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1부 황실의 꽃 10장 번왕 대수협
영덕 15년 입추를 사흘 지나서 황태자 일행이 기주성에 닿았다. 대리청정으로 이루어진 순행이니 황제의 거둥과 마찬가지로 응당 노부의장(노부의 로鹵는 방패, 부簿는 행렬의 차례를 장부에 적는다는 옛 일에서 온 말로, 임금의 거둥 때의 의장儀仗, 또는 의장을 갖춘 거둥을 의미한다. 의장이란 천자나 왕공 등 지위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에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병장기나 물건으로 의儀는 위의威儀를, 장仗은 창이나 칼 같은 병기를 가리킨다.)을 갖추었으리라는 대수협의 예상과 달리 열린 성문 너머로 보이는 황태자 일행은 뜻밖에도 매우 단출했다.
황태자의 안위를 지키는 호위대와 시중을 드는 내관 몇 외에는 실무를 맡은 조당의 관료들이 원행행렬의 전부였다. 하물며 황태자 자신도 가여(가여駕輿는 황태자나 왕세자가 타는 가마를 일컫는다.)가 아닌 말을 타고 있었다.
환 중에 계신 황제의 명으로 조정을 떠맡게 되었다 하여도 이제 갓 관례를 치른 황태자가 국정대리 흉내를 내어봐야 얼마나 할 수 있겠냐며 몇 보 물러나 적당히 구경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대수협은 처음부터 보기 좋게 저의 예상을 벗어난 황태자의 모습을 보고 미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각 성에 보내두었던 세작을 통하여 황태자의 원행 내내 그의 행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고받아온 대수협이다. 수하들이 입을 다투어 황태자가 각 성의 민생을 제법 열심히 살피고 있노라 전하였어도, 순행은 구실일 뿐 어린 황태자가 유람밖에 더 하겠나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대수협뿐만 아니라 황태자에 대한 귀족들의 평은 전반적으로 후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황태자를 싸고도는 황제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실제로 그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 조정 신료 중에도 승명을 대면한 이가 손으로 꼽힐 정도였고, 이는 황통을 이을 유일한 황자가 오죽 못났으면 황태자로 봉한 뒤에도 저리 품 안에 넣어 기르겠느냐는 숙덕공론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승명을 제대로 겪어본 적 없으니 그의 됨됨이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라고는 황궁 내에 도는 풍설 밖에 없었다. 승명에 대하여 들려오는 소문 중에 나쁜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재목이라 할 만큼 탐탁한 것도 없었기에, 수협은 고명딸인 연향이 황태자와 혼담이 오가도 크게 기쁘지 아니하였다.
고귀한 자리에서 태어나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관대하다 하니 순덕한 성정은 황후를 빼쏜 듯하였고, 소일 삼아 즐기는 일이 홀로 앉아 종일 금을 타거나 난을 치는 것이라 하니 번잡함을 기피하는 기질은 조부인 진종에게서, 예와 악에 대한 재능은 조모인 추존 황후인 안씨에게서 물려받은 듯하였다. 어릴 적부터 금에 재능을 보이고 서체가 훌륭하며 그림 솜씨 또한 뛰어나다 하니 차라리 제위와 무관한 서열의 황자나 유복한 가문의 둘째쯤으로 태어났다면 더할 나위 없는 풍류남아가 되었으련만, 날 곳을 잘못 고르지 않았는가 싶어 내심으로는 승명을 딱히 여기기도 하였다.
대수협은 매서운 눈길로 황태자를 따르는 조정 신료들의 면면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황태자가 대동한 관료들은 하나같이 내각(내각은 황제 직속의 자문기관이자 비서기관으로 어지를 받아 기타 통치기관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내각의 수장은 정 3품으로 대학사이다.)과 육부(육부는 태예국 최고의 행정실무기관으로 휘하에 이,호,병,예,형,공부가 있으며, 각 부의 수장은 정 2품 상서이다.), 국군총관부(국군총관부는 태예국 최고의 군정기관으로 휘하에 중, 전, 후, 좌, 우 다섯 개의 부가 있어 2-3개의 성을 관할하였다. 수장인 군국총관은 정1품, 휘하 5개 부의 사령관인 좌우중전후도독는 종1품 관직이다. )의 종 6품 이하의 실무진이었다.
