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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Oct 08. 2024

맥脈, 衇, 霡 제1부 황실의 꽃 14

제1부 14장 풍등에 띄운 소원




1부 황실의 꽃 






14장. 풍등에 띄운 소원




 연회가 끝나고 나선 까닭에 승명과 연향이 야시장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점등제는 이미 끝이 난 이후였다. 하지만 거리는 수백여 개의 등불로 인하여 대낮같이 환했으며, 시장 한편에 마련된 가설무대 주위는 온갖 기예를 뽐내는 백성들로 인하여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무대를 구경하는 이들과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 갖가지 색을 입힌 풍등을 손에 쥐고 소리 높여 호객 중인 부상들, 등을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이 한데 뒤섞여 야시장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연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여느 처자나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환영연에서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구나.”


 몇 걸음 앞서 있던 연향이 웃으며 승명을 돌아보았다. 


 “사람이 많으니 절로 흥이 나지 않습니까. 마주치는 이들 모두 즐거운 기색이 만연하여 소녀도 자꾸만 웃음이 납니다.”


 “나오지 아니하였다면 또 장히 울릴 뻔하였다. 내 풍등을 사줄 터이니 소원을 빌어보겠느냐?” 


 원한다면 풍등으로 성을 가득 채울 수도 있는 연향이건만 사줄까 하는 한 마디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의 얼굴 가득 아른거리는 기대의 빛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년 가을 영수전에서 나룻배에 태워줄까 하고 운을 떼었을 적에도 연향은 꼭 저런 표정이었다. 


 “풍등을 날리려면 강둑까지 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에 대수라고.”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힘들다 하시면 소녀가 난처해지지 않겠나이까.” 


 둘만 있는 자리에서도 저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가득하여 서운케 하더니, 언제 또 까마득히 어려워하였는가 싶게 연향이 짓궂게 농을 걸어왔다. 과연 우는 그녀를 품에 안아 오래도록 둥개둥개 얼러준 보람이 있었노라고 승명은 생각하였다. 


 대례를 치르기 전까지만이라도, 아니, 하다못해 그녀와 둘이 지내는 사사로운 시간만이라도 연향이 예전처럼 저를 편히 대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책봉식을 거쳐 황태자비의 위에 오르게 되면 승명이 아무리 연향을 연향답게 지켜주고자 애를 쓴다 할지라도 그녀 주위의 모두가 연향에게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을 강요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마음 한 톨 없는 정략혼이라면 또 모를까, 승명은 연향이 자신의 곁에 있기에 불행해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아니하였다.


 “어디 예전처럼 태연하게 궐공 운운도 해보지 그러느냐.”


 “그토록 사소한 일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계시다니 의외로 대범치 못하시옵니다.”


 “하면 나는 한층 더 밉상이 되었겠구나.”


 승명이 웃는 낯으로 그리 되받아치니 연향이 밉지 않게 입을 삐죽거렸다.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앞으로는 소녀를 짓궂게 놀리시지 않겠노라 약조하신 지 아직 채 하루도 아니 지났습니다.” 


 “대범한 그대가 이해해 주려무나. 나도 난처하기 이를 데 없다. 소심한 내게는 그대의 사소한 말 한마디마저도 새록새록 하니 어이 한단 말이냐. 그간 내 달음박질이랑 노젓기까지 연습하지 않았느냐.” 


“참말로 궐 안에서 달음박질까지 하셨나이까.”


“암, 이제는 그대를 업고도 잘 달릴 수 있다.”


“자꾸만 그리 호언장담을 하시면은 소녀가 도중에 발이 아프다고 어리광을 피울 수도 있습니다.” 

 “발이 아프면 내 기꺼이 업어주마.”


 “그런 불경을 지었다가 무슨 지청구를 들으라고 그러십니까.”


 “지아비가 지어미를 아껴서 하는 행동에 어찌 불경을 논하느냐. 혹여 누가 그대를 나무라면 나도 같이 서서 야단을 맞겠다.” 


 연향이 까르르 웃었다. 살결이 희고 선이 동그스름하니 다복하게 생긴 연향이 활짝 웃으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거리에 내려와 있는 양 하였다.


 “소녀의 속에 들어가셨다 나오셨습니까. 어찌 그리 듣고 싶은 말씀만 하시는지요?”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여도 그대의 낯에 다 드러나니 난들 어이하겠느냐.”


