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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Nov 07. 2024

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23

23장 감로전의 단 이슬

1부 황실의 꽃


23장 감로전의 단 이슬







황제의 침전인 감로전은 연향이 상상하고 있던 것 이상으로 웅장하고 정교하였다. 끝이 없는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고 긴 회랑을 지나 십여 개의 문을 통과하여 연향이 마침내 발을 내디딘 곳은 하늘에 닿을 만치 높다란 기둥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방이었다. 기다린 들보가 지지하고 있는 천장이 교차궁륭 형태라 실제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내실에 연향을 외따로 세워둔 후 황실 내관들은 그녀를 데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물러갔다.


 분명 입궁을 준비하는 동안 무품의 황후가 아닌 황실의 모든 후궁들은 황상을 모시는 법에 대하여 사전에 교육받는다고 배웠으나 책봉 이후 황제께서 계시다는 이 감로전에 들 때까지 황성 안의 누구에게서도 그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한 연향은 어지간히 당찬 성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기주에서 헤어지고 꼬박 이태 만이었다. 그 사이 그의 연인은 만인지상의 황제가 되었고, 이제는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그의 신하이며 소유물이 되었다. 너무나도 달라진 위상이 그들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묻고자 하여도 물어볼 만한 이가 없었다. 법도가 엄격한 황궁에서는 신분이 낮은 이들은 감히 신분이 높은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 없는 까닭이었다.


비록 황후가 아닌 후궁으로 들어왔다 하여도 연향은 황제가 황후에 준하는 예에 따라 간택한 유일한 비였으며, 몇 년 뒤에 황후 책립이 약속되어 있는 최고 서열의 후궁이자 실질적인 내명부의 안주인이었다. 그렇기에 황성 안의 누구 하나 그녀에게 무엇을 일러주려 하거나 감히 그녀를 가르치려 들지 아니하였다.


연향은 또 연향대로 자신의 무분별한 언행이 황상께 누가 될까 저어 되어 기주에서와 달리 그녀를 모시는 황실 여관들을 편히 대하지 못하였다. 조심성이 깊은 어미의 충고가 아니었어도, 저의 모난 태도, 사려깊지 못한 언행이 말 많은 황실에서 어찌 비칠까 알 수가 없었다. 부리는 아랫것들에게 어리보기처럼 보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위계를 이용하여 오만하거나 고압적으로 굴어 공연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없었던 연향은 그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갓난아이처럼 그들이 보살피는 대로 시중을 받고, 화폭 속의 여인처럼 그들이 데려다 놓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숨을 쉬는 것 외에 연향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후궁 책봉의는 내명부에서 주관하는 의례인지라 황실의 최고 어른인 황태후를 잠시 뵈었을 뿐 입궁 이래 아직 황상의 그림자조차 뵙지 못하였다. 이제 곧 나타날 저의 부군이 과연 이태 전에 헤어지던 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보위라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른 황제가 더 이상 그녀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자상하던 그이가 아닐까 봐 연향은 두려웠다. 맞잡은 손의 떨림이 심하여진다 싶었을 때 보름달의 모양새를 형상화한 여닫이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실로 들어섰다. 돌아서 있던 차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황귀비가 기다리고 있는 황제의 침전에 사전에 고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들어설 수 있는 신분의 사내란 하늘 아래 단 한 명밖에 없었기에 연향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기주 출신 대수협의 여식 황귀비 대가 연향,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황실 예법에 따른 인사를 마치고 삼배를 위하여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내가 그대 앞에서도 황제여야 하느냐?”


 답을 할 새도 없었다. 무거운 가체 위로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몸이 번쩍 들렸다. 예기치 못하였던 일을 당하여 황망한 마음을 감추고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였을 때에는 이미 그녀는 황제의 무릎 위에 안겨있었다.


 “그대를 담당한 여관이 누구더냐. 기주에서 재회하였을 때처럼 내게 부복하여 새삼스레 예를 차릴까 저어하여 내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고 보내라 하였더니. 황명을 어겼으니 내 그것들을 엄히 벌하여야겠구나.”


 연향은 황제의 침소에 들면서 사전 언급을 하나도 받지 못한 연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저를 대하는 황실의 내관들이 하나 같이 과묵하기 이를 데 없어 그녀는 이것이 혹여 말로만 들어온 황궁의 텃세인가 하고 내심으로 근심하던 차였다. 그러나 황제가 금언령을 내려 그러하였다면 그것은 모두 자신의 오해였다. 연향은 허둥지둥 황제의 품에서 벗어나 화급히 변명했다.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시오소서. 신첩 하늘에 맹세코 여관들에게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였나이다.”


 “과연 그런 것 같긴 하구나. 제의 침전에 들어놓고 짐의 품에서 벗어나려 그리 기를 쓰는 비가 그대 말고 이 나라 또 어디 있겠느냐?”