황태자가 국정에 관심이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바도 없었기 때문에 수협으로서는 그 점이 의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실무도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어야 도움이 될 터,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저들이 무엇을 간한다 하여 황태자가 알아들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다못해 대리청정을 하는 소조(소조小朝는 섭정태자를 지칭하는 명칭이다.)로서 위엄을 보이고자 하였다 하더라도 저리 품계가 낮은 자들보다는 한림원(한림원은 황제의 칙령을 다듬거나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사료편찬 및 국가기밀을 담당하는 중앙기구로 태예국 최고의 수재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출세의 지름길이다. 수장은 정 5품 학사이다.)이나 국자감(국자감은 태예국의 교육을 총괄하는 기관, 수장은 종 4품 제주이다.)의 5품 이상의 관료를 대동하는 편이 백번 나았을 것이다.
섭정태자로서 넘치는 의욕조차 숨기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한 어린애인 것인가, 아니면 유약해 보이는 면면으로 그간 수많은 이들을 눈속임해 온 애늙은이인 것인가. 대수협은 황태자에 대한 판단을 조금 더 미루기로 하였다.
이내 속을 읽을 수 없는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온 대수협이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따라 맑은 고동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지고,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해 외성문 좌우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의기를 들어 올렸다. 예 황실을 상징하는 거대한 금빛 봉황이 수놓아진 수백여 개의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이는 가운데 황태자 일행이 성안으로 들어섰다. 대수협도 단 위에서 내려와 황태자를 향해 걸어갔다.
“기주성의 번왕 대수협, 황태자 전하를 뵙나이다.”
수협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자 승명 또한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다. 황제로부터 왕작을 제수받은 번왕에 대한 예우였다.
“호번왕의 환대에 감사하오.”
“내성으로 드시지요. 노독을 푸실 연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황태자 승명이 부드럽게 웃었다. 어리고 고운 얼굴에 낯빛 역시 온화했지만, 고작 삼십 대 초반의 연치로 제국에 세 명밖에 없는 번왕의 자리에 오른 수협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는 기백이었다. 수협은 어리게만 보았던 황태자에게서 제법 맹랑한 기운을 느끼고 한쪽 눈썹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참으로 고맙소. 그러나 연회 준비라니 그것 참 곤란하게 되었군.”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승명이 운을 뗀 순간 수협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황태자는 천진난만한 면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능구렁이였다. 승명의 뒷말이 어느 정도 예상되었으나 수협은 짐짓 모르는 척 반문했다.
“무엇이 곤란하다 하시나이까?”
“내 파발을 보내어 미리 알렸던 때보다 무려 서너 식경이나 일찍 기주성에 닿아버렸으니, 내성 안이 나로 인하여 번다하여지지 않았겠소? 이대로 곧장 내성으로 들어가 연회를 준비하는 시하인들의 수고를 더하기는 내가 몹시도 미안하니, 길을 조금 돌아 민가를 살피다 가는 건 어떠하겠소? 하면 때가 얼추 맞을 것 같소만.”
과연 영덕제의 후계다웠다. 어질지만 결코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법이 없는 황제처럼 승명 역시 본인의 뜻을 부드럽게 관철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저를 위해 준비한 연회를 마다하고 민생부터 살피겠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을 대접하고자 한 성주의 성의를 무시하는 결례가 된다. 그러나 예정보다 빠른 도착을 구실 삼아 상대를 배려하는 척 말을 돌리면 상대로서도 거절할 명분을 잃게 된다. 본인이 미안하여 그러하다 하지만, 그 또한 기실 자신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었다.