 승명 역시 웃으며 연향의 손을 잡아 저자로 이끌었다. 연향에게 아주 크고 어여쁜 풍등을 사줄 참이었다. 네 명은 잡아야 겨우 날릴 수 있을 법한 커다란 풍등을 산 뒤에, 연향의 추천으로 난생처음으로 쌀가루를 치대어 만든 길거리 전병도 맛보고, 노점에서 파는 노리개며 서책들도 구경하면서 강둑에 이르렀다. 자시가 지난 지도 한참인데 둔치에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등을 날리고 있었다. 노랗고 붉은빛으로 곱게 색을 입힌 한지로 만들어진 수많은 등불이 밤하늘을 빼곡하게 수놓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아주 어여쁘지요?” 


 홀린 듯이 하늘을 바라보던 승명은 연향의 목소리에 웃는 낯으로 동조했다. 


 “그래. 아주 멋지구나. 그나저나 풍등제를 위한 공연은 저자에서 이루어지던데, 어찌하여 등은 강가에서 날리는 것이냐.”


 “풍등을 띄우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백성들이 좋아하지만, 등이 민가에 떨어지면 불이 날 수도 있답니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그러한 일이 있었기에 부왕께서 올해는 등불 축제를 금하려 하셨으나 소녀가 청하였답니다. 강가나 해안가에서 등을 날리면 혹여 떨어지더라도 불이 날 리 없으니 부디 등불 축제를 폐하지 말아 주십사 하고요. 지금도 보시어요. 다들 기뻐하잖아요. 만약 풍등제가 없어졌다면 많은 이들이 슬퍼했을 거예요.”


 연향의 말에 승명은 이곳까지 오면서 보았던 수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저자에서 등을 사고파는 이들도, 여기서 소원을 비는 이들도 하나같이 얼굴이 밝았다. 이는 성내 백성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연향과 어린 딸의 청에도 귀를 열 줄 아는 번왕의 넓은 그릇 덕택이었다. 


 “그대는 참으로 마음씨가 곱고 사려가 깊구나.” 


 작년 가을 부황과 모후의 의중이 연향에게 가 있음을 깨달았을 때 승명은 혼인 생활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버렸다. 그것은 우연한 자리에서 신분을 숨긴 채 만나 보았을 때만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반나절도 되지 않는 짧은 만남 한 번으로 됨됨이를 다 알 수는 없는 노릇, 아이는 당차면서도 묘하게 천진하여 그 점이 인상적이었으나 그때만 하여도 그저 그뿐이었다. 연향의 자색이 곱다 하나 황성에는 워낙 미인이 많았기에 외모 또한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맨 처음에는 이 혼사로 얻을 수 있는 이득만을 셈하였었다. 기주성의 무력과 태예국 중북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씨 문중을 온전히 저의 편으로 얻는 대가로 하는 혼사이니 상대가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품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한 승명에게는 하등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입때껏 처세가 어려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제 사람으로 얻어야겠다고 여긴 이를 제 편으로 만드는 데에 실패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소녀의 마음을 얻는 일 정도야 별것 아니라며 문문하게 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향은 귀한 가문에서 나서 평생을 받들리며 자라난 여느 규수들과 달랐다. 강한 듯 여렸고, 천진한 듯 사려 깊었으며, 오만한 듯 사랑옵고, 무심한 듯 다감하였다. 연향의 독특한 면면이 자꾸만 승명의 눈길을 잡아매고 누구에게도 허한 바 없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말았다. 


 승명은 보면 볼수록 이 작은 소녀에게 젖어드는 마음을 숨기고자 고개를 돌려 거리를 두고 저를 따르던 수하들을 불렀다. 고귀한 황태자가 황태자비 감인 현주와 더불어 교자며 절병이며 온갖 저자의 음식을 맛보며 거리를 활보하는 동안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뒤따르던 이들은 주인의 부름에 냉큼 달려와 석랍에 불을 붙여 풍등을 부풀리는 일을 기꺼이 도왔다. 네다섯은 붙들고 있어야 할 만큼 커다란 풍등을 사놓고서 그마저도 둘이서 어찌해보겠다며 고집을 피울까 내심 불안하던 차였다. 접혀있던 붉은 한지가 한껏 부풀어 오를 때까지 붙들고 있던 승명은 맞은편에서 눈을 감고 소원을 빈 연향이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그녀와 함께 등에서 손을 떼었다. 구속을 벗어난 등이 바람을 타고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승명은 손짓으로 주위를 조금 물린 뒤 운을 떼었다. 


