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이 급박한데 어떻게 나흘 안에 맞출 수 있겠는가.”
“현주 자가의 약혼식인데 만사를 제쳐두고 매진해야지요. 반드시 낭랑께서 흡족하실만한 예복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연향의 치수를 잰 직인의 말에 소선경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의 청혼을 받았으니 다른 성으로 이동하기 전에 간소하게나마 약혼을 하자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작일의 일이다.
연향도, 승명도 어차피 대례는 황성에서 치를 테니 그저 두 사람만의 언약으로 충분하다 하였으나, 정치적인 입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대수협이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하여 번왕비인 소씨는 나흘 뒤에 있을 약혼식을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급하게 상단의 행수 몇과 공인들을 불러 예식에 필요한 물건을 부탁하던 참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인 덕인지 오후가 되니 얼추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듯 보였다.
“급하게 서두르긴 하지만 어찌어찌 필요한 물건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소선경은 부산한 주위를 물리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딸인 연향이 저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가만히 연향을 불렀다. 눈길이 마주치자 연향이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난처할 때면 으레 하는 애교의 몸짓이었다.
약혼식을 앞두고 당사자가 이리 넋을 잃고 있다니, 이러다가는 잘 진척될 일도 그르치게 생겼다. 소씨는 엄한 얼굴을 한 채 그 연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냐?”
연향은 내당으로 향하던 길에 모친의 처소를 나서는 채란을 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고 비록 뒷모습이었으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채란은 걸음걸이마저 우아하였기 때문이다.
“들어서면서 헌천화무를 추었던 무희를 보았습니다.”
아까 소개장을 받고 나서던 채란과 맞닥뜨린 모양이었다. 치수를 재고 예물을 볼 때도 묘하게 건성이더니, 채란의 이야기를 꺼낼 만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음인가. 하지만 소씨는 섣불리 반응하지 아니하였다. 하필 이 시점에 연향이 채란을 운운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였으나, 어차피 내일이면 채란도 이 성을 떠날 터였다. 그녀는 차분히 딸의 말을 기다렸다.
“그토록 재주가 뛰어난데 평생 신전에서 보내는 건 가엾지 않습니까.”
아무리 채란에게 마음의 짐이 있다 하여도 대성운의 일이 지워지지 않는 한 소선경에게 있어 그녀는 원치 않은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씨는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아니한 채 평연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본인이 선택한 바를 두고 다른 이가 왈가왈부하며 동정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란다.”
“허나 어머님, 만일 그 선택이 강요된 바라 하여도 그와 같이 말씀하시겠나이까.”
정곡을 찌르는 연향의 발언에 소씨는 입매가 절로 굳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소씨는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신전에 귀의하겠노라 먼저 말을 꺼낸 이도, 대신관께 소개장을 써달라고 청한 이도 채란이었다. 정재를 추기 전에 약조하였던 바대로 자신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그러니 저는 아무런 잘못이 없노라고 소씨는 고집스레 되뇌었다.
“소녀, 도씨가 갈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연향의 차분한 언사가 소씨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기실은 소선경도 알고 있었다. 고작 서찰 한 통으로 채란이 받았던 모든 부당한 처우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수도, 적당한 사과가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정중하지만 단호했던 사양의 의사표시는 용서의 표식이 아니라, 거절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역시 소씨도 인지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그때의 그녀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픈 곳을 찌르는 딸 앞에서 소선경은 떳떳할 수 없는 자신을 깨달았다.
“용서하시어요, 어머님. 불민한 소녀, 어머님께 청을 드리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연향아.”
소선경이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딸의 이름을 입에 담았으나 연향의 얼굴에 감도는 결심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듯하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소녀가 입궁하게 되면 처소의 지밀시녀를 사가에서 데려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어요. 하여 소녀 도씨에게 그 소임을 맡기면 어떠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아니 되겠나이까?”
불길한 예감은 엇나가는 법이 없었다. 부탁할 일이 있노라 하였을 때부터 마음이 어수선하더니 기어이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황태자와 채란이 같은 성 안에 며칠 함께 머무는 일조차 꺼림칙하여 싫었거늘, 채란을 황태자비전의 지밀시녀로 입궁시키겠다는 기가 찬 발언 앞에서 소씨는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에는 황태자가 채란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고, 채란이 신전으로 향하는 일정을 앞당겨서 조용히 넘어갔지만, 남녀사이의 일을 하늘 아래 그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안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입에 담지 말라며 야단쳐 물리치고 싶었으나, 납득할 수 없는 일에 강하게 나가면 도리어 반발이 커지는 딸의 성정을 잘 아는 소씨는 심사를 다스렸다.
“간택령에서 최종 간택된 규수들이 지밀 시녀로 이복자매나 형편이 어려운 친척아이를 데려가는 관습도 엄연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게는 이복자매가 없고, 어머니의 질녀이면 제게도 친척이나 다름없을뿐더러 도씨 또한 갈 곳이 마땅치 않다 하니 두루 좋지 않겠나이까.”
