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등극, 그리고 봉작
황태자 승명이 약혼식 이후 남은 순행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환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락제의 병세는 호전되지 아니하였다. 그저 환절기에 따른 가벼운 고뿔인 줄 알았던 병증이 가을이 깊어지며 천식으로 발전했는데 어의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락제의 건강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기만 하였다. 황제의 환후가 깊어지며 황궁 안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동지를 즈음하여 황태자는 어의와 함께 반나절 이상을 대전에서 황제의 병구완을 하며 보냈으나, 그의 갸륵한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이듬해 대한을 사흘 앞두고 황제는 붕하였다.
영락제가 붕어하자 황태자인 승명은 예부에 어장도감과 빈전도감, 산릉도감의 설치를 명하였다. 어장도감은 선제의 국장 절차를 총괄하는 임시관청이었고, 빈전도감에서는 빈전을 꾸려 황제의 시신을 안치하고 염습과 복식을 준비하였으며 산릉도감에서는 황제의 무덤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황태자는 세 개의 도감을 총괄하는 총호사를 따로 임명치 아니하고 스스로 어장 절차를 주관하였다.
황제의 서거가 알려지고 도감들이 설치되어 빈전이 마련되자, 황태자는 황제의 신위를 모셔두고 황후와 황실 직계 및 방계의 친척들만 불러들여 사흘간 황실 제의를 진행하였다.
조정 및 지방관의 입궁이 허락된 것은 제의가 끝난 나흘째로 그때에는 이미 황제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습 절차가 끝나 있었다. 조당의 신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황제의 시신을 이불로 싸는 대렴마저 완료되어 시신을 넣은 재궁이 빈전에 모셔졌다. 황제의 관이 빈전으로 옮겨진 이후 황태자는 성복을 하고서 총호사의 자격으로 종묘와 신전으로 나아가 황제의 서거를 공식적으로 고하였다.
성복 이후 하루라도 황위가 비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조당 신료들의 주청에 따라 황태자인 승명이 보위에 올랐다. 선제가 승하한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국상 중에는 국법에 따라 일체의 예식과 제사가 금지되는 만큼 호화로운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은 예에 맞지 아니하다며 승명은 내각의 수장인 대학사로부터 선제의 유언장과 국새를 받아 즉위 교서를 반포하고 종묘와 대신전에 황위 계승을 알리는 것으로 등극에 관한 일체의 절차를 대신하였다.
즉위식을 생략하였듯 승명은 면복으로 갈아입지도 아니한 채 상복 차림 그대로 어좌에 올랐으나 지난 몇 달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선제를 구완하던 황태자의 깊은 효심을 지켜보아 온 조당의 신료들은 부황을 잃은 그의 슬픈 마음을 헤아려 그 부당함을 간하지 아니하였다. 황태자가 어좌에 앉자 정전 앞에 도열하여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두 손을 맞잡아 이마에 댄 채로 꿇어 엎드려 예를 올리며 외쳤다.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새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새 황제는 선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교서인 애지를 내려 묘호와 능호, 시호를 정하여 올리라 명하였다.
선제인 영락제의 묘호는 의로움을 펼쳐 약해진 국체를 바로 세우고 나라 안의 어느 세력에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하여 경종으로, 능호는 나라 안에 두루 선제의 어진 성정이 나타났다 하여 현릉顯陵이라 정해졌다.
광영현명황제라는 시호가 결정된 것은 애지가 내려진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능을 조성하는 일을 마지막으로 몇 달 여 간의 어장 절차가 모두 종료되자, 황제는 백성을 품에 안아 화락하게 한다는 뜻의 회민懷旼이란 새 연호를 세웠다. 선제께서 붕하신 것이 연시의 일인지라 황실 예법에 따라 이 해가 끝날 때까지는 선제의 연호를 쓰고 즉위 원년을 지나야 비로소 회민 1년이 될 터였다. 새 황제의 등극에도 불구하고 영락 14년은 조정개편 없이 조용히 저물고, 이윽고 회민 1년의 새해가 밝았다.
