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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Oct 24. 2024

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19

제19장 모종의 거래

1부 황실의

본1부 황실의 꽃 



19장. 모종의 거래






“신전에 귀의하겠다는 바는 확고한 것이냐?” 


 겉으로 드러내어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채란은 마음이 복잡하였다.


  내일 아침 일찍 신전으로 가면 그것으로 그간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리라 여겼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저버린 순간에 예기치 못한 번왕의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또 다른 기회일지, 아니면 함정일지 알 수 없었기에 채란은 일단 처신에 신경을 쓰기로 하였다. 


 번왕인 대수협은 그 아들인 성운과는 아주 달랐다. 섣부른 접근도, 눈에 띄는 경계도 금물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황태자 앞에서 자신답지 않은 실수를 범하였던 일을 상기했다. 상대의 도량을 염두에 두지 아니한 채 상황에 급급하여 마음만 앞세우다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은 이틀 전의 밤 그 한 번으로 족하였다.


 “그러하옵니다.”


 대수협은 말을 돌리지 아니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너에게 입궁의 길을 열어주어도 그러하냐?”


 채란은 번왕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하여 침묵하였다. 같은 입궁이라 하여도 어떠한 위치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녀가 받을 대우도, 그에 대한 그녀의 대처 방식도 천차만별이 될 터였다. 


 하지만 연향의 국혼을 앞둔 상황이었기에 입궁이란 말의 함의가 더더욱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저의 대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물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어찌 답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신전 외의 선택지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직감했다. 


 그러므로 천진한 척 반문할 수는 없었다. 대수협의 눈에 아둔하게 비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악한 면모가 지나쳐 손안에 둘 수 없는 장기짝이라 여겨진다 하여도 가차 없이 버려지는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순진함과 당돌함 사이에서 적당한 선을 잘 가늠하여야 했다. 고민 끝에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 궁으로 말이옵니까?”


 되바라진 채란의 질문에 수협은 웃었다. 여간내기가 아니라 한 소씨의 평은 정확하였다. 욕심도 있고 배포도 두둑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영악하기 이를 데 없다. 정확하게 수협이 바란 인재였다. 


 “당찬 배포가 마음에 드는군. 그래, 너는 어느 궁으로 가고 싶으냐?”


 “소녀가 고르면 어디든 갈 수 있나이까?”


 채란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굳이 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소녀가 고를 수 있다면, 황후전으로 가길 청하나이다.” 


 갑자기 번왕인 자신 앞에 불려 와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아니하기에 저 당찬 성정으로는 응당 대전이나 동궁을 고르리라 여겼으나 채란의 답은 그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수협은 채란을 바라보았다.


 “연유가 무어냐?”


 “소녀, 전하께서 소녀를 부르신 까닭을 고심해 보았습니다. 고민 끝에 현주 자가의 국혼을 앞두고 소녀를 입궁시켜 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필시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나이다. 현주 자가의 시중을 들 시녀로서가 아니라면, 황궁 내의 소식을 듣고 전하께 알릴 세인의 역할이겠지요. 허나 전자의 경우였다면 아침에 하직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때에 낭랑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을 것인즉 응당 이 자리는 후자의 후보로 선 것이 아니겠나이까.”


 “너는 내가 세작인 너를 내명부에 두는 것보다는 대전에 머물게 하는 편을 선호하리라 여기지 않았느냐?”


 “평소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러하였겠지요. 허나 지금은 황태자 전하께서 대리청정 중인 비상시국 아니옵니까? 이는 황제 폐하의 환후 때문이니, 소녀가 대전 여관이 된다 하여도 궁에 갓 들어온 신출내기에게 환 중에 계신 황상의 시중을 드는 일처럼 중차대한 소임을 맡길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소녀는 대전으로 가도 폐하를 가까이할 수 없어 번왕 전하의 세인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하여 소녀 내명부의 수장이신 황후 마마 곁으로 가고자 하였나이다. 황후궁이라면 내외명부의 부인들이 오가는 곳이니 제가 소식을 듣고 밖으로 흘린다 하여도 의심을 피하기 쉬울뿐더러, 부족한 제가 만에 하나라도 황후 마마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면 훗날 현주 자가께서 입궁하셨을 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영악한 것 같으니. 어찌 답하여야 의심을 피할 수 있는지 잘 아는구나. 지금 너의  그 언사를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 수족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냐?”


 “그에 대한 답을 올리기 전에 소녀도 전하께 여쭙고 싶은 바가 있사옵니다.”


 대수협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래로 인하여 소녀가 얻을 것은 무엇이옵니까?”


 “네 언사가 무도하기 이를 데 없구나. 네까짓 것이 감히 이 대수협을 상대로 거래를 하고 있다 여겼단 말이더냐?”


 번왕의 서릿발 같은 냉갈령에도 채란은 전혀 동요 없이 서 있었다. 


