져다준 유전병이 아주 맛이 있어서 내 더 받아왔다. 자희궁에는 내가 전갈을 보내놓을 터이니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쉬다 가면 내 마음이 약간이나마 편해지리라.”


 “어찌 귀하신 분께서 불민한 소녀에게 이리 과만한 대접을 해주십니까.”


 “곡해 없이 들었으면 좋겠구나. 내 사실 네가 신전으로 간다기에 몹시 안타까웠다. 조금이나마 너를 돕고 싶었으나 어린 내가 네게 힘이 될 만한 마땅한 방도가 없었고, 아쉬운 마음에 널 찾아가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으나 네가 이미 떠났다기에 고맙다 말 한마디 못하였다. 너로 인하여 연회가 아름답게 끝났고, 그날 밤에 나는 폐하께 직접 청혼을 받았다. 네가 연회장에서 뿌려준 복수초 모양의 가화가 내게는 흡사 행복의 징표 같았는데 정작 너는 어떠한 사의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성을 떠나갔다 하여 내 너에게 줄곧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연회가 있었던 날 밤이면 채란이 황제에게 내쳐진 날이기도 하였다. 그날 진연에서 춤을 추며 복수초를 바친 것은 채란이었는데 정작 행복과 행운은 가만히 앉아 구경하고 있던 연향에게 주어졌다. 


 같은 날 연향은 황제인 조효을 얻었고, 자신은 그를 잃었다. 아니 얻은 적도 없었기에 잃었다는 표현은 가당치도 않을지 몰랐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단 하나였다. 연향보다는 자신 쪽이 그를 더 간절하게 얻고자 구하였다는 것 말이다. 두 사람의 상반된 삶의 궤적이 채란은 우스웠다.


 하지만 채란은 또 다른 기회를 잡아 황성에 들어왔고, 그녀에게는 아직 몇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을 터였다. 


 “인사가 늦었지만 미안하였고, 또 참으로 고마웠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것이 무에 있다고 황귀비 마마께오서 감사를 표하신단 말이옵니까? 불민한 소녀 황망하오니 부디 그만하소서.”


 같은 날 밤에 채란이 황제를 유혹하고자 하였던 것을 알더라도 연향이 지금과 같이 속셈 없는 잔정을 보일 것인지, 그녀의 음성에 깃든 감사의 마음이 지금처럼 온전한 모양새일지 채란은 그것이 궁금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속내를 감추고 고운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주신 것은 참으로 감읍하오나, 소녀 제 몫을 다하여 아우를 키우고 있는지라 조금도 힘들지 아니하고, 외려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하오니 소녀를 너무 근심치 마시옵소서. 다만, 소녀 해주의 어르신을 섬기는 마음으로 종종 찾아뵙고 인사드릴 터이니 마마께오서 하잘 것 없는 그 마음만을 받아주시면 기쁘겠나이다.”


 채란은 야망을 다 이룰 때까지는 필요 이상으로 일찍 철이 들어 처연하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아 있기로 하였다. 그 편이 그녀를 지켜줄 이가 많다는 것을, 영악한 채란은 일찌감치 간파해냈다. 


 연민을 일으키는 삶이란 가진 것이 없는 채란으로서는 마지막 무기나 다름없었다. 굳이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있다고 소리 높여 내세우지 않아도 서글픈 듯 내리까는 시선만으로도 연향과 같은 부류는 채란을 동정하고 기꺼이 그녀의 편이 되고자 하였다. 


 “나의 청이 너의 귀에 오만하게 들리지 아니한다면, 이 너른 궁에서 내 너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자 한다. 나 또한 너를 동기처럼 여길 것인즉, 언제든 힘든 일이 생기면 꼭 나를 찾아와야 한다.”


 연향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어낸 채란은 그녀에게 꽃같이 웃어 보였다. 대수협이 채란 자신을 이용하여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였듯, 그녀 또한 연향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낼 심산이었다.


 어차피 삶이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물리고 또 물며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황감하옵니다. 마마. 마마의 은혜가 뼈에 사무치나이다.”


 인사를 마친 채란은 일어났다. 내실 밖이 부쩍 부산해진다 싶더니 둥둥 울리는 고 소리와 함께 황제께서 행차하신다는 외침이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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