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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Oct 22. 2024

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18

제18장 번왕의 심산 

1부 황실의 꽃 


제18장 번왕의 심산 




 황태자와의 접견 후에 연향의 예식 준비 과정의 진척 정도를 살펴볼 겸 내당에 잠시 들른 대수협은 소선경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연향이 지밀시녀로 채란을 지목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과연 정이 많은 연향이 할 법한 재미있는 제안이라며 수협은 웃었다.


 “재미있다니요. 전하께서는 채란이 그 아이를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소씨는 정색을 하고 말을 받았다. 언행이 조신하고 조심성이 많은 그녀답지 않게 이상하리만치 예민한 반응이었다. 


 “내 모를 것은 또 무어란 말이란 말이오?”


 그리도 몰라야 할 일이 많아 채란을 도착 즉시 눈에 안 띄게 내당 안에 감추고, 하필이면 적장자인 성운을 황태자의 기주성 방문 직전에 못다 한 공부를 구실로 대맥국으로 떠나보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운의 일을 소씨가 쉬쉬하며 감추고 싶어 한 까닭을 짐작하였기에 수협 역시 드러내어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성운이 그 반편이 같은 녀석이 언제고 단단히 사고를 치리라는 바는 굳이 예상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었던지라 이번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지도 않은 대수협이었다. 


 번왕비 소씨는 조심성이 지나쳐 사서 걱정을 하는 일이 잦은 것이 다소의 흠이긴 하였으나 꼼꼼하고 사리 분별이 분명하여 일 처리가 깔끔하였다. 그는 성안의 내정을 일임할 수 있으리만큼 자신의 정실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협으로서는 소씨의 사려 깊은 언행과 찬찬한 성정을 물려받은 자식이 오로지 딸인 연향뿐이라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말씀을 드리자면 그렇다는 소리이옵니다. 그 아이 여간내기가 아닙니다. 고작 열일곱 살 나이에 사전 준비조차 없이 그리 크고 중요한 무대에 홀로 설만큼 대범한 성정을 지닌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나이까. 예부도사가 연회 당일 무대장치와 소품도 모다 채란이 그 아이가 준비하였다 하더이다. 신첩 입때껏 그토록 뛰어난 기지를 지닌 아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염량은 또 어찌나 빠른지요. 게다가 성정이 차고 독하기는 차마 형언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랍니다.” 


 연향이 채란의 처지를 긍휼히 여겨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겠거니 여겨 대충 흘려 넘겼던 대수협의 얼굴에 비로소 흥미로운 기색이 어리기 시작하였다. 소씨의 말을 듣다 보니 채란보다 더 황실에 적합한 인사는 없을 듯하였다. 


 공연히 음해를 잡는 일조차 빈번한 황궁에 영특하고 눈치 빠르고 대범하며 성정이 독한 자 이상으로 적합한 인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럼 더 잘 되었지 않소? 암투와 정쟁으로 물든 황성에 순해빠진 것만큼 무용한 인사도 없을 터.”   


 “하나 말씀드린 연유로 인하여 연향이 그 아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연향이에게는 타인에 대한 적의가 없나이다. 다른 이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성품이 되질 못하니 훗날에라도 채란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연향은 결코 그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데 어찌 채란이가 지밀 시녀로 어울린다 하겠나이까. 차라리 전하께서 그 아이를 취하셨다면 신첩이 지금과 같이 우려하지도 않나이다.”


 소씨가 채란이 처소를 내당에 마련해 준 것은 분명 번왕인 그 또한 두루 염두에 둔 조치였으리라. 그러나 수협은 이번에도 모르는 척을 하였다. 분명 채란은 사내의 흥미를 돋울 만큼 어여뻤으니 소씨의 염려를 기우라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녀가 생각하지 못하였던 바는 대수협은 계집을 택할 때에 미모보다는 쓸모를 더 중요시한다는 점이었을 뿐이다. 소실인 해씨도, 무씨도 다 정략의 일환으로 맞아들인 상대였다. 


 태예국의 수많은 귀족가의 규수 가운데 소씨가 수협의 정실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가 좋은 가문 출신인 덕분이기도 하나, 그녀의 신중하고 찬찬한 성품과 조신한 태도, 현명한 언행, 그리고 단단한 심지를 수협과 수협의 부친이었던 선대 번왕이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후계를 만들기 위하여 고르고 고른 소씨를 정실로 삼았으나 자식이 꼭 어미를 닮는 것만도 아니라는 점을 성운을 통하여 경험한 수협은 소실을 고작 미모 따위에 혹하여 맞아들일 의향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는 여인의 치마폭에 휘감겨 향락에 젖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허다하였다.  

