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황실의 꽃 20장
승명과 연향의 약혼식은 처서가 지난 어느 화창한 날에 행해졌다.
입추 이후로 누그러진 더위는 처서에 이르러 확연히 꺾였다. 높아진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오고, 바람결에는 습기가 전부 사라졌다. 입추 후 처서까지 비 한 번 오지 아니한 채 연일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처서는 곡식의 이삭이 패는 때인지라 이 무렵의 날씨는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좌우한다 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행히 올해는 유난히 날이 쾌청하고 볕은 왕성하여 일 년 농사의 수확만을 바라온 이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간소하게나마 기주에서 약혼을 하자는 제안이 나온 날, 시기를 묻는 번왕과 기주의 신료들 앞에서 승명은 내게는 길일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기꺼워하는 날이 바로 가신이라 답하였고, 그에 따라 잡힌 예식 날은 그의 마음을 반영하듯 이른 아침부터 햇살이 눈에 부셨다.
예식에 앞서 기주성을 포함하여 호수와 강이 많은 태예국 중북부에서 폭넓게 믿어지는 수신전의 청룡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다며 새벽같이 출발한 승명과 번왕 일행과 달리 연향과 번왕비는 준비를 다 마치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호위와 수발 하인들을 데리고 신전에 도착하였다.
황태자와 번왕이 풍숙을 비는 제를 지내는 모습을 본다고 신전 주위에 몰려 있던 백성들이 연향의 도착하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예복을 입고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승교에서 내린 연향은 저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식전바람부터 계속 기다려준 기주의 백성들에게 웃는 얼굴로 일일이 감사를 표하며 신전으로 향했다.
워낙에 급히 잡힌 일정인 데다 약혼이라는 절차도 따로 전례가 없었던 일인 만큼 나라 안의 토호들과 중앙 귀족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느라 시일을 지체하느니, 차라리 기주의 백성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견을 낸 이는 바로 연향이었다.
연향은 기주의 백성들은 그녀와 대씨 문중의 근간이라 배우며 자라났다. 그러한 그녀가 행복한 날에 저의 뿌리이며 대지인 이들에게 축복을 받고 싶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승명 또한 연향의 그러한 바람을 귀히 여겼다.
호번왕이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자, 연향은 화색이 만연하여 성내 백성들에게 알릴 초청의 문구를 손수 작성하였다. 아무리 농한기라 하나 제 욕심에 따라 고단할 백성들을 억지로 동원하고 싶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연향이 만든 약혼 초대의 글은 예식을 이틀 앞두고 기주 내의 모든 저자와 각 현에 나붙었다. 기주 백성들의 자랑거리였던 어여쁜 현주가 친히 그들을 향해 사랑하는 기주의 백성들과 더불어 자신의 소중한 날을 같이 하고 싶으니 자리를 빛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며 고운 말씨로 청빈하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리하여 예식 당일 갓밝이 전부터 신전 주위는 연향과 승명을 보러 나온 이들이 운집하여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정식 대례가 아니고 비록 간소하게 치러지는 약혼이라 하나 언제나 귀족들만의 잔치였던 것을 연향이 그 관습을 부수어 모든 이들에게 개방하였으니, 그것은 응당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승교에서 내리면 몰려든 인파로 인하여 다칠 수도 있다며 시위장은 가인으로 하여금 소리쳐서 백성들의 접근을 막아 물리치겠다고 진언하며 가마에서 내리려 하는 연향을 만류하였다. 연향은 저를 축하하고자 나온 이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리 없다고 부드러운 말로 시위장의 충언을 물리치고 밖으로 나섰다.
수많은 이들의 환성 속에서 연향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터준 길을 통해 신전 앞 계단까지 무사히 이르렀다. 그녀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건너 해성국에서 가져온 하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기나긴 계단이 맑은 햇살 아래 아름답게 빛을 발하였다.
길게 뻗은 백색 계단 중간 즈음에는 기주의 상징인 수룡을 수놓은 면복을 입은 승명이 서 있었다.
