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11
본 1부 황실의 꽃 11장 번왕비 소선경의 고뇌
본 1부 황실의 꽃
제11장 번왕비 소선경의 고뇌
번왕비 소선경이 황태자를 모시고 외성 주위의 몇 개의 현을 돌고 오느라 도착이 다소 지체되리라는 부군의 전갈을 받은 것은 연회에 쓰일 요리를 점검하기 위하여 숙설간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재료 손질을 시키면서 소씨가 숙수들과 숙설간 하인들에게 당부한 것은 하나였다. 잔치에 쓰일 음식은 최고급 재료로 정성을 기울여 조리하되 모양새가 지나치게 호사로우면 아니 된다는 점이었다.
황후 윤씨는 후덕한 성정이었으나 내외명부 부인들의 사치를 몹시 불편하게 여겼다. 단아하고 소박한 기품을 중히 여기는 황후의 가르침 아래 성장한 황태자도 과한 음식은 치미라 하여 꺼릴 공산이 컸다.
소선경의 당부에 따라 숙수들이 택한 요리는 총소해삼과 팔선과해였다. 전자는 신선한 해삼을 푹 찐 다음 구운 대파를 곁들여 대파의 알싸한 향이 해삼에 은은하게 배게 만든 요리였으며, 후자는 닭가슴살, 상어지느러미, 해삼, 전복, 방어, 새우, 상어부레풀, 멸대 등 장수를 기원하는 여덟 개의 귀한 재료를 제각각 찌거나 데쳐서 동전 모양으로 쌓아 올린 요리였다. 주요리에 해산물이 많은 까닭은 기주성이 바다와 접해 있기 때문이고, 재료가 다채로운 것은 성내 상업이 번성하였음을 드러내는 방증이었다. 그중에서도 해삼은 고대로부터 바다에서 나는 산삼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귀한 식재료였으니, 조리과정이 비교적 간단하다고 하나 귀인을 대접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아주 좋군.”
소선경은 해삼의 어두운 빛 위에서 반짝이는 대파의 하얀 뿌리 부분의 색감과 요리에서 풍기는 향까지 두루 살피고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길이 오리 튀김으로 향했다. 숙수 하나가 결대로 잘게 찢어 다진 육전을 깨에 묻혀 튀기고 있었다. 생소한 조리 방식에 소씨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숙수가 연유를 고하였다.
“오리는 냄새가 강한 재료인지라 혹여 황태자 전하께서 그를 저어하실까 싶어 냄새를 잡는 참깨로 둘러 튀기는 것입니다.”
“사려 깊은 조리법이로구나. 전하께서도 그대의 정성에 감복하실 것이다. 나 또한 이를 깊이 새겨 둘 테니 마저 수고하라.”
전채에서부터 주된 요리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점검한 뒤에 이어 후식으로 내올 다과를 살펴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연회장에 무대를 설치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일이 생기면 알리라고 보내두었던 시녀가 황망한 얼굴을 한 채 다가와 작은 사고가 있었다고 고했다. 가설해 둔 무대 위에서 무희들이 동선을 맞추던 와중에 축대의 일부가 무너져 몇 명이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일을 어찌 처리하기에 이 사달이 난단 말이오.”
황급히 연회장으로 가보니 현장의 상황은 전해 들었던 바보다 심각했다. 소씨의 질책에 진연의 무대를 총괄하고 있던 예부도사(예부도사는 의전을 맡은 정 7품 지방관이다.) 곽두영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송구합니다. 모두가 소신의 불찰입니다.”
무너진 축대야 다시 세우면 그만이었으나 주연의 꽃이 될 무희가 네 명이나 다친 것이 문제였다. 네 명이나 빠지면 군무를 추어도 볼품이 없을 것이나, 그렇다 하여 수를 맞추고자 황태자를 초대한 자리에 격이 떨어지게 교방무희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사고로 발을 심하게 접질린 무희는 마무리를 장식할 헌천화무에서 독무를 맡은 이였다. 곽두영이 사색이 될 만도 하였다.
