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함’이라는 건
어릴 적 내 생활기록부에는 한 단어를 위한 전용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바로 '과묵함'이다.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생활기록부를 들고 달려온 나에게 엄마는 늘 '좋은 거야'라고 답했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윽고 질문 공격이 시작되면, 엄마는 음.. 하며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엄마가 찾은 단어는 ‘얌전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생활기록부를 읽을 수 있을 만큼 컸을 때, 나는 그 단어가 나의 껌딱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어느새 그 단어가 나라는 사람을 대표하고 있었다.
내가 만났던 담임 선생님들은 학기 초에 자기소개서를 나누어 주셨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이름, 성격,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등을 적어 내는 종이였다. 돌아보면 나는 망설임 없이 써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명확했으니까. 그런데 성격은? 지금 생각해 보니 언젠가부터 '차분함', '성실함', '과묵함' 따위를 내 성격으로 적어냈다. 이것도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면 가스라이팅이 아니었을까. 담임 선생님들이 쓰신 행특을 보면서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하고 세뇌당하는 것. 나는 그 말들을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늘 함께 붙어다니다 보면 싫은 구석이 하나는 보이는 법. 그건 나의 수식어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내가 얌전할 것을 강요받아 온 것은 아닐까.
착한 아이 증후군.
타인의 긍정적인 평가와 관심을 얻기 위해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억누르고 무조건 순응하려는 심리적 경향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이렇다. 우리 사회에서 '착한 어린이'는 가만히 앉아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아이이고, '나쁜 어린이'는 말대꾸하고 하라는 대로 안 하는 아이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착한 어린이에게 칭찬을, 나쁜 어린이에게 벌을 준다. 특히 학교라는 곳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을 획일화하려 노력했다.
나 또한 한 명의 '착한 어린이'였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화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괜스레 어른스러운 척을 했다. 그러다 칭찬을 한 번 들었고 그게 좋아서 조금 더 착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착한 어린이'로 소문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의 굴레에 빠졌다. 내 수식어가 따라붙은 것도 이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나 자신을 울타리 속에 가둬왔던 것 같다. 어릴 적 나는, 매번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희생했다. 그렇게 해서 타인의 관심과 신뢰를 얻었고. 그것으로 나의 불편을 보상했다. 놓고 보면 이게 정확히 착한 아이 증후군의 정의이다.
사람들은 나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제일 엇나가기 쉬운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겉보기엔 정언명령을 씹어먹은 것 같지만 그 속은 사실 억눌렸던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마치 시한폭탄 같은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착한 어른'이 된 나는, 그게 내 삶의 양식인 양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사회가 요구하는 '올바름'을 내면화한 것 같다. 동기야 어쨌든 간에, 비로소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 옳은 것을 행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착한 아이 증후군이 남긴 흉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