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뚱냥이 Oct 03. 2024

맥脈, 衇, 霡 제1부 황실의 꽃 13

1부 13장 헌천화무의 무희



17장. 헌천화무의 무희 







 연회는 훌륭했다. 잔치를 위한 음식은 정갈하고 맛깔났으며 악공이며 무희며 하나 같이 기예가 빼어난 이들이라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였다. 황태자를 포함하여 참석한 이들 전부 향연을 진심으로 즐겼다. 모두가 즐거운 환영연은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승명은 근사한 진연을 마련해 준 번왕의 성의에 감사를 표하고, 이 일을 총괄했다는 번왕비와 기주성 예부도사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주연의 주역인 황태자가 기꺼워하자 자연스레 회장의 분위기도 밝았다. 


 연회 전에 현주와 나란히 앉겠다는 의사를 표한 승명은 연회 내내 그녀와 환담을 누며 그녀를 살뜰하게 챙겼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곰살궂고 정다워 주위에서 다 놀라워했을 정도였다. 마지막 공연을 위하여 무대를 정리하는 사이에도 승명은 고개를 기울여 연향의 말을 듣더니 맑게 웃었고, 또 이내 무어라 속삭여 연향의 볼을 수줍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번왕비가 그들 사이에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거이 나누십니까.”


 소씨는 황태자 승명이 참으로 하뭇하였다. 미형이 많기로 유명한 예 황실의 후예답게 황태자는 이목구비가 수려하면서도 눈동자가 유난히 크고 맑아 황제인 영덕제와 달리 전반적으로 유순한 인상이었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고 언사 또한 상냥하였다. 웃는 낯이 해사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성정까지 도무지 탐탁하지 아니한 구석이 없었다. 사내를 모르는 순진한 연향이 단숨에 승명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에 더하여 그와의 혼사는 연향에게 황태자비라는 영광된 지위까지 약속해 주었으니 과연 승명은 태예국 제일가는 반자지명이라 할 만하였다. 


 “현주의 성품이 사랑옵고 언변이 재치가 있어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도 듣는 맛이 있소. 과연 기주의 장중보옥이라 불릴만하오.”


 “불민한 여식을 괴이시니 어미로서는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듣는 이들이 다 부끄러울 만치 직설적인 찬사였으나 정작 승명은 연향을 귀애하는 마음을 전혀 숨길 의향이 없어 보였다.



“왕비께서 이 마지막 공연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고 들었소. 이전의 무대도 모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치 훌륭했던지라 어떤 공연이 될지 몹시도 기대되는군.”


 기대를 담은 황태자의 언사에 소선경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말지를 두고 잠시 갈등했다. 채란을 데려가 창을 들어보고 간단히 동작을 맞춰본 예부도사가 믿고 맡기셔도 되겠다고 전갈을 보내어 이대로 공연을 올리기로 하였으나, 연습이라 할 만한 것도 없이 바로 무대에 오를 채란이 행여 공연 중에 실수를 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진 소선경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있는 그대로 고하기로 하였다. 


 “실은 금일 사전 연습 중에 작은 사고가 있어 준비했던 공연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필 진연의 끝을 장식할 마지막 공연을 대체하게 된 지라 그저 송구할 뿐이옵니다.”


 뜻밖의 소식에 안타까운 탄식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러한 일이 있었던가.” 


 “예. 부군께서 공연히 근심하실까 봐 신첩이 말을 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대수협의 시선이 예부도사를 향했다. 황태자의 안전인지라 드러내어 질책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분명한 냉엄한 눈길에 도사 곽두영이 고개를 조아렸다. 


 “마지막 공연에 오를 무희 몇이 다쳐 난감해하던 찰나, 낭랑의 주선으로 대체할 무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준비한 무대를 보여드리지 못하여 소신 또한 애석한 마음 가눌 길 없사오나, 미천한 소신의 안목으로는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공연이 될 것인즉 부디 전하께서는 심려를 놓으소서.”


 “사고라니 그로 인하여 크게 다친 이들은 없는가.” 


 경직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승명이 끼어들었다. 승명의 낯빛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대하듯 차분하였고, 부러 한층 더 완곡하게 누그러뜨린 어조 또한 날 선 공기를 유순하게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자상하였다.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연회를 미루거나 파하였어도 내 전혀 개의치 아니하였을 것을, 나로 인하여 공연히 여러 사람의 노고가 더하여져서 민망하오.” 


 “말씀만으로도 감읍하나이다. 하늘의 돌보심으로 무희 몇이 발목을 조금 접질린 정도이니 크게 개의치 마소서.” 


 “큰 사고가 아니라니 불행 중 다행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훌륭한 진연을 마련하기까지 그 뒤에 숨은 왕비의 고심과 수고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소.” 


