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29-30(완결)
1부 29화 밀담 / 30장 최종화 추가 업데이트
제1부 황실의 꽃
29화 밀담
“연향아.”
연향은 울지 아니하였다. 고개 숙여 눈물 흘리는 대신에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애타게 연향을 불렀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듯이. 간곡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었다.
“연향아.”
“지금 이렇듯 신첩의 다친 마음을 먼저 어루만져 주시는 폐하라서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신첩 또한 폐하를 지킬 수 있게 허락하소서.”
“대승상이냐. 네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이가 호번왕인 것이냐?”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에 실린 확고한 의지를 읽은 황제의 얼굴이 차츰 차갑게 굳어졌다. 연향은 황제가 어떤 심경일 때 이러한 얼굴을 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황제로서, 한 나라의 군주로서 무언가를 결심할 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아니, 되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이 일을 받아들여 누구를 택하든 내 너를 아프게 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일 터이니. 허면 절대로, 너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만든 이들의 여식은 고르지 않겠다.”
사내 아닌 황제의 얼굴로 돌아온 그는 연향에게 먼저 자라 이르고는 감로전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호번왕을 감로전으로 불러들였다. 황제의 호출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대수협은 일각도 되지 않아 도착하였다. 황제는 주위를 물렸다. 감히 누구도 닿지 못할 구중심처, 가장 은밀하고 고요한 장소에 대수협과 황제 둘만 남았다.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하문하였다.
“대승상이 아무런 복안도 없이 황귀비를 종용하였으리라 여기지 않소. 대승상의 대안이 무엇이오?”
과연 황제는 영명한 군주였다. 어지를 읽은 호번왕 대수협도 공연히 말을 돌리지 않았다.
“자희궁에서 일하는 여관 도채란입니다. 일전에 기주에서 헌천화무를 추었던 무희이온데 기억하십니까.”
짐작했던 대로 황제는 전혀 놀라지 아니하였다.
“아아. 신전에 가겠다고 하였던 이가 황태후전에 있기에 뒷배가 생겼으리라 짐작은 하였소. 그것이 대승상이었을 줄이야.”
황제가 차게 웃었다. 채란의 뒤를 봐주는 이가 호번왕이라는 소리는 채란이 저에게 거절당하였던 그날이나 바로 그다음 날에 대수협과 손을 잡았다는 소리였다. 분명 헌천화무를 추었을 때만 하여도 대수협은 채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연향에게 청혼을 한 다음날 다과를 나눌 적에 번왕비는 채란이 이튿날 새벽 신전에 가리라고 하였다. 그때가 미시가 넘은 시각이었으니 채란은 고작 저녁나절 두어 시간에 번왕을 공략했다는 것이 아닌가. 번왕비 소씨를 움직여 헌천화무의 무대에 올라 저와 번왕의 눈에 들더니, 그날 새벽에는 저를 유혹하려 들고, 그에 실패하자 호번왕과 손을 잡아 황태후궁에 들어오더니 모후의 신임을 얻어 회임한 연향의 수발을 들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연향의 위기를 기회 삼아 호번왕의 복안이 되어 저의 눈앞에 나타났다. 몇 년에 걸친 그녀의 계획이 한눈에 보였다. 야심만만하고 야살스러운 계집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알아봤지만, 돌이켜 볼수록 실로 무서운 아이였다. 채란은 기주의 연지에 묻어두었던 그 새벽처럼 착실하게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아이는 대승상을 끝내 배신할 수도 있소.”
황제의 안목은 예리하였다. 보지 않고서도 저를 간파하였던 것처럼 채란의 됨됨이 역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채란이 위험한 말이라는 것도, 그 아이의 아우인 유겸을 붙들고 있다 한들 그것이 언제까지 채란에게 유효한 패가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신도 알고 있나이다. 하오나 현재로서는 그 아이 이상의 대안도 없나이다.”
“그도 그렇군.”
확실히 채란이라면 피바람이 몰아치는 황성에서도 잘 살아남을 아이이긴 하였다. 영악하기 이를 데 없어 귀신같이 자신이 붙을 자리를 찾아간다. 채란의 등장이 또다시 연향의 불행과 겹쳐져 이루어진 것이 탐탁하지 아니하였으나, 적어도 채란이란 패를 집어 든다면 황제인 저의 뜻을 꺾고 조당을 어지럽히려고 하는 저 무도한 무리에게 쓸데없는 힘을 실어줄 일은 없을 터였다.