 “기도가 길던데 소원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느냐.”  


 “황제 폐하의 쾌유를 발원했습니다. 하옵고······.”


 기원을 담은 풍등이 하늘 높이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승명은 연향이 말을 멈추자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연향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 곁붙이가 생기면 좋겠노라고 기도했어요. 매사에 능란하시고 주위에 사람이 많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두시는 데가 없으신 듯 하와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외로워 보였더냐?”


 승명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일견 쾌활해 보이고 처세에 능란한 그에게 외로워 보인다는 소리만큼 가당치 않은 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연향이 그에게 남에게 보이지 아니한 모습을 보였듯, 그 역시 그러하였기에 그는 더 이상의 말없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전하를 뵙기 위해 영빈각으로 가기 전에 소녀 역시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에 대하여 조금 알아본 일이 있었나이다. 홀로 금을 타시거나 서책을 읽으시거나 난을 치시는 것을 즐기신다고요. 하나 금도, 책도, 서예도, 그림도 모다 홀로 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인사에 지치시면 주위를 물리시는 거지요? 지난가을 정자에서도 그러하였고요.”


 연향이 느릿하게 돌아서 승명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 없는 맑은 눈이 똑바로 그를 향했다. 그 눈이 누구도 들여다본 적 없는 승명의 속내를 짚어 보고 있었다. 연치에 비하여 상당히 영리하다 여기긴 하였으나 연향이 이토록 깊은 혜안을 지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부족한 몸으로 제가 감히 전하의 곁붙이가 되겠노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소녀는 다만 전하께 봄볕 같은 이가 되고 싶습니다. 가난하고 모자란 이들에게도 늘 다사한 봄볕처럼 저는 전하께서 어떤 모습을 하셔도 항시 따스하게 품을 것이옵니다. 하오니 제 앞에서는 너무 애쓰지 마시어요.” 


 애쓰지 말라는 소리에 승명은 쓰게 웃었다. 연향은 그의 약한 곳을 들여다본 최초의 사람이었고 그의 마음 또한 이 지혜롭고 정다운 아이에게 기울어진 지 오래이나, 얄궂게도 마음이 가는 이 앞에서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는 것이 승명의 입장이었다. 승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혼사의 뒤에 놓인 계산과 그로 인해 그가 번왕과 주고받게 될 거래였다. 기주의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저를 숨기고 그 또한 연향에게 좋은 사람을 연기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만 했다. 애를 쓰지 않는 척 앞으로도 무던히 애를 쓸 자신을, 승명은 연향이 모르기를 소망하였다.


 “그대는 실로 내게 과분한 사람이구나.” 


 그 말은 숨김없는 진정이었다. 연향같이 심신이 어여쁜 이가 다른 셈속 없이 오롯이 그녀 하나만을 아끼며 바라보고 살 사내가 아닌 저를 만난 것이 승명은 안타까웠다. 그가 차기 보위를 이을 황실의 태자인 한 그에게는 연향에게 말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생겨날 것이고, 그녀는 어쩌면 솔직하지 못할 그 부분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할 수도 있었다. 


 속내를 감출 때면 한층 더 상냥해지는 승명이 다정하게 연향의 머리를 쓸었다. 틀어 올린 머리를 장식한 산호 비녀가 등불로 환히 밝혀진 밤하늘 아래 깊은 빛을 발했다. 붉은색은 대대로 길한 색이고 산호 장신구도 귀한 패물이었으나 연향에게는 이처럼 화려한 색보다는 은은하고 청초한 색감의 보옥이 더 잘 어울렸다. 도닥이듯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승명이 산호로 만들어진 꽃잠을 부드럽게 뽑았다. 


 “전하?” 


 목덜미 아래로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당황한 양 연향이 작게 승명을 불렀다. 승명은 옷자락 안에 차고 있던 필낭을 풀어 연향에게 내밀었다. 연향은 의아하였으나 잠자코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남빛 비단에 고운 비단실로 대나무가 수놓아진 수낭 안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진주 비녀였다. 은으로 꽃모양의 틀을 만들고, 꽃잎 위로 커다란 진주를 알알이 박은 비녀가 달빛을 받아 교교하게 빛이 났다. 진주로 만들어진 꽃의 모양새가 독특하면서도 우아하였고 틀에 새겨진 문양 또한 정교하고 아름다워 연향의 입술 새로 찬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흡사 눈으로 만든 꽃처럼 어여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비녀는 처음 봅니다. 이러한 것은 또 언제 사셨습니까.”


