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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Oct 31. 2024

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21

21장 급작스러운 이별

본 1부 황실의 꽃 






21장. 급작스러운 이별




 “그대가 참으로 좋은 생각을 하였구나. 내 이리 가까이에서 백성들이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다.”


 “신첩보다는 부모님과 성안의 수많은 이들이 노고가 컸지요. 성으로 돌아가면 모쪼록 그들의 수고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약식으로나마 신 앞에서 부부의 연을 맺겠다고 맹서 하였으니 황태자 앞에서 스스로를 칭하는 호칭이 소녀에서 신첩으로 바뀌는 것이야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막상 그 말을 입 밖에 내고 보니 몹시도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연향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하마.” 


 연향의 귓불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것을 본 승명은 저의 옆에 놓인 표의를 들어 그녀의 어깨 위로 걸쳐주었다. 연향은 당황한 기색으로 화급히 사양하려 하였으나 승명이 웃는 낯으로 그를 막았다. 


 “처서가 지나 바람이 제법 차구나. 이제 여와 혼약하였으니 그대의 몸은 그대만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귀히 여기고 보중 하라.”


 “전하의 하해와 같으신 말씀,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연향이 목덜미까지 붉히는 양을 보고서야 상기된 귓불이 비로소 수줍음에서 기인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승명은 짐짓 모르는 척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한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끝없이 늘어선 백성들을 향하여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자그마한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서 작게 고물거리는 것이 귀여워 입술 새로 웃음이 샜다. 예식에 귀족들이 아닌 기주성 백성들을 청하고 싶다는 발상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는가 싶더니, 이럴 때 보면 은애 하는 마음을 속이지 못하는 여느 소녀와 같다. 


부끄러운 양을 하면 짓궂게 놀리고 싶고, 울고 있으면 달래어주고 싶으며, 활짝 웃으면 마음이 따뜻해져서 언제까지나 맑게 지켜주고픈 이 간지러운 기분이 연모의 시작이라는 것을 승명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연향이 저에게 품은 감정과 같은 농도는 아닐지라도 연향과 함께 하는 시간이 쌓임에 따라 그녀를 괴는 마음이 제 안에서 나날이 자라나고 있었다. 승명은 그녀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더는 막지 아니하기로 하였다. 연향이 그를 위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듯이 승명 또한 그녀가 지금과 같이 아랫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국모가 될 수 있도록 곁에서 그녀를 지켜 주리라 다짐하였다. 그저 정략의 일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혼사의 의미가 연향을 만나고 나서 무거워졌다. 그리고 승명은 자신이 느끼는 묵직한 책임감이 결코 싫지 아니하였다.


 나라 안의 몇 개의 성을 돌고 나서야 승명은 부황과 모후가 하고많은 귀족 가운데서 어찌하여 기주의 대씨만을 고집하였는지 그 연유를 깨닫게 되었다. 연향도 좀처럼 보기 드문 재녀였으나, 호번왕 대수협은 다른 성의 군주들과 확연히 달랐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라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 그럴수록 승명의 궁금증도 늘어났다. 하여 대리청정으로 조당을 맡게 되자 그는 바로 원행을 택하였다. 직접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형편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성을 돌고 나니 기주에만 상시가 존재하는 까닭이 더욱 궁금해졌다. 기주에 닿은 날 호번왕이 붙여준 첨사 양모환은 승명에게 놀라운 사실을 일러주었다. 바다에 접해 있는 수많은 성들 가운데 오직 기주성만이 해금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태예국과 해협을 끼고 마주 보고 있는 해성국 사이에는 크고 작은 군도가 줄지어 있었는데 그곳은 약탈을 업으로 삼고 있는 수적들의 근거지였다. 몇 번이나 황실 차원에서 소탕하려 하였으나 그 수가 워낙 많고 무리가 교활하여 쉽지 아니하였다. 하여 태예국의 수많은 토호들은 해금령을 내려 바다를 통한 교역을 막고 해랑적이 황국의 연안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봉쇄하였다. 