“폐하.”
“고하시오.”
“신이 믿는 것은 도채란, 그 아이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보시다시피 그 아이는 야심만만하고 영악하기 이를 데 없어 시류에 따라 어디로든 흐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소신은,”
“짐을 믿는다, 그리 말하고 싶은 거요?”
황제는 대수협의 말을 잘랐다. 대수협은 황제 앞에서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 폐하. 어리석은 소신, 영명하신 폐하께서 끝내 신의 미욱한 여식을 지켜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나이다.”
종장 끝, 혹은 다른 시작
감로전에서 황제와 대수협 간의 밀담이 있었던 그다음 날, 정전으로 나아간 황제는 대승상으로 하여금 조정의 뜻을 수렴하여 새 후궁을 간택하고자 한다는 윤지를 발표하게 하였다.
드디어 황제를 이겼다고 여긴 조정 신료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황은이 망극하다 외쳤다. 황제는 망극할 것까지야 있는가, 하고 평연히 말을 받고는 계속하여 이어지는 내용을 읽게 하였다.
후궁을 간택하되, 선제의 삼년상이 끝나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존 궁인 가운데서 임의로 간택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자 희색이 만연하였던 신료들의 면면은 단번에 흙빛이 되었다. 이번 후궁 간택을 주장한 이들의 대다수가 연향의 황귀비 책봉 시에 삼년상을 이유로 국혼을 반대하여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은 감히 항변치 못하였다.
간택의 기준은 후궁 선발 본연의 목적을 감안하여 후계 생산이 가능한 연령대의 귀족 출신의 여관으로 한정하되 최종 선발권은 황실의 최고 어른인 황태후 윤씨에게 일임하기로 하였다. 후궁 선발은 본디 내명부 소관이었기에 이 또한 따져 물을 수 없는 조치였다. 그렇게 황궁의 여관들을 대상으로 달포 동안 간택을 위한 시험이 진행되었고, 외모와 인품, 가문과 나이를 기준으로 초간택을 하고 예와 악, 시와 부를 시험하여 최종간택을 하였다.
황제와 대승상이 예상하였던 대로 압도적인 점수로 회령성 출신의 도채란이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귀비인 연향은 친히 나서 친족의 경사를 축하하였고, 내명부의 주인답게 의연한 태도로 도씨를 천6품 재인에 봉하고 후궁전 가운데 연국당을 하사하였다.
책봉의가 끝나고 연국당에 행차한 황제는 의례적인 축하의 말조차 없이 제 앞에 나봇이 엎드린 채란, 저의 두 번째 후궁인 재인 도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거운 가채를 머리에 얹고, 움직임조차 거추장스러울 만치 화사한 노의를 입고서도 엎드린 자세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녀를 향한 황제의 시선은 그저 냉막하기만 했다.
여인이 아니라 하여도 황실 암투의 무서움과 잔혹함을 황실에서 성장하여 머리가 굵은 황제가 어찌 모를 것인가. 기존 황궁 여관 중에서 후궁을 선발하겠다는 교지를 내린 이후, 황실에서는 일문의 처자나 서녀로 하여금 궁인의 신분을 바꿔치기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포착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일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루려 하지 않았다. 그 정도 농간조차 부리지 않고 순순히 어지를 따를 신료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도 하였거니와, 기가 등등한 뒷배를 지닌 후보들과 경쟁하여 스스로 후궁 자리를 움켜쥘 정도의 기량과 재주가 없이는, 채란이 연향을 위한 바람막이 역할을 하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정 신료들의 무람한 작태를 몽땄듯이, 채란을 지켜보았다. 황궁, 그것도 사교의 정점인 황후궁에서 공연히 내리 몇 년을 보낸 건 아닌 듯 채란은 아주 능수능란했다. 신분을 바꿔 들어온 귀족가의 철없는 영양들은 아예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아니하였고, 채란보다 오래 황궁에서 닳고 닳은 경험 많은 여관들의 심술을 피하고 적절히 그에 되갚아 주는 계교도 아주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라면 일거수일투족 따라붙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건만, 때론 보란 듯이 대범하게 움직이기도 하였다. 흡사 지켜보고 있는 이에게 저라는 아이를 훤히 드러내 보여주듯이.