훤칠한 황태자가 성장을 하고 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설렘으로 벅차올랐다. 햇빛이 찬란한 초가을의 정오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저를 축복해 주고자 나온 수많은 이들의 마음은 그녀의 가슴을 더없이 따스하게 만들었으며, 이 예식에서 그녀와 부부지연으로 묶일 이는 연향이 은애 하는 바로 그이였다. 연향에게는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으리만큼 완벽한 하루였다.
“오르시지요.”
의전을 맡은 수신전의 신관 한 명이 연향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허리를 굽혔다. 연향은 스치듯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기 위하여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렸다. 계단 위로 한 걸음 내딛자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이 계단 아래로 굽이굽이 파도쳐 내린 예복의 치맛단을 조심스레 붙들어 올렸다. 무거운 예복 때문에 연향이 계단 위에서 휘청거릴까 저어하듯이.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연향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백성들의 환성이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인데도 기쁨과 설렘으로 심사가 어지러운 까닭인지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신실한 모친 아래 태어난 덕에 연향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계단을 헤아릴 수도 없으리만큼 많이 올랐다. 그러나 연향은 이 층계를 내딛는 걸음이 이리도 조심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난생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지나지 않았던 조형물이 그 위에 가슴에 품은 정인이 서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렇듯 영혼 깊숙이 스며들 수 있으리라고 어찌 상상인들 할 수 있었으랴. 이 순간 연향에게 이 계단은 그야말로 빛의 세계로 가는 가장 경건하고 가장 신성한 길처럼 느껴졌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연향은 점점 좁혀지는 황태자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열 걸음, 여덟 걸음, 아니 다섯 걸음, 딱 그 정도 거리에 이르렀을 때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황태자가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가슴속에서 뜨겁고 뭉클한 것이 치솟아 올랐다. 연향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그에게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마지막 한 걸음을 앞두고 승명이 눈부신 햇살을 등지고 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의 다정한 눈동자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연향은 전신으로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가득 차서 온몸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기쁨으로 가슴이 뻐근하리만큼 벅찬데도, 마음 구석은 두렵기도 한 복잡다단한 감정 속에서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설렘으로 잘게 떨리는 연향의 손이 승명의 손 위에 겹쳐지자 귀청이 떠나갈 듯 커다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황태자 전하 천추만세, 현주 자가 천추만세, 부디 홍복을 누리소서.”
축수하는 환호성 속에서 승명이 연향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자상하게 저를 굽어보는 눈앞에서 연향도 살포시 미소 지었다.
신관들의 도움을 받아 성수로 손을 씻는 일부터 서로에게 신실할 것을 맹세하는 마지막 절차까지 예식의 모든 과정이 무사히 끝이 났다.
식이 마무리되자 번왕은 곱게 싼 이바지 음식들을 백성들에게 돌렸다. 성내 백성들을 하객으로 상정하고 잔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내성의 숙수들만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될 만큼 엄청난 양이었기에 번왕 내외는 성내의 모든 상단 행수들을 동원하여 기주 안에 음식을 파는 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물론이요 인근 성의 숙수들까지 다 데려와 며칠을 새며 음식을 장만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성 안의 모든 이들이 며칠간 쉴 새 없이 바빴지만, 음식을 하는 이들이나 베푸는 이들이나 전혀 싫은 내색이 없었다. 이 모두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번 약혼 준비 과정에서 가장 고되었던 일은 이바지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나 좋아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니 그간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라 번왕 내외는 그저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백성에게 베푸는 은광은 그대로 가문의 홍복으로 돌아온다는 가훈에 따라 예식 후 성안을 도는 동안에도 연향은 하인들을 시켜 말린 과일과 과자를 포장한 작은 꾸러미를 행진을 구경 나온 이들에게 던져주도록 하였다. 신부인 연향은 백성을 하객으로 청하고, 신랑인 승명은 백성이 내 가족이다 하여 이바지 음식을 그들에게 돌리니, 과연 인구에 회자될 만큼 미담 일색인 예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