태예국 황실에는 황실 생활로의 빠른 적응을 돕기 위하여 간택된 비빈이 입궁할 때 사가의 이복자매나 친인척을 측근시녀로 동반하는 것을 허하는 관습이 존재하였다. 그러니 연향의 제안이 전혀 사실무근의 발언은 아니었다. 이는 어린 나이에 낯선 황궁에 들어와 외롭고 불안할 비빈들의 심사를 감안한 황실 차원의 배려였다. 하지만 대수협의 고명딸인 연향에게는 자매가 없었다.
그러나 연향의 제안이 꼭 본인 입장만 고려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귀족 신분을 지닌 채로 황실 시녀가 되면 공노비로 황실에 소속되어 각종 노무를 제공하는 여타 궁인들과 달리 정식으로 내명부 소속의 여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조정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분기별로 산료를 지급받게 된다. 부모를 잃고 어린 아우를 돌보아야 하는 채란의 입장으로서는 신전으로 가는 것보다는 황궁의 여관이 되는 편이 어느 모로 보아도 가계에 보탬이 될 터였다.
“네가 채란의 형편을 두루 염려한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제안이로구나. 허나 연향아. 내 아마도 시녀 일을 권하여도 그 아이는 거절할 것 같구나.”
연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소씨는 차분한 태도로 채란에게 주려 하였던 나전함을 연향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채란이를 주려고 준비하였던 패물함이란다.”
소선경은 가만히 딸을 바라보았다. 패물함을 보고 있자니 정재가 끝내고 부왕이 채란을 치하하며 포상해주려 하자 그녀가 신전을 운운하며 마다하였던 일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영리한 연향은 모친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깨달았다.
“진연에서처럼 사양하였습니까?”
“그렇단다. 연회장에서는 사양하였으나 채란의 공이 적지 않고, 형편도 어려우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둘만 있는 자리에서 다시 권하였단다. 그러나 열어보지도 아니한 채 마다하더구나. 비록 궁핍하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한 아이이다.”
“어머님께서는 저의 제의가 그이의 긍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여기시는군요.”
소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향은 침울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저 채란을 돕고 싶었을 뿐, 자신의 제안이 그녀에게 어떻게 들릴 지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둔 바 없었다.
확실히 집안의 형편만 생각하였다면 어미가 건넨 패물함을 사양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회장에서처럼 모두가 보는 것도 아니고, 번왕비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 하물며 이제 곧 떠날 이가 체면을 차릴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하지만 타인의 시선이 있든 없든 태도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채란이 긍지를 재물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반증이었다. 그러한 채란에게 갈 데가 없으니 지밀 시녀가 되어 받은 산료로 동생을 키우라는 자신의 제의가 얼마나 오만하게 들릴 것인가.
게다가 연향은 채란 남매를 거두어준 협영옥의 외손녀였다. 연향으로서는 그저 호의에서 우러난 권유일 뿐이어도, 채란에게는 거절하기 어려운 명령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제안이 그녀에게는 더욱 커다란 상처로 남을 수 있으리라는 점이 뒤늦게 연향의 뇌리를 스쳤다.
“스스로 결정한 바라면 또 모를까, 그토록 고고한 아이에게 어찌 황실의 여관이 되어 남의 부림을 당하는 일을 감수하라 할 수 있겠느냐. 너의 말대로 그 아이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동정을 받아 누군가의 아래에 깃들 아이가 아니니 아예 말을 내지 않는 편이 채란이를 위하는 길이라고 이 어미는 생각한다.”
자분자분 이어진 소씨의 말에 연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씨의 생각도 일리는 있었다. 달리 도울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생김도 어여쁘고 재주도 탁월한데 긍지마저 남다르니 벗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하여졌다. 채란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사실이 연향은 그저 속이 상했다. 그녀에 대해 미리 알았다면 정말 친동기처럼 지내며 마음을 나누는 좋은 벗이 되었으리라는 때늦은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호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어도 상대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지 아니하면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드려요. 상황은 남루하나 도씨의 긍지가 참으로 아름답네요. 신전으로 가기 전에 인사라도 나누고 싶어요.”
소씨는 속내를 감추며 온화하게 웃었다.
“그러려무나. 그건 그러하고 연향아.”
“예, 어머님.”
“혹여 그 아이에 관한 말을 황태자 전하께 하였느냐?”
“예. 진연이 있었던 날 밤에 도씨의 처지가 가련하니 혹여 전하시라면 도와주실 수는 없을까 하여 살펴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형편이 좋지 않은 이를 긍련히 여기는 마음은 어여쁘나 정혼을 앞두고 이런 일에 당신께서 직접 나서게 되면 부모님의 근심을 살 수 있으니 아니 되겠노라 하시더이다.”