 승명은 미소 지었다. 


 “내도록 그대와 함께하였거늘 어찌 모르게 살 수 있었겠느냐. 하북성 성주가 질이 좋은 진주를 바쳤기에, 내 금방의 공인을 불러 이러한 모양으로 세공하라 하였다. 패물로는 약소하나 나의 마음이다.” 


 승명이 그려준 그림을 통해 그가 그림에도 뛰어난 소질을 지녔음을 절감할 수 있었으나, 그 재능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비녀의 도안을 그려 저에게 만들어 주리라고는 꿈조차 꾸어본 적 없었던 연향이었다. 지아비에게 이토록 정성이 듬뿍 실린 패물을 받는 여인이 또 어디에 있을까. 승명은 약소하다 하였으나 연향에게는 결코 약소할 수가 없는 선물이었다. 사내이며 만인지상에 오를 이가 어찌 이리도 저를 깊이 헤아리고 다감하게 챙기는지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황태자가 아무개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을 만치 기뻐하였던 자신이었거늘, 시종일관 온화하게 저를 돌보며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음까지 표현하는 승명을 대하고 있자니, 자신이 이와 같은 지복을 누려도 좋을지 죄민하기만 한 연향이었다. 그녀는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더더욱 노력하여 그가 저에게 보여준 마음에 보답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지어미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소녀, 이 비녀를 전하의 마음인 양 귀히 간직하겠습니다.”


 “내가 꽂아주어도 되겠느냐.”


 연향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승명은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진주잠을 어슷하게 꽂아주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장식한 진주의 영롱한 빛이 연향의 보름달처럼 환한 미모를 한층 더 빛나게 하였다. 


 “산호도 어여뻤으나 그대에게는 역시 진주가 더 잘 어울리는구나.”


 흐뭇하게 저를 바라보는 승명을 향하여 연향이 밉지 아니한 투정을 부렸다. 


 “전하께서는 정녕 너무하십니다. 소녀가 전하께 힘이 되고 의지가 되고 봄볕이 되고 팠는데 어찌하여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 아니 주십니까.” 


 “백성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어진 심성을 지닌 그대의 존재만으로도 내게는 큰 힘이 되는구나.” 


 승명은 연향의 손을 잡았다. 연향의 눈길이 붙들린 손에서부터 찬찬히 올라가 승명의 얼굴로 향했다. 


 “입때껏 내 바라는 바를 하늘에 기대어 본 적은 없었으나, 금일은 청한 일이 하나 있었다. 무엇인지 아느냐?” 


 “무엇이옵니까?”


 “그대를 울리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일국의 황태자의 발원이 저리 소박하다는 사실을 하늘 아래 누가 믿을 것인가. 연향이 볼을 붉히며 답하였다. 


 “소녀가 본디 눈물이 많지 아니한데 전하께서 팔각정에서 소녀의 마음을 앗아가신 이후로 천하에 둘도 없는 울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 전하께서 웃는 양을 어여삐 여기시니 앞으로는 꾹 참고 울지 않겠습니다.” 


 “약조하였느니.” 


 “예, 전하.”


 승명이 연향의 맑은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내었다.  


 “예 황실의 조효가 기주의 현주 대연향에게 청하노니, 나의 비가 되어주겠는가.”


 예부의 가례도감에서 선정된 납채사가 아닌 승명에게서 직접 혼인을 청하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전연 예기치 못하였던 연향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시야가 흐려졌다. 울지 말자고, 약속대로 웃으려 하였으나,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눈가에 맺혀있던 이슬이 어떻게 할 도리도 없이 툭 굴러 떨어졌다. 승명은 연향의 두 뺨을 긋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피식 웃었다.  


 “입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어긴단 말이냐. 나의 비는 우지인 데다가 순 허언만 하는구나.” 


 “송구합니다. 대신에 소녀, 대씨 문중의 명예를 걸고 단단상약하노니, 반드시 전하께 어울릴 만큼 현명하고, 백성에게 자애로운 황태자비가 되겠습니다.”


 연향은 제 뺨을 정답게 어루만지는 커다랗고 따스한 승명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는 눈물 어린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마음속 다짐을 꺼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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