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황실의 꽃 9장 흐르는 물처럼
1부 황실의 꽃
9장 下. 흐르는 물처럼
그때였다. 문을 열고 연향의 유모인 전씨가 들어서다가 여러 가지 물건으로 어수선해진 방 안 가운데서 울고 있는 연향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이게 다 무슨······. 아니, 현주 자가 어찌 이러십니까.”
연향은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주섬주섬 아무개와 저의 전서부터 챙겼다. 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한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었다. 대리청정을 하는 황태자가 공공연하게 국혼을 선포하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안고 있는 연향은 다급하게 외쳤다.
“오지 마라. 내 차근차근 정리할 것이다.”
“그냥 두시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내 것이다. 건드리지 마라. 모두 다 내 것이란 말이다.”
오지 말란 연향에 말에 개의치 않고 한 걸음 다가서던 전씨는 사리가 분명하고 의젓한 연향 답지 않은 날카로운 반응에 적잖이 놀랐으나 크게 내색하지 아니한 채 그 자리에 멈추어서 연향을 달래었다. 본시 혼사가 가까워지면 여인들은 예민해지게 마련이었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영특한 연향이라 하여도, 그녀는 이제 고작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때때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극히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의 일부였다.
“알겠습니다. 만지지 않겠습니다. 모두 다 현주 자가 것이어요. 허니 소인은 건드리지 않겠으니 천천히 하시어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연향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는 족자를 접어 전서와 함께 함에 넣고는, 주섬주섬 일어나 바닥에 펼쳐진 우의를 차근차근 개서 관대함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두 개의 함 모두 궤 안에 넣고 닫았다. 그리고 궤를 지키듯 그 앞에 서서 울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물었다.
“어머님께 본 것을 알릴 참이냐?”
“현주 자가께서 입 밖에 내지 말라 하시면 이 늙은이 무덤까지 이고 갈 것입니다. 허니 거기 계시지 마시고 이리 오시어요.”
“하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 다오.”
“알겠습니다. 한데 어찌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늦은 밤까지 깨어 계시면 살결이 거칠어지신답니다.”
“잠이 오지 아니하였다.”
“하면 따스한 대추차라도 내어오라 이를까요?”
연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괜찮다고, 조금 있다가 자겠노라 속삭여봤으나 이미 우는 모양새를 보고만 전씨는 근심하는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어디 편찮으신 것은 아닌지요?”
전씨가 고개를 기울여 연향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아프신 것도 아닌데, 성도에서 좋은 소식이 닿은 날 귀하디 귀한 우리 현주 자가께서 어찌 이리도 울적하실까. 행여 고민 같은 것이 있다면 제게라도 털어놓으세요. 이 늙은이는 늘 자가의 편이랍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는 듯이 구는 유모를 연향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조를 하였으니 궤 속에 든 물건과 그 앞에서 울고 있더라는 말이 전씨의 입에서 흘러나갈 일은 없겠지만, 이대로 입을 꾹 다문다면 결코 그녀를 이 방에서 내보낼 수 없으리라는 점을 연향은 인자하지만 완고함이 서린 그녀의 기색에서 깨달았다. 지루하다 싶을 만큼 긴 시간이 흐르고 연향은 고통스럽게 한 마디를 꺼내었다.
“문득 이대로도 좋은가 싶어 그러하다.”
이제 열다섯 살, 연향은 어렴풋하게나마 성숙미가 풍기는 처녀가 되었다.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설렐 연치는 지났건만, 황도의 만금성하면 내성 밖의 버드나무 길과 팔각정, 그리고 원종 폐하의 별궁이었던 영수전이, 그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아무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향이었다.
“무슨 소리세요. 자가께서는 이제 곧 황태자비가 되실 거예요. 제후국 공녀로 태어나 이만한 영예가 어디 있노라고 그리 참혹한 말씀을 하시어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상대와 혼인하는 것이 어찌 축복이고 영광이 될 것인가. 그러나 마음속에 맴도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로 연향은 그저 힘없이 웃었다.
