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1부 황실의 꽃 12장 해후
다른 이들과 함께 내성 성문까지 나가서 황태자를 맞이하려 하였던 연향은, 연회 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할 것이니 나올 필요 없이 채비하고 있으라는 기별을 받고 면경 앞에 다시 주저앉았다.
유모 전씨가 연향의 귀와 목에 이런저런 장신구를 대어보며 황태자가 먼저 연향과 만나기를 청하였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작년 가을 황도에서 인사도 없이 그녀를 돌려보낸 것이 못내 마음이 쓰여 독대를 원하였다 하니 황태자 전하께서 참으로 여낙낙하시지 않냐며 들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부러 돌려보낸 것도 아니고 병으로 어쩔 수 없이 거절한 것을 황태자가 입때껏 마음에 두었다니, 연향은 그에게만 충실하지 못한 자신이 마음이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기분이 좋아지기를 바라며 꺼내어 본 소리에 연향의 얼굴이 한층 더 우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본 전씨가 패물함을 열어 바다 건너 대맥국에서 들여온 귀한 청옥 귀찌를 꺼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바다의 색을 닮은 청옥으로 장식된 귀찌는 연향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그녀의 귀에 끼워준 전씨는 아주 어여쁘니 한번 웃어보시라고 채근했다. 닦달에 못 이긴 연향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을 때 하인이 들어왔다.
그의 안내를 받아 황태자가 기다린다는 장소에 이르니 문밖에 눈에 익은 이가 서 있었다. 일전에 궁에서 몇 번 보았던 젊은 환관 왕오였다. 그가 먼저 연향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연향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황궁의 내관과 마주하자 그제야 황태자를 만나는 것이 실감이 났다. 연향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인사를 마쳤다. 때마침 내실의 문을 열고 대수협이 나왔다. 연향의 얼굴에 떠오른 긴장의 빛을 읽은 그는 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목소리를 낮춰 당부하였다.
“네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나 폐하를 뵙는 것처럼 태자 전하 앞에서도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왕의 당부가 연향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채 왕오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현주 자가 드십니다.”
길게 끄는 목소리로 왕오가 문 너머에 있을 황태자에게 그녀의 내방을 전하였다. 연향은 문가에 선 시위가 열어준 문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이제 곧 황실에 속할 몸, 처신에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연향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매무새를 다듬고는 안쪽을 바라보았다. 비단 휘장이 걷히고 안에서 키가 훤칠한 사내가 걸어 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연향은 숨이 멎을 듯이 놀랐다. 다시 조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못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리라고는 더더군다나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아무개, 작년 가을 팔각정에서 만나 영수전에서 헤어진 이후로 한시도 그녀의 마음에서 떠난 적 없었던 그이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작년보다 키도 더 크고 하관도 날렵해져서 사내다운 기운이 더하여졌으나, 눈앞에 있는 사내는 분명히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아무개였다.
“어찌······.”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연향은 자신이 황태자와 독대를 위하여 이 자리에 섰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왈칵 가슴속에서 뜨겁게 치미는 감정에 연향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뿌옇게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그리운 그이가 영수전의 나룻배 위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이군.”
“어찌하여 거기서 나오십니까. 대체 어떻게 아무개가 이곳에······. 혹 태자 전하의 근위가 되신 겁니까?”
필사적으로 울음기를 누른 연향의 음성이 공기 중에서 애처롭게 떨렸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전개에 연향은 떠올릴 수 있는 가정을 앞뒤 가리지 아니한 채 그냥 입에 올렸다. 아무개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오면······.”
“작년 가을 팔각정에서의 약조를 기억하는 것은 혹여 나뿐인 건가?”
그 한 마디에 연향의 기다란 눈썹 끝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던 이슬 하나가 툭 떨어졌다. 작년 가을 팔각정에서 그는 차후 다시 인연이 닿아 그녀가 이름을 물으면 진명을 일러주기로 약속하였었다. 연향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아니한 채 천천히 운을 떼었다.
“현주 연향이 감히 여쭙겠습니다.”
처음엔 뜻하지 아니한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는 사실에 얽매여 미처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번왕의 딸인 자신이 말을 높이는데도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는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입궁하면 두 번 다시 사사로이 만나지 못하리라 여겨 무던히도 그녀를 아프게 하였던 아무개가 바로 황태자인 승명이라니, 하늘 아래 어찌 이러한 연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연향은 첫정 앞에서 꼴사나운 울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하여 치맛단을 손가락이 아플 만큼 단단히 움켜쥔 채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었다.