각 성에 주둔해 있는 중앙군으로는 바다에서 기승을 부리는 해랑적을 감당할 수가 없고, 따로 사병을 키우기에는 자금이 부족하니 해금 정책만이 현시점에서는 유일무이한 답인 듯 보이기도 하였다. 농토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세는 한정되어 있는데 무리하여 조세를 물리게 되면 농민의 이반이 가속화되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지 않겠느냐는 것이 해금정책을 지지하는 토호들의 논리였다. 


 그러나 기주의 호번왕은 여타의 성주들과 완전히 상이한 접근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태예국과 해성국, 대맥국 삼국을 잇는 해상 교역로를 포기할 수는 없는 몇몇 상단에게 특정 항로를 지정하여 준 뒤 항로를 따라 군함과 정식 훈련을 마친 수병 부대를 배치하여 그들의 재물을 보호해 주고 그 대가로 기부금을 받았다. 어차피 바다를 건너오려면 해랑적들 때문에 실력 있는 용병 부대를 따로 구해야 할 입장이었기에 상단 행수들에게도 과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거둔 군자금으로 군병을 모집하고 훈련시켜 마침내 대수협의 수군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기주성 인근의 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왕작을 계승하기 전부터 이 일을 전담하고 있던 대수협은 번왕이 된 이후에 기주성 내에서 안전하고 자유로운 상권을 보장하는 대신 상세라는 새로운 세목을 만들어 그들에게 일정 금액을 받았다. 비정기적으로 액수가 정해지지 아니한 기부금을 내는 것보다는 주기적으로 정해진 세율의 조를 내는 편을 선호하는 상인들은 호번왕의 조치를 환영하였다. 상세라는 항목으로 거둔 조로 성안 곳곳에 상시를 개설하여 상행위를 감시하고, 물가를 조절하는 기구를 설치하여 시장을 관리하였으며, 남는 재화로는 시장 가까이에 보를 만들어 빈민을 구휼하고 병자를 돌보았다. 


 다소의 상세를 내더라도 해로를 통한 안정적인 물건 수급이 가능하고 판로 확보가 용이한 기주로 나라 안의 사상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히 기주의 상권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상세 수입이 늘어나자 호번왕은 원활한 물자 유통을 위하여 성내의 백성들을 일당을 주고 고용하여 성안의 길을 닦고, 강과 나루터를 보수하고, 역참을 증설하였다. 역으로 강제 징발한 것이 아니라 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수를 주고 진행하는 공사라 그 속도가 믿을 수 없을 만치 빨랐다. 수륙 양측 모두 물자 이동이 안전하고 편리한 기주는 태예국에서 가장 번성한 성이 되었고, 이 모든 변화는 대수협이 왕작을 계승한 후 불과 삼 년 만에 이룩해 낸 성과였다. 


 호번왕은 그저 야심만 가득한 토호가 아니었다. 기주의 번성은 모두 그의 수완에 기초해 있었다. 기주에 와서 대수협을 만나고 그가 바꾼 성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승명은 연향과의 혼담이 호번왕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깨달았다. 호번왕은 황제인 영락제가 황태자인 승명에게 맡기고 싶어 하는 나라의 인재였다. 승명 또한 그를 보고 나니 승상부를 부활시켜 대수협의 뛰어난 능력을 태예국 전체를 위하여 쓰고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대수협의 남다른 면모는 이번 예식 준비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는데, 예식에 귀족들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청하고 싶다는 제안을 낸 연향도 연향이었지만, 그러한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호번왕의 대범한 성정이 승명으로서는 더 놀라웠다.