시를 짓고, 악을 즐기고,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고, 춤을 추고 하는 사소한 재주만으로는 올라설 수 없는 간택 후궁의 자리를, 그렇게 채란은 움켜쥐었다. 채란은 대수협과 황제 본인이 첫눈에 간파하였듯이 실로 대범하고 잔혹하고 영리하며 간교하고, 인내심까지 뛰어난 계집이었다.
얼마나 긴 침묵이 흘렀을까. 태예의 황실 법도 상 신분이 낮은 자는 높은 자에게 감히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자세를 꼿꼿이 하고자 애를 쓰고 있으나, 어찌할 바 없이 머리 위의 무게 때문에 목이 뻐근하고 허리와 어깨가 결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제 갓 고작 황실 상궁보다 한 계급 높을 뿐인 재인에 임명된 주제에 만인지상인 황제의 허락 없이는 고개를 들 수도, 허리를 펼 수도 없는 채란이었다. 다른 도리가 없는 그녀로서는 이를 악물고 아픈 사지에 힘을 실어 의미를 알 수 없는 황제의 침묵을 버티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더 시간이 흐르고, 바닥을 짚은 손바닥마저 축축하게 젖어든 이후에야 비로소 벌 아닌 벌을 세우던 황제가 운을 떼었다.
“마침내 내 앞에 당도하였으니, 너는 너의 노림수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여길 것이나 짐은 지난날 기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너에게 아무것도 약조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니 재인은 지난 모든 나날과 마찬가지로 웃전인 황귀비를 잘 받들어 지킴으로써 내명부의 법도를 익히도록 하라.”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켜 연국당을 나섰다.
손끝조차 어루만져주지 아니하는 차디찬 행태가 채란에게 천 마디 이상으로 여실하게 일러주고 있었다. 그 무슨 수작을 벌이더라도 연향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렵사리 올라선 그 자리조차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간택 과정에서 그러하였듯, 황제도, 대승상도 앞으로도 계속 몰려들 연향의 경쟁자를 저를 앞세워 물리치기 위한 바람막이자 칼로 쓰기 위하여 저를 이 자리에 올렸다는 것을.
애당초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올라온 자리가 아니기에 채란은 그 점이 억울하지는 아니하였다. 차라리 황제가 바라는 것을 명확하게 일러주어 속이 시원할 따름이었다. 황제와 대승상 호번왕이 원하는 역할에 충실할 동안, 저에게는 힘이 있었다.
어차피 어루만져주지도 아니할 것이었다면 후궁 전에 길게 머물 필요도 없었을 것을, 황제는 첫날밤인 오늘 저의 처소에 충분히 길게 머물러 주었다. 그건 대승상 호번왕이 그러하듯이, 황제 또한 채란이 간택 과정에서 행하였던 것처럼 간교한 수작을 부려도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얼마든 눈감아 주고 거들어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채란은 몸을 일으켜 차게 미소했다. 그리고 처소의 나인을 불러들여 옷을 벗는 것을 거들라 명하였다. 나인의 도움으로 차림새가 가벼워진 채란은 여느 때 없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 처소의 유일한 지밀나인인 명아의 손을 그러잡아 이부자리로 이끌며 속삭였다.
“명아야. 내가 신선한 피가 좀 필요하단다. 기꺼이 도와주겠지?”
신분은 미천하여도 영특하고 행동이 재빠른 명아는 아름다운 상전의 뜻을 헤아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오른 팔뚝의 소매를 걷었다.
“마마님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깝지 아니한 제 마음 아시지요?”
“그럼, 우리 명아. 조금 따끔할 거야.”
예리한 날이 시퍼런 은장도가 나인의 하얀 살결을 긋고 지나가자, 선혈이 이부자리 위로 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봉 첫날부터 장한 성총을 입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궐 안팎에 퍼졌다. 성총이 대단하다는 풍문 그대로, 이듬해 재인 채란은 회임을 하였고 천 5품 미인으로 진봉 되었다.
-본 1부 황실의 꽃 완결, 본 2부 황제의 아들로 이어집니다.-
1부가 완결되었으니, 2부는 좀 쉬면서 비축분을 만들어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0화까지밖에 연재 못하는 줄 몰라서 목요일 연재분 이어 붙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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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29-30(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