 “훗날 그 아이가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오? 내세울 만한 가문도, 뒷배가 되어줄 만한 세력도 없는 그 아이가 기주성의 현주인 연향에게 맞서 황태자 전하의 후궁자리라도 노릴 것이란 소리요?”


 “남녀 사이를 그 누가 장담하겠나이까. 하물며 채란이는 뱀처럼 교염한 자태를 지녔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고 생각하나이다.” 


 설령 채란에게 든든한 후원 세력이 있다손 쳐도 황태자가 연향 아닌 다른 자에게 쉬 후궁자리를 내어줄 리 만무하였다. 


 황태자는 이미 조당에서 대외적으로 연향 외의 간택은 없으리라 천명하였고 그 발언의 정치적 파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국혼과 승상부 부활을 놓고 자신과 모종의 밀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채란이 설혹 후궁을 노린다면 얻고 싶은 자와 주지 않으려고 버티는 두 능구렁이의 싸움이 될 터였다. 수협은 차게 웃었다. 승명은 순덕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이해타산이 빠르고 정치적인 기질이 탁월한 자였고, 채란은 영특하고 독하기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라 하니 말이다. 


 “내 한 번 그 아이를 만나봐야겠소.”


 수협이 마음을 굳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선경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아니하였다. 수협이 채란을 입궁시켜 궐내 수족처럼 쓰겠다고 다짐하였다면 그녀로서는 이제 말릴 도리가 없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내당에 있으니 부르면 바로 올 것입니다. 기별해두라 이를 터이니 찬찬히 보시옵소서.” 


 소씨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수협에게 처소를 비워주고 밖으로 나섰다. 하직 인사까지 받은 마당에 재차 얼굴을 마주 대하면 서로 불편하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더하여 자신이 있으면 채란 역시 속내를 감출 것이 자명하였다. 어느 모로 보아도 부군이 채란의 됨됨이를 정확하게 재기 위하여 그녀가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소선경이 자리를 피한지 채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서 채란이 수협 앞에 나타났다. 


 “소녀, 번왕 전하를 뵈옵니다.” 


 예를 올리는 채란을 대수협은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진연에서도 그러했지만 확실히 소씨가 우려할 만치 사내를 돋우는 맛이 있는 계집이었다. 무심한 듯 차가운 표정도 그러하고 농염하게 피어난 모란처럼 화사한 자태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승명 같이 처세가 뛰어난 이가 과연 이 아이의 미색에 넘어갈 것인가는 수협으로서도 의문이었다. 자신이 그러하듯 승명도 사랑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할 법한 인사였기 때문이다. 


 설혹 그녀가 소씨의 염려대로 황태자의 눈에 들어 분란을 만든다 하여도 세력이 든든한 다른 귀족의 영애보다야 채란 쪽이 처리하기 쉬울 터였다. 영특하다 하니 채란 또한 그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성운의 일로 번왕비의 노여움을 사자 바로 신전으로 피하려 할 만큼 제 목숨 귀한 줄도 아니 수협으로서는 더욱 잘된 일이었다. 


 때와 상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지녔으니 섣부른 행보를 보일 리가 없었다. 가만히 뜯어볼수록 채란은 황궁 안에 심을 저의 눈과 귀로 매우 흡족한 자였다  

 “신전에 귀의하겠다는 바는 확고한 것이냐?” 


 겉으로 드러내어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채란은 마음이 복잡하였다.


  내일 아침 일찍 신전으로 가면 그것으로 그간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리라 여겼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저버린 순간에 예기치 못한 번왕의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또 다른 기회일지, 아니면 함정일지 알 수 없었기에 채란은 일단 처신에 신경을 쓰기로 하였다. 


 번왕인 대수협은 그 아들인 성운과는 아주 달랐다. 섣부른 접근도, 눈에 띄는 경계도 금물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황태자 앞에서 자신답지 않은 실수를 범하였던 일을 상기했다. 상대의 도량을 염두에 두지 아니한 채 상황에 급급하여 마음만 앞세우다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은 이틀 전의 밤 그 한 번으로 족하였다.


 “그러하옵니다.”


 대수협은 말을 돌리지 아니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너에게 입궁의 길을 열어주어도 그러하냐?”


 채란은 번왕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하여 침묵하였다. 같은 입궁이라 하여도 어떠한 위치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녀가 받을 대우도, 그에 대한 그녀의 대처 방식도 천차만별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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