황태자의 순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주성에서는 환영 연회를 위한 진연도감을 꾸리고 예부도사 곽두영을 그 수장에 보하였다. 곽두영은 예악에 능하다는 이들을 선별하여 올리라는 명을 성 내의 모든 부와 현에 내렸고, 현 단위에서 명단이 올라오자 엄중한 시험을 거쳐 신분과 외모, 실력 모두 흡족한 이들만 재차 추렸다. 곽두영의 지휘 아래 선발된 이들이 연습에 들어간 지 벌써 두 달여, 이제 와 대역을 찾아 수소문하기에는 시간도 촉박했지만, 설령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형편상 정재(정재는 황실 연회에서 베풀어진 궁중 무용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의 주요 역할을 갑자기 대체하기는 여의치 않았을 터였다.
“저 아이 말고 선모(선녀가 하늘의 꽃을 제왕에게 바친다는 내용의 궁중무용인 헌천화무에서 선녀 역할을 맡은 독무가)를 맡을 수 있을 만한 인재가 있겠소?”
“송구합니다. 헌천화무의 선모는 창도 능해야 하는지라 지금으로서는 달리 마땅한 자가 없사옵니다.”
“가자(정재에서 주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를 따로 두고 무희를 대역으로 세운다 하여도 춤과 노래를 미리 맞춰본 것이 아니니 공연이 쉽지 않겠군.”
소씨는 난감함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황태자가 의도하지 않아도 이번 진연이 다른 성의 연회와 비교가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는 기주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다. 안타깝지만 곽두영의 의견대로 헌천화무를 생략하고 진연의 구성을 바꿀 수밖에 없을 듯하였다. 다친 무희를 무리해서 무대에 세울 수 없으니 그리 하라 이르려하였을 찰나였다. 그녀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낭랑(번왕의 비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헌천화무라면 소녀가 출 수 있습니다.”
소선경이 모친인 해주성의 대부인 협영옥의 부탁으로 후견 중인 도채란이었다. 채란은 기실 협씨의 재당숙모의 이복자매의 증손녀로 소선경과는 차마 인척이라 이를 수도 없을 만큼 먼 사이였다.
그러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어린 동생과 거리에 나앉게 될 판이 된 채란의 처지를 가엾이 여긴 협씨가 그들 남매를 거두었다. 협씨는 늘그막에 큰 위안이 되어준 채란을 상당히 귀애하였다. 친딸인 소선경에게 보낸 서찰에도 채란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고, 그녀가 열다섯이 되자 서한의 대부분이 채란의 혼사를 염려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러더니 급기야 올봄 협씨는 채란에 대한 애정 어린 당부의 글과 함께 그녀를 기주성으로 보내온 것이다. 아무래도 황도와 가깝고 번화한 기주에 머무는 편이 서북에 치우친 해주에 있는 것보다 좋은 혼처를 찾기 쉬우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채란의 도착이 국혼에 관한 황태자의 성명과 맞물렸기에 그녀까지 챙길만한 경황이 없었지만, 모친의 부탁이었던지라 소씨는 어쩔 수 없이 채란을 내당으로 불렀다.
소선경과 마주한 자리에서 채란은 혼인은 마음에도 둔 바 없노라고 단언하였다. 본인의 바람은 해주의 장원에서 대부인을 섬기며 은혜를 갚는 것이었으나 차마 자신을 근심하는 어르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이리 왔으니 허드렛일이라도 하면서 어르신께 못 다한 보은을 마저 하겠노라 덧붙였다.
기주에 갓 닿은 채란이 연향의 국혼 준비로 다망한 성내 상황을 알 리가 만무했으나 시의적절한 채란의 말은 기특하였으며, 다소곳이 답을 기다리는 아이 역시 참으로 어여뻤지만, 어쩐 일인지 소씨는 그녀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뜻은 가상하나 지체가 다르거늘 어찌 시비 대하듯 잡역을 시키겠냐며 소씨는 웃는 낯으로 채란의 성의를 거절한 뒤에 이따금 다과나 함께 하자며 내당 한편에 그녀의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겉으로 별반 내색한 바 없는 데도 저를 저어하는 마음을 읽은 듯 채란은 소씨가 정해준 거처에서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다. 그저 그뿐이었다면 소씨도 채란에 대해 깊이 담아두지 않고 연향의 국혼 준비가 마무리되는 대로 모친의 바람대로 그녀에게 적당한 혼처를 물색해 주었을 것이다.
