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황족과의 남
날이 밝자 연향은 황실 예법에 따라 의관을 갖추고 내명부의 최고어른이신 황태후께 문안을 드리기 위하여 감로전을 나섰다. 천1품 황귀비부터는 황궁 안의 전각을 이동할 때 승교를 탈 수 있었으나 연향은 내관들의 권유를 온화한 미소로 사양했다. 책봉의가 끝나고 첫 문안 인사였다. 황태후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몹시 총애하였으므로 승교를 타고 간다 하여 언짢아하지는 아니할 테지만, 웃전에게 인사를 가면서 요란하게 행차한다는 구설에 오르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연향은 수발을 드는 여관들을 데리고 걸어서 황태후의 처소인 자희궁으로 향하였다.
황태후는 연향을 흔쾌히 맞아들였다. 용체를 모시고 곤하였을 텐데 이른 아침에 문안을 오다니 기특하기 이를 데 없다고 칭찬한 뒤, 다음부터는 삼가지 말고 승교를 이용하라 자상하게 권하였다. 기주의 현주였을 때부터 연향을 어여삐 여겨온 황태후였다. 책봉의 내도록 곁에서 자상하게 돌보아주는 후덕한 황태후에게서 모친인 소씨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쳤다. 황성의 두 축인 황제와 황태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것은 연향으로서도 참으로 커다란 복이 아닐 수 없었다. 연향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내어 거듭 사의를 표하였다. 원래 삶이 거꾸러지는 것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모친의 조언처럼 이럴수록 더 삼가고 조심하여야 훗날 황상께 힘이 되는 황후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정식으로 책봉의를 마쳤으니 내명부의 주인은 이제 황귀비입니다. 선제 폐하의 국상 중이라 대례를 치르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내 여태 황후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인이 생겼으니 이제 그대에게 이 인장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황태후가 내민 모란 호접문 나전함 속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황후의 인장이 놓여 있었다. 연향은 당황하였다. 황후의 인장은 예황실 내명부 수장의 증표였다. 내외명부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황성 안에서 일하는 모든 여관들의 신상필벌이 가능한 권위의 증표를 그녀는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후의 인장을 연향에게 내린다는 것은 황제처럼 황태후 역시도 그녀를 황후로 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증이었다. 그러나 연향은 황후의 인장을 덥석 받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태후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황망하신 말씀에 소첩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후 마마. 불민한 소첩, 갓 입궁하여 황궁 예법에 어둡고 황성 안의 대소사에 대하여 아는 바 역시 없어 이토록 중대한 소임을 능히 감당키 어렵사옵니다. 송구하오나 마마께서 암우한 소첩을 긍휼히 여기시어 조금 더 돌보아 주시면 아니 되겠나이까?”
황태후 윤씨는 손을 뻗어 연향의 손을 그러잡았다. 아직 어린 연향에게 황후의 인장을 건넨 것은 그녀가 짐작하는 것처럼 그녀의 반응을 시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연향은 황성 출입이 가능한 수많은 지방 토호들과 중앙 관료들의 영애 가운데서 황태후가 직접 선택한 규수였다.
하나뿐인 아들의 황후로 흡족한 이를 고르기 위하여 윤씨는 오래전부터 황후전의 문턱을 낮추었다. 내외명부의 부인들과 두루 어울리며 어미 된 이들의 인품을 살폈다.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됨됨이가 바른 부모 아래서 반듯하게 자라난 아이를 아들의 비로 간택하고 싶었다. 하여 괜찮다 싶은 가문의 영애들을 하나하나 불러 직접 당부를 판단하였다.
후보가 될 아이가 영특하고 재주가 많아도 부모가 될 자가 간악하거나, 우매하거나, 재물과 권세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가차 없이 배제하였다. 황제가 될 아들에게 힘이 될 만한 세력가의 자손이되, 부모가 될 이들의 인품이 출중하고, 황후가 될 아이 또한 외로운 아들의 곁붙이가 될 수 있을 만큼 어질고 영리하기를 바랐다. 딸 가진 어미로 보아도 불가능에 가까웠던 욕심을 충족해 주었던 단 한 명의 아이가 바로 대연향이었다.
