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16장 하직인사
1부 황실의 꽃
20장. 하직 인사
“서한은 예 있다. 대신관께 드리는 소개장뿐만 아니라 내 사사로이 친분이 두터운 수녀들에게도 따로 연통을 해둘 것이니, 그들 역시 너를 많이 배려하여 줄 것이다.”
“낭랑의 배의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씨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 드는 채란의 얼굴은 이틀을 거의 꼬박 새운 이 답지 않게 단정하였다. 가지런히 서한을 갈무리하여 품에 넣은 채란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선경이 운을 떼었다.
“내 너에게 마차와 짐을 옮길 고공(머슴) 몇을 보내어 주려 함인데 날은 언제가 좋겠느냐?”
“짐은 미리 싸두었습니다. 준비를 마쳤는데 출발을 미뤄 무엇하겠나이까? 낭랑께서 번거로우시지 아니하다면 염치 불고하고 내일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나도 되겠나이까?”
채란이 결심을 빨리 하여 준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소씨는 마음이 복잡하였다.
채란을 대할 때면 기이하리만큼 불길한 기분이 들어 모친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멀리하였던 소씨였다. 거리를 두며 경계했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거늘, 이렇듯이 수녀가 되겠노라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신전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성운의 이혼 소동 이후 줄곧 채란을 박정하게 대했으나 기실 그녀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점은 곁에서 일의 추이를 지켜봐 온 소씨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를 위한 진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의 축대가 무너진 것도, 공연 준비를 하던 무희가 발을 접질린 것도 채란 탓은 아니건만 마음속 앙금을 지우지 못한 채 표독스레 대하였으니, 돕겠다고 나선 채란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서운한 기색 없이 외려 그간 많은 도움을 받았노라고 사의를 표하는 채란을 보니 타고난 성정이 모질지 못한 소씨로서는 후회가 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황태자인 승명은 음식이며 무대며 진연의 모든 것이 훌륭하였다 하였으나 그 가운데서도 채란의 헌천화무는 참석한 귀빈 모두가 입을 모아 극찬하였으니, 연회가 성황리에 매듭지어진 데에는 채란의 공이 적지 않았다. 우려하였던 바와 달리 황태자는 무대 이후에도 채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였을뿐더러, 연향은 정재가 있었던 날 밤에 승명으로부터 청혼까지 받았다고 하였다.
사람의 심사란 간사하기 이를 데 없어 연향의 일이 수월하게 풀리자 공을 내세우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다가 내일 바로 떠나겠노라 하는 채란에게 더더욱 미안해졌다.
가슴 한편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죄책감에 가만히 물러나 있을 수 없었던 소씨는 채란을 위하여 자그마한 성의를 준비하였다. 채란은 비록 포상을 사양하였으나 누구라도 찬탄을 금할 수 없을 무대를 마련하기까지 그녀가 들였을 노고를 감안하면 상을 주는 편이 지당하였다.
소씨는 탁자 한편에 놓아둔 나전함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전면은 매화와 대죽을 조패법으로 음각하고 천판은 학 모양 자개 장식을 달아놓은, 길이는 한 뼘보다 조금 길고 너비는 세 마디가량 되는 패물함이었다. 함으로 향했던 채란의 시선이 올라와 소씨를 바라보았다. 의중을 묻는 눈이었다. 떠날 즈음에 와서야 비로소 사과의 말을 건네기가 참으로 면괴하였으나 소씨는 용기를 내었다.
“성운의 일이 너의 탓이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지라 너를 모지락스럽게 대하였으니, 모다 내 덕이 부족한 까닭이다. 미안하구나. 채란아. 못난 어미의 자그마한 성의이니 받아두어라.”
“황송하신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채란은 눈앞에 놓인 선물보다 지체 높은 번왕비가 어리고 가진 것 없는 자신에게 회사 하였다는 사실에 더 놀란 듯 보였다.
“불민한 소녀가 가림새 없이 말씀 올리오니 낭랑께서 부디 넓게 헤아려 주소서. 소녀의 어려운 형편까지 살펴주신 낭랑의 은덕은 하늘에 닿고도 남음이 있사오나 이제 신전에 들어갈 제게는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이오니, 감히 받들 수 없음을 부디 용서하소서. 소녀, 낭랑의 크나큰 마음만을 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거절의 말은 일고의 여지도 없이 흘러나왔다. 공연이 끝나고 번왕의 포상을 마다할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가세가 기울어 의지할 곳조차 없는 처지에 재물에 초연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녀에게 정이 안 가는 마음이야 어찌할 수 없다 하여도 저 고고한 자존심만큼은 인정해야 할 듯싶었다.
“이리 고약한 것을 보았나. 끝내 손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송구합니다.”
단호한 태도를 보아하니 더 권해봐야 누빙일 법하였다. 그러하면 무엇으로 마음의 짐을 덜어내야 할까 고심하던 소씨는 마침내 해주에 있는 채란의 아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신께 귀의한다 하여도 하루아침에 사람의 연이 끊어지겠느냐. 너도 해주에 계신 어머님과 네 어린 아우의 안부가 궁금할 터이니, 연락이 쉽지 않을 너를 위하여 내 간간이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해주마.”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던 채란도 동기의 이야기가 나오자 여지없이 흔들렸다. 까만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금세 부풀어 오르더니 울음을 참듯이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한껏 어른스러운 양을 해봐야 그녀도 이제 고작 열일곱 살이 되었을 뿐이라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남 앞에서 우는 모양새를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채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두 손을 이마에 올리고 절을 하였다. 사의를 표하는 목소리가 여느 때 없이 떨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울음이 새지 않게 기를 쓰는 듯 보였다.
채란을 키워낸 환경이 그녀에게 쉽사리 약한 모습을 허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기에 소씨는 평소와 달리 채란이 바로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제법 오래 수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을 했다.
잠시 후 다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을 때 채란은 비록 눈가는 촉촉하였으나 표정만은 차분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불민한 소녀 이 자리에서 낭랑께 미리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그간 돌보아주셔서 감읍하나이다.”
‘어린것이 참으로 독하기 이를 데 없구나.’
소선경은 내심 혀를 차며 그녀의 하직 인사에 답을 했다.
“그래. 따로 나가지 않으마. 조심히 잘 가거라.”
채란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조용히 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