사달은 바다 건너 대맥국에 다녀오느라 한동안 성안에 없었던 아들 대성운이 도착하면서 생겨났다. 성운이 문안을 겸하여 내당에 들렀다가 마침 화원을 가꾸고 있던 채란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채란은 열일곱 꽃다운 나이였고 아들 역시 한창 여인에게 흥미가 왕성할 때였다. 채란을 보는 아들의 눈에 욕망이 깃든 것을 알면서도 소선경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성운은 작년에 관례를 올리면서 이미 건북성 군주의 딸을 정실로 맞이한 상태였다. 젊은 남녀가 정분이 나서 일이 심각해져 봐야 차후에 순덕한 며느리를 잘 구슬려 채란을 성운의 측실로 맞이하면 그만이겠거니 여긴 까닭이었다.
성운이 문안을 핑계로 하루에도 수십 번 내당을 드나들 정도로 열을 올리는 데도 도무지 곁을 내주지 않는 채란이 내심 괘씸하면서도 집안은 기우나 행신이 바르니 차후에 대씨 문중에 들여도 수치는 아니리라 여겨 내버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채란은 성운이 보내온 선물을 모두 정중히 거절하고 두문불출하면서까지 끝끝내 거리를 두었으나, 아들이 말썽이었다. 어느 날 며느리인 하씨가 성운이 이혼을 요구했다며 눈물 바람으로 소씨를 찾아왔다. 심성이 여린 하씨는 내당에 채란을 머물게 한 시어미를 원망도 못 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았다. 귀족의 혼사는 가문의 대업인데 이토록 사소한 일로 깨어질 리 있겠냐며 며느리를 달래어 보낸 뒤 소씨는 아들과 채란을 한 자리에 불렀다.
성운에게는 며느리에게 이혼을 요구한 진의를 묻고, 채란에게는 성운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여지를 주었는지를 하문하였다. 채란이 전연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 혼자가 되어 정식으로 혼인을 청하면 받아줄까 하여 그리하였다는 아들의 한심한 대답에 소씨는 내심 개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부군인 번왕이 아들인 성운이 아닌 딸인 연향을 편애하는 이유가 자명하게 보이는 답이었다.
채란은 자신의 처신이 모자라 성운에게 어떠한 여지를 느끼게 하였다면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칼을 거꾸로 베어 물고 죽으리라 답하였다. 그리고 성운이 혼자이든 아니든 혼례 생각은 추호도 없노라 재차 못을 박았다. 침착하여 외려 더 서릿발 같은 냉갈령이었다. 소선경의 마음이 돌심보가 된 것은 자결 운운하는 채란의 눈동자에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채란은 겉으로 보이는 대로 그저 예쁘장하기만 한 처자가 아니었다. 우연한 마주침만으로도 꺾고 싶어질 만큼 요요하나 온몸 가득 독을 품고 있는 석산 같은 계집이었다. 며느리 하씨도, 아들인 성운도, 어쩌면 자신조차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소씨의 전신을 장악해 왔다.
처음부터 채란이 탐탁하지 아니하였던 데에는 다 연유가 있었다. 채란을 먼저 돌려보낸 소씨는 계집 하나 때문에 이혼 소동을 벌인 일이 네 부친의 귀에 들어가면 너는 그날로 파문이라며 아들을 단단히 혼낸 뒤에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권했다. 다음 날 성운을 이국으로 떠나보내면서 소씨는 소개장을 써주는 한이 있더라도 채란 역시 멀리 보내리라 다짐하였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이제 곧 도착할 황태자가 마음에 걸린 까닭이었다. 여지를 주지 않아도 기어이 사내를 홀리고 마는 채란을 연향과 같은 성안에 두다니, 어불성설이었다. 소씨에게는 번국의 왕비로서 성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재차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할 책무가 있었다.