 “송구합니다. 하오나 이 거래에서만큼은 소녀가 전하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나이다. 전하께서는 소녀에게 어떤 필요를 느끼나, 소녀는 전하께 딱히 바라는 것이 없다는 점이 그 첫 번째 까닭이오며, 소녀는 전하께서 소녀에게 바라는 바를 이렇게 짐작이라도 하오나 전하께서는 소녀의 심사를 헤아리려 하시지 아니함이 그 두 번째 까닭이옵니다. 이렇듯 소녀가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데 어찌 전하께서는 소녀가 이끌릴 만한 조건을 아니 주십니까? 소녀는 입궁치 않더라도 잃을 것이 없사오나, 전하께서는 소녀가 없으면 이 일을 맡을 다른 이를 물색하기 위해 재차 번거로움을 감당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이 자리에서 소녀를 만족시켜 주소서. 그리 하여야 소녀가 차후에라도 전하를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수협은 크게 웃었다. 입때껏 그 누구도 그 앞에서 대놓고 배신 운운하는 이는 없었다. 채란이 성운의 구애를 단박에 내쳤다 하더니 과연 그럴 만하다 여겼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성운이 정도의 깜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배짱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수협은 모르는 척 반문하였다.


 “구미에 당길 조건이라. 시녀 일을 관두고 나오면 마땅한 혼처라도 마련하여 주면 되겠느냐?”


 “누구를 물색하여 주시겠습니까? 실례이오나, 소녀 대공자의 청혼조차 마다하였나이다. 그런 소녀에게 친왕비의 자리인들 탐탁하겠나이까?” 


 비록 최악의 상황에 처하였으나 채란은 아직 야망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나의 기회를 잃으면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고 그녀는 믿었다. 언제나 그녀의 삶은 나락의 끝에서 뜻밖에도 구원의 줄이 내려오곤 하였다. 가산을 빼앗기고 유리걸식할 처지에 놓이고서야 협영옥을 만난 일이나, 신전에 들어갈 날짜를 받아놓은 뒤에야 대수협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 후궁 자리라도 원하느냐?” 


 이틀 전의 유혹은 어차피 마음이 가서 한 접근이 아니었기에 승명에게 거절당하였다 하여 상처 입지 아니하였다. 외려 채란은 그 거부에 오기가 돋았다. 고고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저를 내친 황태자라 더 그가 탐이 났다. 그가 저를 욕망하게 되어 연향에게 지키겠다던 신의를 스스로 깨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자신은 연향과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승명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대수협이 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 또한 저를 원할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아니할 것이나 그녀의 열일곱 해의 삶 어디에도 쉬운 순간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뜻을 접고 한껏 몸을 낮추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야 할 때였다. 


 어차피 대수협에게 야살스러운 계집으로 낙인찍힌 마당에, 겸양을 부려 봐야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여 채란은 부러 도발적인 표현을 골랐다. 대수협은 진심이 들어가지 아니한 미사여구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대수협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면 번왕의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녀는 궁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마지막 기회 역시 놓치게 될 터였다. 


 “황후도, 황태후도 되지 못할 것이 자명하거늘, 후궁 자리를 탐을 내어 무엇하겠나이까? 소녀는 다만 제 자리에서 최고가 되고 싶나이다. 소녀가 입궁하고 세월이 흘러 연륜이 쌓이거든 제가 제조여관장(태예국 내명부 여관 중 최고 직위)이 될 수 있도록 전하께서 힘을 실어주소서.”


 “그것으로 네가 내 사람이 된다면, 그에 더하여 해주에 있는 네 아우 또한 내 그늘에서 거두겠다.” 


 은혜를 베푸는 양 보이나 기실 그 발언은 아우인 유겸의 신변을 위협하여 채란을 수중에 놓고 제 뜻대로 조정하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었다. 번왕의 검은 속내야 굳이 헤아릴 것도 없었으나 채란은 반감을 드러내지 아니한 채 오히려 화사하게 웃으며 사의를 표했다. 


 “전하의 하늘 같은 은혜에 미욱한 소녀 감읍하나이다. 아우가 아직 어리고 세상사에 어두운 책상물림이오니 모쪼록 앞으로 전하께서 많이 가르쳐 주소서.”


 번왕이 진정으로 그들 남매를 해하고자 한다면 해주성이 아니라 태예국 어디로 숨는다 한들 안전한 곳은 없다는 사실을 채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싫은 기색을 하여 공연한 의심을 살 까닭이 없었다. 외려 유겸을 내어주는 시늉으로 번왕을 안심시킬 수 있다면 저는 황궁 안에서 조금 더 운신의 폭이 넓어지리라. 채란은 수협이 저를 믿게 만들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하옵고 전하, 소녀 대외적으로는 아비의 마지막 임지였던 회령성 출신으로 입궁하고 싶나이다. 그리하여야 혹여 만일의 경우에도 전하와 해주에 계신 어르신께 폐가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채란 같이 기민한 아이는 본 적이 없다 하였던 과연 소씨의 안목은 참으로 탁월하였다. 경황없이 번국의 군왕 앞에 불려 와 태연자약하게 거래를 운운하는 담력하며, 저의 속을 읽고 최악의 사태를 예비한 적절한 대비책까지, 실로 경계할 수밖에 없을 만한 영특함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수협은 더더욱 채란을 제 수중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이 정도 아이라면 늦은 나이에 궐에 들어가도 황후의 총애를 받을 것이 자명하였고, 여관들의 수장인 제조까지도 충분히 노려봄직하였다. 실로 일이 그리 풀린다면 수협에게 있어 채란은 위험하더라도 반드시 가져야 할 패였다. 


 “너의 성의가 어떠할지 내 앞으로 기대하고 있을 것인즉, 너는 처소로 돌아가 입궁을 준비하고 있어라. 네게 궁중 예법을 가르쳐줄 이를 내 곧 보내줄 것이다.”


 “소녀, 신명을 다 바쳐 전하의 뜻을 받들 것이옵니다.”




 꽃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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