자신이 십여 년을 신중하게 검증하여 선택한 자부이거늘 이제와 시험이 또 필요할 까닭이 없었다. 윤씨는 자질이 뛰어난 연향을 황실에 어울리는 훌륭한 황후로 키우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여 그녀는 연향이 저의 뜻을 곡해하지 아니하도록 진중하게 말을 골랐다.
“처음이니 응당 어려울 테지요. 압니다. 내명부의 수많은 여관들과 외명부의 관리까지, 헤아릴 수 없이 무거운 책임이 따를 터인데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습니까. 어린 그대가 감당하기에는 당연히 부담이 되겠지요. 하지만 인장의 무게를 짐작하여 저어하는 그대이기에 더 믿고 맡길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귀비에게는 이 모후가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은 내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익혀가다 보면 차차 익숙해질 것입니다. 내 그대를 오래도록 지켜보았습니다. 그대는 나라 안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지녔으니 머지않아 훌륭한 내전의 수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황태후의 자애로운 음성에 연향은 재차 깊이 허리를 굽혔다. 황태후가 이렇게까지 말을 해오니 재차 사양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황후의 인장을 받았다. 묵직한 무게가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황태후 마마께서 부족한 소첩을 잘 이끌어주시리라 믿사오며 감히 명 받잡겠나이다.”
“내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도울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황태후궁에서 물러난 연향은 마침 문안을 위하여 들었던 혜명 공주의 초청을 받고 오반 후에 공주의 전각으로 향했다.
황제의 손위 누이인 문명 공주는 황제가 관례를 치르기 직전에 운서성의 군주 표건욱의 계비로 출가하였다. 하여 황궁에는 올해 열여섯 살인 혜명공주만이 모후인 황태후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활달한 혜명은 또래인 연향의 입궁이 몹시도 반가운 눈치였다. 연향이 처소를 방문하자 기꺼워하며 그녀를 맞이하였다.
“책봉의가 길어 곤할 텐데 아침 일찍 어마마마께 문후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감동하였습니다. 황궁이 여러모로 크고 낯설어 많이 외로우실 터이니, 소녀가 혼례를 치르기 전까진 궐 안에서 황귀비의 좋은 벗이 되고자 합니다.”
“공주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로우십니다. 저 또한 공주께 좋은 누이가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시고, 또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공주께서도 언제든 스스럼없이 청하세요.”
“책봉의 이후로 여러모로 심신이 지치셨을 터인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황제 페하께서는 온후하시지만 본디 잔정이 없으십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오니 혹여 폐하께 서운한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깊이 마음에 담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도 마음 다칠 일이 생기거든 누이인 저라도 불러 한탄하시고요. 불러만 주시면 제가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연향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였다. 황제인 조효는, 황태자 시절에도, 그리고 신분을 모르고 만났을 적에도 늘 그녀에게 자상하였다. 말 한마디 따스하게 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하였던 방식으로 깊게 마음을 써주곤 하였기에 그녀로서는 황제가 잔정이 없다는 소리가 의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연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가 알고 있는 황제에 대하여 평하였다.
“아닙니다. 공주께서 폐하에 대하여 다소 오해를 하시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부족한 저를 늘 아껴주십니다. 모자라고 부덕한 몸을 항시 크고 넓게 품어주셔서 미욱한 저는 늘 과만하기만 한 것을요.”