황제가 선제의 첫 번째 기일에 제를 지내고 국법에 따라 정해진 기년복을 벗자 조당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국혼에 대한 주청이 쏟아졌다. 미혼의 황제가 보위에 올랐으니 황후를 맞이하여 응당 후사를 든든히 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사가에서도 상을 당하면 삼 년은 혼례를 피하는 법인데 황실에서 선제께서 서거하신 이듬해에 바로 대례를 치르는 것은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표면적으로는 양측 모두 합당한 명분을 내세우며 대립하는 듯 보였으나, 그 이면에 제각각 다른 잇속이 숨어 있으리라는 점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간파해 낸 황제는 가타부타 의중을 내보이지 아니한 채로 한동안 그들의 논의를 지켜보았다.
논쟁의 추이를 지켜보니 전자의 세력은 황실의 번성을 구실로 황제가 즉위 전에 선포하였던 간택령 없는 대례를 무산으로 돌려 후궁을 간택하게 할 심산인 듯하였고. 후자의 세력은 국혼을 뒤로 물린 채 일문의 공녀를 내명부에 심어 독신인 황제를 공략하여 황후 후보인 연향보다 먼저 황손을 품게 할 공산인 모양이었다.
즉위 초부터 황상인 저의 의지를 꺾고 여색을 이용하여 저를 수중에 쥐고 흔들려하는 조정 대신들의 작태가 괘씸하기 그지없었으나 황제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뒷짐을 진 채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일에 스스로 나설 의향이 없었다. 이처럼 조정의 세가 서로 다른 욕심을 품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마당에 갓 즉위를 한 황제가 나서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것은 곧 조당에 피바람을 불러올 당파 싸움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황제는 기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정의 상황을 넌지시 일러준 뒤 호번왕으로 하여금 상중에 국혼은 부당하니 삼가 사양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도록 권하고, 내각의 수장인 대학사를 은밀히 불러들여 조정 개혁의 어지를 밝히고 국혼에 관하여는 양측의 의견을 절충한 중론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제의 남아 혈손이라고는 현 황제밖에 없어 후사가 시급한 것은 사실이나 어장을 치른 지 삼 년도 지나지 않아 대례를 거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일인지라 일단 황제의 정혼녀인 현주를 후궁으로 입궁시키면 어떠하냐는 의견이 조심스레 나오기 시작할 즈음 기주에서 국상 이후 삼 년 간은 대례를 미루고 싶다는 내용의 상소가 올라왔다.
호번왕의 눈치를 보며 절충안을 개진하던 무리는 때마침 올라온 사양의 글에 힘을 얻어 기주의 현주를 내명부 천 1품 황귀비로 봉하였다가 추후 대례를 거쳐 황후로 진봉하자는 극적인 합의를 이루어냈다.
조정의 뜻을 전해 들은 황제는 정황상 어찌할 수 없는 조치라는 사실을 감안한다 하여도 황제 본인이 만백성 앞에서 황후로 맞이하겠다고 약조한 현주를 후궁으로 입궁시키는 일을 결정하는 일에 있어 어찌 사전에 황제의 의중을 듣지도 아니하고 신료들이 결정한 사항을 조당의 뜻이라며 통보하듯 전할 수 있느냐며 이는 황권이 땅에 떨어진 반증이라고 통탄하고는 칩거에 들어갔다.
황제께서 계신 정전에서 소리 높여 언쟁을 하여도 잔잔한 얼굴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황상이었던지라 문문하게 보아온 이들은 몇 번을 거듭 청하여도 황제가 정전에 들지 않고 황제의 침전인 감로전에서 강경하게 버티자, 뒤늦게 황망한 기색을 하고는 대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청하였다.