소씨는 안도했다. 연향은 영리하나 어린아이인 반면에 겨울 두 살 터울이 날 뿐인 승명은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에 두루 통달해 있는 어른이었다. 연향의 청을 거절한 승명의 심사가 너무나도 잘 헤아려져 소씨는 그가 한층 더 탐탁해졌다. 아랫사람의 실수에 너그럽고 매사를 웃어넘겨 성정이 유한 호인처럼 보이나, 국혼을 앞두고 빙가에 책잡힐 만한 행실은 딱 잘라 거절하였다 하니, 부군이 본 대로 승명은 처세에 탁월한 능구렁이가 맞았다.
“혹시 이로 인해 네가 황태자 전하께 서운한 마음을 품었더냐?”
“아니에요. 어머님. 전하께서는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공연히 우려하실까 저어하여 제 청을 거절하신 것을요. 하지만 전하의 말씀이 결국은 소녀의 체면과 가문의 위신을 감안한 배려라는 점을 소녀도 익히 알고 있나이다. 말을 내어보고 나서야 소녀도 이 일이 전하께 부탁드릴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연향은 절대로 그렇지 아니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소씨는 그러한 딸의 손을 다정하게 그러잡았다.
“황태자 전하께 청혼을 받은 이상 너는 더 이상 기주의 철없는 현주로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법이다, 연향아. 너로서는 그저 연민에서 우러나온 호의에 불과할지라도 너의 말이 황태자 전하를 통하여 나오면 그는 곧 황명이나 다름없어진다. 그것이 바로 대리청정의 무서운 점이란다. 전하께서 너를 귀애하신다 하여 네가 그를 믿고 가벼운 언행으로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을수록 너는 더욱 행실을 조심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계속 부군의 신임을 얻을 수 있으며, 황실과 조정에 너의 적이 아니 생길 것이고, 만백성의 흠모를 받을 수 있단다. 그리고 백성들의 흔들림 없는 지지는 먼 훗날 네 소생의 황태자가 보위에 오를 때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작금의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연향이 승명 앞에서 두 번 다시 채란 일을 운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낸 발언이었으나, 이제 곧 모략과 암투로 파란 많은 황실에 홀로 설 딸을 위한 진정 어린 충고이기도 했다. 본디 군주의 사랑이란 먼지보다도 가벼운 법이었다. 언제든 필요에 따라 한없이 자상하여질 수도, 또 더할 나위 없이 잔혹해질 수도 있는 황태자의 변덕스러운 애정에 취하여 연향이 남들의 이목에 오르내릴 법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소씨는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인 연향에게 내명부의 차기 안주인이란 자리는 아직 너무나 크고 무거운 옷이었다. 고생을 모르는 온실의 꽃 그 자체인 연향이 하루빨리 황태자비라는 옷에 맞게 성장하기를, 그리하여 앞으로 그녀 앞에 펼쳐질 황실에서의 삶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소씨가 어미로서 바라는 바는 오직 그뿐이었다.
“소녀의 사사로운 청이 그토록 커다란 파장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는 깊이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어머님 말씀대로 언사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그래, 어미의 말을 잘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소씨는 다정하게 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은이의 말) 쓰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많은 분들께서 읽어주시고 아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덧글 남겼는데, 26분이나 추천 눌러주시고 브런치북에도 하트 남겨주신 분이 계시어 너무 감사했습니다. 스물 여섯분이면, 제 글의 회당 조회수가 30대 안팎이니 정말 보시는 분들은 꾸준히 아껴주시는구나 싶어 무척 감사했어요. 생각해보면 낮은 조회수도 10개 정도는 왔다갔다 하니, 봐주시는 분의 3분의 일은 하트 눌러주시는 거고 비율로 따지면 정말 높구나 싶었어요. 조금 더 많은 분들께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에 브런치북 타이틀과 소제목을 조금 바꿔봤는데, 몇 분이라도 더 유입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즘 같은 고민 많은 시대에 호흡이 긴, 등장인물도 많은, 사극풍의 글이 얼마나 읽힐 것인가를 떠올려 보면 제가 참 겁도 없이 무모한 도전을 했구나 싶기도 해요. 근데 글쓰는 사람의 고집 같은 게 있잖아요. 일생의 한 번쯤은,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쓰고 싶은 글을 썼노라고 말해볼 수 있는 시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빛나는 한 시절을 살다 갔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나 읽히고 잘 팔리는 글과 쓰고픈 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오락가락하는 사람입니다만, 세월이 조금 더 흘러 이 글이 마침내 다 끝났을 때, 1화부터 계속 다 읽었어요, 함께 하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라고 답글 달아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어쩌면 저의 무모한 도전은 퍽 행복한, 의미있는 도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쓰고 있습니다. 연향과, 가상의 나라 태예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주시는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