이쯤 되면 도착시간을 잘못 알린 것마저 황태자가 부러 행한 교활한 술수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수협은 저를 상대로 정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황태자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장기도 상대가 너무 하수여서는 재미가 없게 마련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어여쁜 딸을 하늘 아래 둘도 없을 얼간이에게 보내며 기분 좋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권력을 탐하는 신료로서는 황제가 손안에 넣고 주무를 수 있을 만큼 어리석기를 소망하겠으나, 수협은 쉬운 상대에게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뜻을 어찌 거역하겠나이까. 외성에서 가까운 현 두어 개를 둘러보시고 가시지요. 마침 내성에 첨사(첨사僉司는 성내의 행정구역을 감찰하는 도찰원 소속의 종 5품 관리이다.) 양모환이 머물고 있으니, 전하께서 기주성에 계시는 동안 안내역으로 붙여드리겠습니다. 그자가 기주 내정과 지리에 밝으니 전하의 쓰임에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첨사는 중앙에서 각 지역 성내 행정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한 직책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우 토호인 번왕의 직속 수하를 붙이기 마련인데 도리어 중앙 관리를 보내주겠다 하는 수협의 제안은 승명에게도 뜻밖일 터였다. 수협이 사람을 붙여 승명의 행보에 대하여 듣고 있었던 것처럼 이 능청맞은 태자라면 저에 대해 미리 알아보았을 것이다. 들어 알고 있는 부분이 클수록 중앙관료를 붙여준 의도가 태자에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필시 그것이 성내 행정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인지, 중 관료에 대한 지배력의 과시인지 가늠하고 싶어 할 법한데도 승명의 말간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의구심을 드러내어 표하는 대신에 그는 스스럼없이 수협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번왕의 세심한 배려에 깊이 탄복하였소. 번왕의 호의에 기대어 내 다소 무리한 청을 하나 더 하여도 괜찮겠소?”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기주성에 체류하시는 동안 황태자 전하의 평안을 위하여 이 대수협, 어떠한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소. 정혼 전에 상례가 아닌 줄 알지만, 내성으로 돌아가면 연회 전에 현주와 둘이서 따로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주실 수 있겠소? 작년 가을 성도에서 나를 찾아준 현주에게 건강 문제로 본의 아닌 결례를 범한 적이 있소. 내 이후로도 그것이 몹시도 마음이 쓰여 왔던 지라 이리 부탁하오.”
승명은 저에 대한 의심을 숨기는 데 능숙한 것이 아니었다. 아예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수협이 자신을 시험하려 하든 말든 승명에게 하등 중요치 않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로서는 적당한 때에 대수협에게 자신과의 대례를 앞둔 연향의 존재를 일깨우기만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간택령 없는 대례가 누구의 의견도 아닌 승명 본인의 의지였음이 이로써 분명해졌다. 다른 후궁을 들이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준 대신에 그는 이 정략혼으로 기주성과 대씨 문중을 온전한 한편으로 품고자 하는 것이리라. 소중한 딸을 내게 보내어 놓고 네가 어찌 다른 마음을 품겠느냐, 저 순진한 얼굴로 태자가 자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이 싸움은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음을 수협은 뒤늦게 깨달았다. 다섯이나 되는 자식 가운데 하필 가장 사랑하는 딸을 황태자비 후보로 황도로 보낸 것이 그의 첫 번째 패착이요, 황태자의 그릇을 제대로 알아보지 아니한 것이 그의 두 번째 패착이었다.
“번왕의 후의에는 내 반드시 신의로 답할 것이오.”
반면 대면조차 하지 않고서도 승명은 대연향이 수협에게 있어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수협의 후의에 신의로 답하겠다는 황태자의 뜻은 명료했다. 연향을 통하여 후사를 보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승명이 수협에게 청하는 바는 단지 차기 황제의 장인이자 그다음 황제의 조부라는 황실 종친으로서의 미래만은 아니었다. 현황제인 영덕제가 폐지한 이래 줄곧 비어있는 대승상의 위, 연향과 기주를 얻는 대신 승명이 보이겠다고 한 성의는 바로 그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번국의 왕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는 대수협의 야심을 이용하여 승명은 그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조정신료의 수반이 되어 태예국의 내일을 저와 함께 하자고 청하다니, 나이답지 않은 영악한 헤아림에 수협은 경련하듯 웃었다.
“그리 하지요.”
원하는 바를 다 얻은 승명은 어린아이같이 해맑은 얼굴로 그를 채근하였다.
“그럼 이제 출발합시다. 기주성의 풍요로움에 대하여 익히 들어온 터라 성안 모습이 몹시도 궁금하오.”
재촉하는 말에 못 이겨 몸을 돌리면서도 수협은 저리 순진무구한 생김을 하고서 사람의 약한 곳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웃는 낯으로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잔혹한 성정마저 두루 갖춘 승명의 본질에 소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