모두가 경사라 떠들어대는 국혼의 결과 그녀가 앉을 곳은 황태자의 정실, 차기 황후라는 내명부 최고의 영광된 자리였다. 그 높은 곳에 홀로 앉아 있으려면 이제는 말 한마디도 백번 고심한 뒤에 하여야 하고, 행동거지 하나마저도 살얼음판 걷듯 하여 매사에 타의 귀감이 되어야 했다. 골이 나면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을 하는 새침한 버릇도, 하고픈 말을 하지 못하면 잠을 이룰 수 없는 당돌한 성미도 이제는 버리고 고쳐야 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일견 꽃처럼 화사하지만 어딘가 서글픈 빛이 맴도는 연향의 표정을 본 전씨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언뜻 보았지만, 사내의 것임에 틀림없는 우의와 연향과 남정네가 함께 그려져 있던 세 폭의 그림, 그리고 그 앞에서 구슬피 울고 있던 연향을 떠올렸다. 가벼이 말로 물을 수 없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당차고 똘똘한 연향은 한 번 마음먹은 일에는 외고집이었다. 감정이 얽혀 있는 일이 분명하니만큼 이러한 일에 서두름은 독이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이 여려졌는지 굳게 다물려 있던 연향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그리 하고도 한참을 전씨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황후마마를 뵈러 간 성도에서 또래의 사내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연향은 긴 주저 끝에 그간 가슴 한편에 애써 감추어 왔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현주 자가······.”
연향은 아무 말 말라는 듯 손을 유모 전씨의 입가에 가져가 댔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더 그를 추억하고 싶었다. 금일 밤, 고작 하루도 되지 못할 이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황태자비 후보인 기주성의 현주가 아닌 열다섯 살 난 소녀 연향이고 싶었다. 그것으로 버리려 하여도 도저히 버려지지 아니하는 이 마음을, 작년 가을 이래 시작된 이 지독한 열병을 낫게 하고 싶었다.
“벌써 두 절기나 지났는데도 이렇게 눈을 감고 있노라면 또렷하게 떠오른다. 외성 밖 느릅나무길을 따라 말을 달릴 때의 청아한 바람의 감촉과 낙엽이 말발굽에 부서지던 소리, 그리고 누각 위에 그린 듯이 앉아 금을 연주하던 사내아이까지도.”
실로 그러하였다. 어찌 저리 맑을까 감탄하게 하였던 그의 맑은 눈도, 스물다섯 개나 되는 현 사이를 오가며 고운 가락을 자아내던 기다란 손가락도 방금 일처럼 눈에 선하였다. 비담 팔각정에서의 만남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를 찾아갔다가 나오다가 영빈각 앞에서 마주쳤을 때의 그 어딘가 쑥스러워 보이던 표정도, 영수전의 석교까지 뛰어와 제 옆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모습도, 저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었던 그의 자상한 눈빛과 자분자분하던 그의 온화한 말투, 넘어질 뻔한 저를 잡아주었던 그의 강건한 팔과 듬직한 품의 온기마저도 생생했다. 아무개와 보낸 모든 시간이 추억이란 이름의 화인이 되어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무게로 그녀의 영혼 깊이 아로새겨졌다.
“그와의 모든 것이 이토록 선연한데도 정작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성도, 이름도, 나이도, 어디 사는지도.”
스스로를 아무개라 부르라던 그를 떠올리며 연향은 서글피 웃었다. 그녀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화폭 아래 자그맣게 찍힌 낙관과 그들이 함께 나눈 소소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가 연주해 주었던 처연하고 아름다웠던 가락뿐이었다. 고작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저에게 전하는 마지막 서한에서조차 본인을 아무개라 칭한 것을 보면 그림 아래의 낙관이 그의 본명일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아니하였다.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한데도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은 단숨에 그에게 달려가고, 그리움은 가을바람에 날리는 갈잎처럼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만 갔다.