 윗사람이 지나치게 강퍅하면 아랫사람의 진심 어린 충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때로는 아랫사람의 허물을 보고도 모르는 척 너그럽게 품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승명은 아직 어린데도 잘 알고 있었다. 미리 고하지 않았음을 탓하기는커녕 마음고생을 알아주고 노고를 위로하여 제왕으로서 대범한 면모를 보였다. 보통 아닌 영리한 처세였다. 


 “허면 무대에는 누가 서는 것인가.”


 “신첩의 외가 쪽으로 질녀쯤 되는 먼 인척 아이이옵니다.” 


 부군이 묻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답하면서도 소선경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앞선 무대에 섰던 무희들처럼 무심히 지나쳤을 터인데, 공연히 말을 내어 황태자가 채란을 눈여겨보게 되는 계기가 될까 저어 되었기 때문이다. 


 “정재는 기예의 정점에 이른 이들만 출 수 있는 무도, 재능이 출중한 영질을 두어 왕비께서는 참으로 대견하시겠소.” 


 “황태자 전하의 고아한 안목에 흡족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럴 리 있겠소.”


 적당히 예의에 벗어나지 않을 만큼의 관심을 표한 뒤에 황태자는 즉시 말을 돌렸다. 입장 상 화두가 채란에게 옮겨가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는 번왕비와 연향을 두루 배의한 대처였다. 


 “듣자 하니 금일부터 나흘간 저자에서 풍등제를 한다던데 연회가 파하면 현주와 더불어 야시장에 다녀와도 되겠소?”


 연치는 어리나 처세만큼은 수백 년 묵은 이무기보다도 능수능란했다. 대수협은 쓰게 웃었다. 영덕제가 아들이 하나뿐인데도 후사 근심 없이 느긋했던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승명은 좀 더 성장하여 훗날 보위에 오르면 조정과 황실은 물론이거니와 나라 안의 토호들까지 모두 손에 쥐고 흔들 만한 인물이었다.


 “황도를 제외하고는 상시가 있는 곳은 기주성뿐이라 내 일전부터 이곳의 시장을 꼭 보고 싶었다오.”


 저자의 등불축제를 누가 황태자에게 속닥거렸을지는 불문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향을 보니 고개를 돌리며 시침을 뗐다. 아까 둘이 희희낙락하였던 것이 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위아래로 두루 처세술이 뛰어난 승명에게 열다섯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수협이 의아하였던 점은 연향을 대하는 승명의 태도였다. 성의에 신의로 답하겠다고 하였으니 그가 연향에게 잘하리라는 것은 예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나, 승명의 태도에는 분명 눈에 보이기 위한 친절 그 이상의 정감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부부의 인연으로 엮일 사이에 서먹한 것보다는 백번 낫다고 본 대수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전하의 안위를 위하여 거리를 두고 호위를 붙여두라 이르겠습니다.” 


 “고맙소.”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무대가 정리되었다. 높다란 단 위에 전신이 너울에 가려진 차림새의 무희가 올라서고 그 앞으로 속이 어렴풋이 비치는 얇고 하얀 면사보가 수십여 장 겹쳐졌다. 마무리가 끝나자 주악이 울렸다. 익숙한 음률은 필시 헌천화무의 가락인데 무대 장치가 생소하여 도리어 승명의 구미를 돋우었다. 


 곡을 이끄는 대금의 가락에 맞추어 휘장 너머의 무희가 춤을 추기 시작하였는데도 연회장 곳곳에서 수군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피리 소리가 작아지면서 무희의 창이 흘러나오자 약속이나 한 듯이 좌중이 고요해졌다. 창을 내는 음성은 깨끗하고 단단했다. 기존의 꺼질 듯이 가냘프고 애처로운 미성에만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는 충격적일 만큼 청량한 발성이었다. 


 금에 이어 현과 고가 더하여져도 창이 악을 압도하는 무대는 모두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노래를 하는 와중에도 무희는 동작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그 춤사위는 한층 더 빠르고 격해지고 있었다. 협무도 군무도 없는 오로지 한 명에 의한, 그 하나를 위한 무대였으나 좌중의 모두가 홀린 듯이 장막 속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라진 선율에 따라 하나씩 걷힌 면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이 마치 구름을 연상케 하였다. 선녀가 흩날리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듯이 무희는 실로 아나한 몸짓으로 춤을 추며 단을 내려왔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속세의 것이 아닌 양 청초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울림으로 회장 가득 울려 퍼졌고, 꽃을 바치기 위하여 다가오는 몸짓은 바람결에 날리는 꽃잎을 떠오르게 하는 선연한 맛이 있으면서도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을 긋는 손짓과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마저 가락과 섬세하게 맞물려 그녀의 춤사위 자체가 그대로 음률을 옮겨놓은 양 싶었다. 