“진명이 어찌 되십니까.”
금방이라도 엉엉 울어버릴 듯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승명은 자신의 죄가 실로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저 당혹스러운 우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팔각정에서의 만남이 연향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에게도 나름 소중한 추억이 되긴 하였으나, 꼬박 네 계절이 돌아 다시 마주한 자리에서 그녀가 보인 동요를 통해서 승명은 그들이 함께하였던 사흘이 얼마나 커다란 크기로 그녀 안에 자리매김했는지 다시금 절감할 수 있었다.
서한을 통하여 아무개의 인연을 정리하고자 하였던 만큼 승명은 자신에게 그러하였듯 연향에게도 작년 가을의 짧디 짧았던 그들의 인연은 그저 어여쁜 추억 정도의 무게일 거라 짐작하였다. 그러하였기에 저를 보고 놀라는 그녀를 두 눈에 담으면서도 승명은 이름조차 알려주지 아니하였던 자신에게 연향처럼 귀한 집안의 규수가 진심이 되었으리라고는 전연 예상치 못하였다. 그가 보아온 지체 높은 여인들은 저보다 못한 자는 눈여겨보는 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분으로 사람의 가치를 나누고 몸에 익힌 품위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뼛속 깊은 경멸을 우아하게 숨긴다. 돌아보는 눈빛 하나 무심히 던지는 언사 하나가 모두 계산이며 의도인 것이 그간 승명이 겪어온 황궁이며 소위 고귀한 이들의 생리였기에, 그 역시 진정이란 한 톨도 없는 정략혼을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연향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한량 따위를 그리워하여 황태자와의 접견을 위하여 이 자리에 선 것조차 잊을 만치 그에게 흔들리고 그로 인하여 아파하였노라고,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젖은 눈동자로, 온몸을 다하여 외치고 있었다. 팔각정과 영수전의 아무개와 황태자 승명은 같은 사람이었으나 연향이 보고 마음을 준 건 황태자가 아닌 금과 비파를 타는 사내였다.
국혼을 앞두고 고작 몇 번 만났을 뿐인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연향이 그간 얼마나 애면글면하였을 것인가. 세상에 무엇 하나 두려운 것 없이 당찬 연향이지만, 현주 대연향 속에 깃들어있는 다정하고 천진난만하며 여리디 여린 소녀도 보았기에, 그녀가 겪었을 괴로움을 가량하고 신분에 맞게 능숙하지 못한 처세를 가엾이 여기면서도, 조금 더 일찍 그 어린 연모를 보듬어주지 못한 저의 무심함이 승명은 새삼 미안쩍었다.
“증조부는 순인효성황제이신 원종 폐하 조열, 증조모는 숙정휘선황후 한씨 정화, 조부는 정명원효황제이신 진종 폐하 조숭, 조모는 추존 태정유순황후 안씨 수란, 부는 예 황실 32대 황제이신 영덕제 폐하 조순, 모는 황후 마마이신 윤씨 명혜, 나는, 성은 조, 휘는 효, 봉호는 승명, 이 나라의 황태자이다.”
태예국 황실 법도에 따라 승명이 4대에 걸친 가계를 읊는 동안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리던 연향은 그가 말을 마치자 치맛단을 잡아 나부죽이 절을 올렸다.
“호번왕의 딸 대가 연향, 황태자 전하를 뵙나이다. 부디 소녀가 그간 전하께 범한 무도함을 벌하여 주소서.”
수그린 고개 아래로 눈물이 끊임없이 방울졌다. 작정하고 속인 것을 그대가 어찌 알았을 것이며, 모르고 한 일을 어떻게 탓하겠느냐고 되묻는 대신에 승명은 조용히 그녀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그는 그저 바닥을 짚은 그녀의 손 위로 가만히 제 손을 겹쳤다. 살갗에 닿아오는 온기에 놀란 듯 연향이 고개를 들었다.
“전하······.”