초봄 꽃샘추위 속에서 조정 신료들을 꼬박 이틀 동안 고생시킨 황제는 칩거에 들어간 지 닷새 만에 정전으로 나왔다. 침통한 기색으로 정전에 나온 황제는 금일과 같은 참람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덕이 없는 짐을 제대로 보필할 만한 충성스러운 신료가 부족한 까닭이니 짐은 조정을 개편하여 나라 안에 인재를 고루 등용코자 한다는 윤지를 발표하였다.
즉위에 오른 이후 조정 개혁의 의사를 전혀 내비치지 않아 안심하고 있던 대신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윤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국혼 소동으로 아직 황제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여기서 섣불리 반대하였다가는 황제가 선위까지 불사할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기에 대례를 찬성하던 측도 반대하던 측도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황태자 시절 단 한 번의 원행으로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어낸 황제였다. 하물며 이태 전의 가을 기주의 백성들 앞에서 치른 황제와 현주의 약혼은 나라 안의 미담으로 퍼져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기주의 호번왕 세력도 만만치 않았으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민심의 이반이었다.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대연향 현주의 일로, 황제로 하여금 즉위 이년만에 황위 선양을 운운케 한다면 본인들이 백성들에게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힐 판이었다. 대신들은 다급해졌고 결국 어찌할 수 없이 황제의 승상부 부활 어지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큰소리 하나 내지 않고 숙원이었던 승상부를 재건하고 대승상에 기주의 호번왕을, 그리고 이 일의 이면에서 노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던 대학사를 좌승상에, 도찰원의 좌도어사를 우승상에 봉하였다. 이로 인하여 호번왕 대수협은 정1품 관직을 제수받아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동년 여름 우여곡절을 거쳐 드디어 예부에 가례도감이 설치되었다. 황제는 시위 부대를 기주에 보내어 황귀비가 될 대연향을 모시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혼전 단계에 돌입하였다.
서운관에서 황도길일을 택하여 올리자 예부에서는 혼담을 전할 납채사의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황제께 바쳤다. 황제가 납채 사절로 택한 이는 선제의 여섯 번째 이복 아우인 순친왕 조식으로 황제의 숙부들 가운데 가장 그와 친분이 두터운 자였다.
납채사로 임명된 순친왕은 정전으로 나아가 황제로부터 납채례에 한하여 황권을 대리하는 권한이 명시된 사지절을 받았다. 황제는 순친왕에게 혈통 좋은 군마 백여 필과 비단, 이국의 보옥과 은자, 책봉식에 입을 대례복을 내려 기주의 현주에게 예물로 보내게 하였다.
대외적으로만 황귀비로 맞이한다고 내세웠을 뿐, 혼전 단계에서 황후에게만 보내왔던 시위 부대를 기주로 파견한 것부터 현재로서는 황위 계승 1순위에 있는 순친왕을 납채사로 임명한 것까지 황후를 맞이하는 예와 하등 다르지 않았다.
납채사 편에 보내는 예물 역시 역대 황후의 선례와 비교해 보아도 그 질과 양에 있어서 더 화려하고 다양하다면 더했지 결코 부족하지 않아 현주의 황성 내 입지를 세워주고자 한 황제의 의중이 충분히 드러나고도 남음이 있었다.
황제는 납채사를 통해 기주성에서 연향을 위한 납채연을 베풀어주었다. 통상 신부의 집에서 하객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사가에서의 예법과 달리 신랑인 황제 측에서 주석을 준비하는 것은 그간 신부를 키워준 빙가에 사의를 표하는 예 황실만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다만 황제가 베푼 진연이 여느 납채연과 상이하였던 점은 그것이 기주성 백성들 전체를 위한 축제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뿐이었다. 황제의 크나큰 배의 아래서 동년 가을 입궁한 대연향은 책봉의에서 금책과 금보를 받고 태예국의 서른세 번째 군주인 회민제의 황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