“네가 어찌 정재를 출 수 있다는 말이냐?”
되묻는 음성이 선뜩하리만큼 차가웠다. 행실이 음전하고 조심성이 많아 부군의 측실에게조차 불편한 기색을 해본 적 없는 소선경답지 않은 냉랭한 태도에 주위에서 더 놀란 듯 보였다. 정작 채란만이 차분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해주의 대부인께서 예를 익힌다는 기분으로 배우라 하셔서 춤과 창을 조금 익혔습니다.”
소선경은 모친을 원망하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여도 어둠 속의 반딧불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계집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쳐서 어찌할 요량인가, 소씨는 마뜩잖게 눈살을 찌푸렸다. 곽두영이 번왕비의 불편한 심사를 헤아리듯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시녀는 아닌 듯한데 저 소저는 누구입니까.”
“내 외가 쪽 인척이오. 이 분은 예부도사시다. 가까이 와 예를 올려라.”
소씨는 결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짧게 말을 줄였다. 인사를 허락받은 곽두영이 먼저 가볍게 읍을 하면서 저를 소개하자, 채란 역시 나부죽이 절을 하였다.
“소녀가 도사께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회령성 주순현 자사를 지내었던 도숭겸의 딸, 채란이라 합니다.”
“예를 표하는 자태가 곱고 걸음이 학처럼 우아한 것으로 보아 도씨 소저의 춤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보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곽두영의 말처럼 채란의 자태는 단아하기 그지없었다. 수많은 황실 무용 가운데서도 선이 유려하고 동작이 우아하기로는 으뜸으로 치는 헌천화무를 익힌 까닭인 듯하였다.
“그간 하릴없이 성안에 머물면서 낭랑께 심려만 끼쳐왔으니, 소녀가 무대에 올라 그간의 죄 갚음을 할 수 있도록 허해 주십시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도씨 소저께서 소임을 맡아주시면 소신도 크게 안심이 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물러가지 못하겠느냐고 일갈하여 물리치고 싶었으나, 곽두영마저 거드는 마당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번국의 위신이 먼저였다. 소선경은 마음을 다스렸다.
“황태자 전하를 위한 진연이다. 그 연회의 가장 중요한 춤이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황태자 전하와 번왕 전하께서 계신 자리를 어찌 허술히 하겠습니까. 불민한 소녀, 비록 많이 부족하겠으나 온 정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채란은 말을 잠시 멈추고 품에서 곱게 물들인 한지로 봉한 서찰을 꺼내어 소선경에게 내밀었다.
“무대를 보신 뒤에 만일 낭랑께서 소녀의 정성을 가상히 여기신다면 이곳 수신전의 대신관께 소개장 한 장만 써주십시오. 마음은 해주로 돌아가고 싶사오나 이미 낭랑과 대공자께 큰 결례를 범한 죄인이 무슨 염치로 다시 어르신을 뵈오리까. 소녀는 무도가 끝나는 대로 신전에 의탁하여 어르신과 문중의 평안을 빌 것이니 낭랑께서 소녀를 대신하여 이 서찰을 해주의 어르신께 보내주신다면 감읍하겠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자라서 그러한가,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제 발로 신전에 귀의하겠다니, 소선경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양 그녀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본 발언이었다. 신전이라면 황태자와도, 아들과도 인연이 없는 데다가 억지로 채란의 혼사를 챙길 필요 또한 없다는 점에서도 두루 흡족하였다.
번국의 왕비씩이나 되어 딸 만한 연치의 어린 계집에게 내심을 다 읽힌 것으로 모자라, 그의 손을 빌려 내키지 않는 짐 또한 덜어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불쾌하였으나 당장은 별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이럴 때 비겁하게 고개를 돌리지 아니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러마. 예부도사는 채란을 데려가 의상을 입히고 창과 춤을 맞춰본 뒤에 무대에 올려도 좋을지 가부를 내게 알려주시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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