승명은 연향이 영빈각 현판에 쓴 글씨를 보았기에 답신을 쓰면 자신의 서체를 쉬이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설령 서체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림과 글 밑에 찍힌 낙관이 실마리가 되어 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끝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통해서 승명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아니라 한다면 연향은 세상 전부가 그렇다 하여도 터럭만큼도 저를 의심치 아니하였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연향은 다만 아무개를, 소일 없이 놀고 지내는 한량이며 태자의 벗이라던 그의 말을 온전히 믿고, 일말의 의구심조차 품지 아니하는 진심으로 그를 대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올곧은 진정에 비한다면, 단 한 번도 제대로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밝힌 적 없으면서도 그녀가 알아서 알아주길 바라였던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이기적이며 오만하였는가. 승명은 연향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용서하라. 내 사려가 모자라 오랜 시간 그대를 아프게 하였다.”
승명은 차마 떨어지지 아니한 입술을 열어 난생처음으로 마음이 담긴 사과를 하였다. 연향의 눈물 앞에서는 그녀에게 화첩을 선물하였던 그 날에 직접 만나 저간의 사정에 대하여 직접 석변하고자 하였다는 말도, 그녀가 병을 구실 삼아 황급히 기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면 적당한 때를 보아 몸소 찾아갈 요량이었다는 말도 모두 구차한 변명 같았다.
나쁜 의도로 속인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뜻하지 아니한 거짓말이 길어졌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저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였다 하여 그녀와 보낸 시간 모두가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 승명은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이 그 역시 좋았노라고, 그녀를 그리느라 밤을 지새우면서도 무던히 행복했노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연향에게 고백을 받은 직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실을 밝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아니하였고, 그런 식으로 저를 향한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치부하고 싶지도 않았노라 밝히고 싶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제 마음 안에 날아든 작은 새 같던 연향이 또 얼마나 자랐을까 궁금하였고, 순행 내내 이 꽃은 연향에게 어울리겠다, 이 나무라면 연향이 오르기에 좋겠다, 이 길은 연향과 같이 거닐고 싶다, 이 호수는 연향에게 보여주고 싶다 여기며 그녀를 길러낸 기주에 닿을 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저에 대해 알려주고 싶기도 하였다. 연향에게 하고픈 말은 많았으나 언젠가의 그녀가 그러하였듯이 승명은 다만 모두가 저의 죄라고만 하였다.
잘못하였노라고, 모다 저의 죄이니 저를 탓하라 달래어주는 말에 연향의 까만 눈동자가 다시금 일렁였다. 눈꺼풀 안쪽에서 차오르는 물길을 참으려는 듯 연향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승명은 그녀의 입술로 손을 가져갔다. 손길이 닿자 입술은 벌어졌지만 대신 눈물이 연향의 여린 뺨에 번졌다. 승명의 얼굴에도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당차게만 보았지 나의 비가 이토록 눈물이 허다하지 미처 몰랐다. 내 앞으로는 이리 짓궂게 놀리지 않겠다. 약조하마.”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에 놀란 듯 연향이 두 눈을 깜박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닥일 때마다 방울져 후드득 떨어지는 이슬이 애처로운 듯 승명은 입술을 연향의 눈가로 내렸다.
그는 여태까지 마음이 아닌 필요만으로도 얼마든지 상냥해질 수 있었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 앞에서 자상한 태를 내는 건 과히 어렵지 아니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교만했던 과거의 자신의 비웃듯 눈앞에서 울고 있는 작은 소녀 앞에서는 한 마디조차 어렵고 작은 행동 하나조차 조심스러웠다. 연향이 흘린 눈물이 승명은 자신의 입술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렇게 한참이나 눈물을 말려준 승명은 자세를 낮춰 연향과 시선을 마주하였다.
“내게 있어도 여인은 그대뿐인지라 그리 섧게 울면 어이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로 인한 그 눈물을 다 닦아주고 어여쁘게 웃게만 해주고 싶은데 내가 이리 서투르니 그대가 못난 내게 방도를 다오.”
“하오면 이대로 잠시만 제 곁에 있어 주소서.”
되었다며 밀어낼 줄 알았던 연향이 속삭이듯 말하며 승명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살포시 기대어오는 그녀의 몸짓에 난처한 듯 몸을 굳혔던 승명은 이내 두 팔로 연향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포근하게 저를 감싸는 온기에 연향은 마음속에 가둬왔던 마음을 표현하듯 작은 손을 내밀어 승명의 옷깃을 가만히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