 어린 연향이야 제안의 파급효나 그를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얼마만큼의 노고가 들어야 할지 계산하지 않고 발언했을 수도 있으나, 호번왕은 입장이 달랐다. 수많은 공사를 해보고 군사를 키워 전투를 몸소 지휘하고 성안의 대소사를 치르며 사람을 부려온 대수협이 이 일이 눈에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더 많은 수고와 재물이 들어갈 잔치가 되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한데도 그는 고민 없이 받아들여 단 며칠 안에 모든 준비를 끝냈다. 수많은 백성을 청하여 예식을 치르는 일은 그저 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은 준비 과정의 추이를 지켜보았기에 승명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이만한 규모의 예식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치러낸 기주의 재력도 대단하였으나, 백성들에게 앗아갈 줄만 알고 베풀 줄 모르는 여타 토호들과 전혀 다른 대수협의 호방함이 승명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언행에 무게를 실어라. 황태자가 되어 네가 부릴 아랫사람에게 우스워 보이면 아니 된다. 기백에서는 밀리지 말아야 하되, 눈은 밝게 하고 귀는 사방으로 열어두며 마음은 겸허하게 하여 원행에 나선 그 누구보다도 멀리 보고 널리 들으며 많이 느끼고 두루 익히고 돌아와야 할 것이다.’ 


 원행에 나서겠다고 고하였을 때 황제인 영덕제가 내린 당부가 호번왕과 기주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었음을 승명은 뒤늦게 깨우쳤다. 부황의 바람대로 승명은 수협에게서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이곳에 오지 아니하였다면 보고 느끼고 익히지 못하였을 수많은 것들이 그를 성숙시키고 있었다. 


 이번 약혼은 그 준비과정과 절차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이례적이지 아니한 일이 없었으나 축제라도 맞이한 양 즐거워하는 기주 백성들의 모습을 둘러보고 기꺼운 마음으로 내성으로 돌아온 승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뜻밖의 비보였다. 황성에서 황후의 명을 받아 나왔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사자가 승명에게 황망한 얼굴로 고하였다.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의 환후가 깊어져 황태자 전하께서는 급히 환궁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황제를 대신하여 순행에 나선 황태자에게 따로 사람을 보내어 환궁 요청을 할 정도라면 황제의 병환이 심상치 않다는 의미인지라 좌중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승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내관을 불러 즉시 환궁 절차를 밟으라 하명하였다. 번왕 내외도 그의 환궁절차를 돕겠다고 자리를 떴다. 승명이 예하 수하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리는 것을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지켜보고 있던 연향이 황태자가 주위를 물리자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신첩도 전하를 따르면 아니 되겠나이까? 금일 전하와 혼약하였으니 이제 신첩 또한 황실의 일원이 아니옵니까?”


 “마음성은 고우나 황제 폐하께서는 강건하신 분이시다. 그대가 우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과히 심려치 말라.” 


 승명은 그리 타이른 다음에 연향의 손을 잡아 그녀를 저의 품으로 당겨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좋은 날 끝까지 함께 하여 주지 못하여 나 역시 몹시도 유감스럽구나. 내 그대가 근심치 않도록 황성에 도착하면 폐하의 환후에 대하여 인편을 보내어 알려주마.”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러한 때에조차 신첩의 걱정을 하십니까. 신첩은 이제 전하의 사람이옵니다. 오로지 전하만을 위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니 신첩 앞에서는 약해지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러한 때에는 신첩에게 기대셔요.”


 승명으로부터 늘 우지라고 놀림받던 연향은 뜻밖에도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의연하였다. 환난 가운데서 강하여지는 예 황실의 여인다운 모습이었다. 승명은 우습게도 자신이 이 작은 소녀에게 위로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켜주려고 하였는데 어느새 그 또한 이 어린것에게 지킴을 받고 있었던가. 어쩐지 목이 칼칼하게 잠겨오는 기분이라 그는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신첩 이곳에서 폐하의 쾌유와 황실의 안녕을 기도하고 있을 것이오니, 부디 전하께서도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전하께서 신첩에게 당부하셨듯이 전하께서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십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전하 곁에는 항시 신첩과 기주가 있음을 잊지 마오소서.”


 “내 곁에는 늘 연향 그대가 있음을 결코 잊지 않겠다.” 


 승명은 처음으로 연향의 이름을 입에 담아 부른 후에 환궁 준비가 되었다고 저를 맞으러 온 내관을 따라 몸을 돌렸다. 번왕 내외와 기주의 가신들이 배웅을 위하여 성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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