 주악이 고조되며 무희가 화병 대신 들고 있던 꾸러미 비슷한 비단뭉치를 높이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휘돌아나가는 그녀의 소맷자락 끝에서 뿌려진 기다란 비단 끈이 흡사 승천하는 용처럼 공중에서 확 풀어지면서 그 안에 있던 노란 꽃송이들이 회장 가득 흩날렸다. 꽃비가 난분분하며 회장 전체에 은은한 꽃향기를 풍겼다. 꽃무리가 자아내는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광경에 찬탄을 담은 침음성이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나풀나풀 떨어지는 수백 송이의 꽃 가운데서 한 송이를 아름다운 몸짓으로 받아낸 무희는 나는 듯 황태자에게 다가섰다. 황태자와 무희,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얽힌 한순간, 너울로 하관을 가린 여인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작 입매를 끌어올려 작게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겨울 호수처럼 차던 그녀의 인상이 숨이 멎을 만큼 고혹적으로 변했다. 그 변화는 지나치게 극적이라 흡사 처음부터 끝까지 의외의 연속이었던 그녀의 무대 이상으로 인상적인 느낌으로 승명에게 아로새겨졌다. 그러나 그조차도 찰나의 착각이었다 싶을 만큼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여인이 우아한 동작으로 꽃을 그에게 내밀었다. 


 “황태자 전하의 강복을 비는 기주성 백성들의 마음이옵니다.” 


 분칠을 한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을 뿐, 예를 표하는 여인의 낭랑한 음성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실로 아름다운 무대였고 놀라운 재주로구나. 잘 보았다.” 


 치하를 하며 받아 든 꽃은 치차로 염색한 한지로 만든 노란 복수초 조화였다. 겨우내 한파를 뚫고 새해 중 가장 빨리 피어나는 복수초는 행복을 기원하는 꽃으로 흔히 쓰였다. 계절이 지나 구할 수 없으니 손으로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든 듯하였다. 물씬 풍겨오는 향은 물론이거니와 모양새도 종이로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으리만큼 정교하여 절로 찬탄이 나오는 솜씨였다. 


 “향내가 가득하여 가화인지도 몰랐구나.” 


 “부끄럽습니다. 낭랑의 내당에 국화가 어여쁘게 피었기에 꽃을 만들기 전에 한지에 국화꽃 말린 가루로 훈향을 하였나이다.”


 “이것도 너의 재주인 것이냐?”


 “소녀는 보잘것없는 솜씨로 조금 도왔을 뿐인데 어찌 소녀만의 재주라 하겠나이까. 모다 내당 가득 아름다운 꽃을 가꾸어주신 낭랑의 정성 덕분이옵니다.” 


 소선경은 부군의 질문에 다소곳이 답하며 고개 숙이는 채란을 쏘는 듯 바라봤다. 그동안 두문불출하고 처소에 들어앉아 종이꽃 따위를 만들고 있었단 말인가. 한지에 향까지 입힐 정도로 정성을 기울여서 말이다. 무대의 축대가 무너진 사고가 채란의 탓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때마침 채란이 나타난 것 하며 하필 그녀가 헌천화무를 출 수 있었다는 점까지 그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딱 맞아떨어지는 일의 수순에 꺼림칙함이 짙어졌다. 


 “왕비에게 공을 돌리다니 겸허하기까지 하구나.”


 “소신도 내자에게 저처럼 기량이 뛰어난 질녀가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훌륭한 재주로 무대를 잘 마무리해 주어 내 참으로 고맙구나.”


 마지못해 찬사를 하면서도 소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채란은 기대를 뛰어넘는 재기로 공연을 성공시켰고 모두가 화색을 하며 그녀를 칭찬하는데도, 연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소씨의 가슴 안에서 점점 더 크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황공합니다. 이 모두가 미천한 소녀를 믿고 귀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살펴주신 낭랑의 은덕이오니 찬사라면 마땅히 낭랑께 돌아가야 할 줄 아옵니다.” 


 “재주도 뛰어나나 마음씀씀이가 더 아름답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도가 채란이라 하옵니다.”


 “진연의 대미를 훌륭히 장식해 준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니 물러가 기다리라.”


 수협은 채란을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창과 무과 한데 어우러진 무대는 도무지 눈길을 떼어낼 수 없으리만큼 훌륭하였다. 그가 나서서 박수를 치자 좌중의 모두가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참으로 감읍하오나 소녀, 이제 곧 신전에 귀의할 것이니 전하의 말씀만을 은혜로이 간직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채란은 차분히 예를 올린 뒤 모두의 시선을 한데 받으며 조용히 물러갔다.


이전 13화 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