뜻밖의 답변에 혜명의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오라비인 회민제, 조효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한 필요이상으로 사람을 가까이 두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피붙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혜명은 승명과 더불어 황태후 윤씨 소생의 친남매였으나, 그녀는 입때껏 오라비와 그 어떠한 추억도 쌓은 바 없었다. 마주칠 때마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건넬 뿐, 머리 한 번 쓰다듬어준 적 없었다. 그것은 선제께서 잠저 시절에 맞아들인 소실 출신의 문명공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복누이를 대하는 태도나 친동기인 저를 대하는 태도나 하등 다를 것이 없어 어린 마음에 내심 상처를 받기도 하였었다. 어찌 언니보다 저를 더 예뻐하지 아니하냐고 울면서 떼를 써보아도 승명은 그저 무심히 바라보다가, 다음부터는 마음을 쓰도록 하마, 하고 한 마디만 툭 남기고 떠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그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아니하였다.
내관을 대할 때나 모후를 대할 때나 누이를 대할 때나 신료들을 대할 때나 공평무사한 태도에는 한 점 변화도 없었다.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였기에 그 누구도 감히 황제인 회민제의 총애를 빙자하지 못하였다. 하여 혜명은 오라비인 황제가 연향을 맞이하면서 보인 이례적인 조치들 역시 모두 모후이신 황태후의 뜻인 줄 알았다. 스스로 나서서 누군가를 드러내어 편애할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진한 연향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의 말을 숨김없는 진심 같았다. 혜명은 소녀다운 호기심으로 내심으로 궁금하였던 바를 질문하였다.
“다소 무도한 질문을 드림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폐하께서 책봉의가 끝나고 간밤에 황귀비를 찾으셨습니까?”
“예, 감로전으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가 태화전에 발길을 한 것이 아니라 감로전으로 연향을 불렀다는 말에 혜명은 내심으로 한 번 더 놀랐다. 황제가 연향이 있는 태화전으로 갔다면 그것은 기주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한 의례적인 방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 본인의 침전인 감로전으로 그녀를 불렀다면 상황은 판이하게 달랐다. 좀처럼 곁을 내주는 법이 없는 황제는 황태자 시절에도 처소로 다른 이를 불러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본인의 영역이 확고한 황제가 연향을 침전으로 불러 함께 하였다면, 그것은 그녀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아침까지 함께 계셨고요?”
연향의 얼굴이 꽃물을 들인 듯 달아올랐다. 불현듯 황제의 팔을 베고 품에서 잠들었다가 눈을 뜬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별빛에 비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로 인하여 얼마나 민망하였는지 몰랐다. 놀란 마음에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는 잔잔하게 웃으며 좀 더 자라 다독여 주었다. 저를 안아주는 품의 아늑함과 어깨를 토닥여주는 손길의 다정함에 취해 잠들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스르륵 잠이 들어버린 연향은 다음에는 반드시 황제보다 먼저 일어나리라 굳게 다짐하였다.
“얼굴을 보니 굳이 대답을 듣지 아니하여도 알겠습니다. 모후께서 황귀비를 귀애하시는 연유를 저도 이제 알겠습니다.”
회민제는 황태자 시절부터 황실 법도에 따라 내궁에서 들인 시침 여관들을 번번이 내쳐서 주위의 근심을 사곤 하였다. 황제가 여인을 멀리하니 후사도 얻지 못하리라 속닥거리는 불측한 무리마저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연향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라 한다면 황제의 결벽증도 크게 우려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조만간 기쁜 소식이 있기를 소녀 또한 간절히 기도드리겠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 황실의 번성을 위하여 부족한 몸이나마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연향은 감사를 표했다. 황후이든 황귀비이든 내명부 여인들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후계 생산이었다. 특히 회민제의 경우처럼 황실의 적장자로 보위를 이은 황제의 경우라면 그 중요성이 배가되었다. 회민제의 비라곤 오로지 자신하나뿐이니 응당 압박 또한 크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각오는 하고 있던 바였으나 입궁 첫날부터 바로 이렇게 부담이 생기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향은 그마저도 저와 황제를 걱정하는 공주의 고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좋게 돌려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