 황제의 농에 연향은 얼굴을 확 붉혔다. 이제 그녀의 연치도 열일곱, 운우지락을 알 만한 나이였다.


 “송구하옵니다.”


 “연향아.”


 황제는 그런 그녀를 제 앞에 세우고는 그윽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헤어지던 그날처럼 정감 어린 옥음이었다.


 “예, 폐하.”


 “그대만은 내 앞에서 꿇어 엎드리지 마라. 비록 때가 좋지 아니하여 내 그대를 황귀비로 맞이하였으나 내게 있어 그대는 이미 황후이니라. 왜냐하면 황제 회민제의 인생에도, 사내 조효의 인생에도 여인이란 대연향, 그대뿐이기 때문이다.”


 후궁으로 간택되는데 황제가 황후의 예를 다하여 맞이하였노라고 구설이 많음을 그녀도 알았다. 그녀의 부친인 대수협이 번왕이자 신료들의 수반인 대승상이고 황제가 기주성을 귀하게 여기는 터라 시비하는 언사가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따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걸음걸음 살얼음판 같을 황궁에서 그러나 자신만큼은 그녀의 편이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황제가 다짐하여 주고 있었다. 이태 전 기주에서 떠나가는 그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녀와 기주만은 그의 곁에 있으리라 맹세하여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신분을 알지 못한 채 우연히 만났을 적에도, 폐하께서 존체이심을 알려주신 연후에도 신첩에게 있어 연모란 오직 황제 폐하 한 분뿐이셨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안다. 우리가 함께 하였던 순간을 어찌 잊으랴.”


 자상한 옥음으로 그녀의 말을 받고는 황제는 연향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멀리서 보았을 적에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으나 다시 보아도 곱구나. 짐이 보내준 적의가 마치 그대와 하나인 듯 잘 어울리지 않느냐.”


 황제의 언사에 연향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였다.


 “신첩, 후궁의 책봉의는 내명부 소관의 행사인지라 황상께서는 참석지 아니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여 잠시라도 다녀가셨나이까?”


 “가려하였다. 그러나 대승상이 후궁의 책봉의에 일일이 따라다니면 황제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 만류하더군.  보고 싶은 마음을 어이하겠느냐. 하여 상소를 이 감로전 후원 뒤의 정자로 다 옮기라 하였다. 그곳의 정자는 경사진 비탈 위에 있어, 올라서면 그대가 예식을 치른 태화전의 내원이 아주 잘 보인다.”


 “혹여 신첩의 처소가 태화전으로 정해진 된 연유도 그 때문이옵니까?”


 태화전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아니하나 황제의 침전인 감로전과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후궁전이었다. 황제는 저의 비인 연향을 보러 갈 적에 매번 번거롭게 내관을 앞세우고 고를 울리며 행차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여느 부부처럼 하나의 전각에서 오순도순 지내고 싶었다. 황실의 법도가 그리 할 수 없다고 하였기에 백번 양보한 것이 태화전이었다.


 “모처럼 황제가 되었는데 그 정도도 뜻대로 못해서야 쓰겠느냐? 부부가 자주 만나야 황실이 번성할 것 아니냐. 허니 그대는 자주 내원에 머물도록 하라. 아니 석반 이후  산책은 필히 감로전 후원에서 하면 좋겠구나.”


 “신첩, 삼가 황명을 받잡겠나이다.”


 황제는 모처럼 즐겁다는 듯 소리 내어 웃고는 연향을 안아 침소로 다가갔다. 연향은 당황하여 변명 아닌 변명을 주워섬겼다.


 “신첩 미욱하여 아직 폐하를 모시는 법에 대하여 배우지 못하였는지라,”


 그러나 연향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황제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춘 까닭이었다. 황제는 연향을 원앙금침 위로 부드럽게 눕혔다.


 “그대의 반려는 하늘 아래 오직 짐뿐이거늘, 대체 누구에게서 무얼 배운다는 말이냐.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모다 내가 알려줄 것인즉 아무 심려 말라.”


 “폐하.”


 황제는 더는 대답하지 아니한 채 조용히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겹쳤다. 연향은 두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숨결이 이내 하나가 되었다.


 “드디어 짐의 침전에도 단 이슬이 내리겠구나.”


 열넷에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열다섯에 인연을 약속하였다가 뜻하지 않게 헤어져 이태 만에 겨우 다시 만났다. 그간 켜켜이 쌓여온 그리움과 사모하는 마음이 봇물처럼 연향의 안에서 흘러넘쳤다. 연향은 넘치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두 팔을 뻗어 저에게 닿은 황제를 한껏 끌어안았다. 바람이 따스하게 불던 어느 가을밤, 예 황실의 가장 아름다운 봉황 두 마리는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서로를 애틋하게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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