“그러한데도 이리 눈을 감으면 절로 그이가 떠오르다니,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기이하지 않으냐.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어찌 마음이 가고 그립다 여겨진단 말이냐. 어이하여 밀어내려 하면 할수록 도리어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냐.”
만일 황태자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사람이나 겨울 한파처럼 모진 사람이었다면, 아쉬울 만치 짧은 아무개와의 인연이 이토록 진하게 아로새겨진 것이 그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연향에게는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황태자 승명은 좋은 사람이었다. 고뿔이 낫자 찾아온 것을 본의 아니게 물리쳐 미안타며 아무개를 떠나보내고 생병이 난 연향에게 시종을 보내어 먼저 안부를 물었고, 태의감에서 어의를 보내어 그녀를 시료하여 주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승명이 자애로울수록 차마 그와 같은 하늘 아래 머물기가 송구해진 연향은 낫지 않은 병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궐을 나섰다.
“나는 이제 곧 입궁하여 태자 전하를 섬길 몸인데, 무슨 까닭으로 내 것 아닌 연분을 탐하게 되어 버렸단 말이냐. 분명 이 마음도 내 것이고, 내 뜻도 내 것일진대, 아니 된다 하면서도 가질 수 없는 바를 놓지 못하는 이 심사를,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이렇듯 아무개의 이야기를 입 밖에 내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알았다. 그를 향한 마음은 연향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크고 깊다는 사실을. 그 깨달음이 연향을 더욱 아프게 할퀴고 있었다. 황태자에게 가라며 저를 놓아준 아무개도, 부군이 될 승명도 더없이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둘도 없는 벗이기에 그들 사이에 끼어 아무개를 놓지도 못하면서 그 마음을 감춘 채 뻔뻔하게 황태자의 사람이 될 자신이 연향은 몸서리쳐지게 싫고 미웠다.
“어차피 이어지지 못할 인연이라면 차라리 이 모두가 꿈이었으면 싶구나. 그 아름다운 날 어여쁜 누각에 기대어 앉았다가 설핏 잠들어 깨어나기 안타까울 만치 고운 꿈을 꾸었다면, 그뿐이라면, 정녕 그리 여길 수 있었다면 참으로 좋았을 터인데.”
연향의 눈동자에 서서히 물길이 차올랐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방울이 구슬처럼 흘러내려 그녀의 도홧빛 뺨 위에서 부서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빼곡히 차오르는 슬픔 속에서 연향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무정한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이 연심이라는 것을.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전하 앞에 나서고 황태자비가 되겠노라 하겠느냐. 우습고도 처연하다. 이리 못나고 어리석을 수가 없다.”
전씨는 차마 크게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눈물만 떨어뜨리는 연향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당기는 손에 이끌려 그녀는 가만히 유모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사내 못지않은 배포를 가졌다 하는 연향도 난생처음 맞이하는 연모라는 이름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그저 가녀리고 무력한 아이에 불과했다. 전씨는 그녀의 가는 어깨와 작은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슬프면 마음껏 울어도 된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하소연하여도 된다고 위로하는 몸짓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뜻대로 되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오니 현주 자가, 지금 당장 어찌하려 하지 마셔요. 한 번 닿은 인연을 억지로 지우려 하니 더 그립고 아픈 거랍니다. 마음에는 죄가 없으니 부디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시어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 정녕 죄가 아니냐고 묻는 슬픈 눈길 앞에서 유모인 전씨도 같이 눈물지었다.
“그럼요, 자가께선 아무것도 잘못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니 참지 마시고 그저 마음 가시는 대로 물처럼 흘려보내세요. 그리하면 아픔과 슬픔, 괴로움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차차 순리대로 흘러갈 겁니다.”
우는 듯 웃는 연향의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준 뒤에 전씨는 일어섰다.
“많이 우셔서 진이 빠지셨을 터이니 따스한 것을 조금 내어오겠습니다. 자가께서는 고뿔에 걸리지 않도록 누워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