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의 이유
잊을만하면 나오는 금융권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포항 수협 여직원, 고객 예탁금 9억9000만원 빼돌려…경찰에 체포 - 뉴스1
이제는 관련된 기사들이 너무 자주 나와서 놀랍지도 않네요.

은행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기사가 멀지 않게 다가오는데, 매스컴에 등장하는 것 외에도 꽤나 많은 금융사고가 현장에서는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는 말)
솔직히 자금을 관리하는 기관에 종사하다 보면 'In my pocket'의 유혹은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제어해야 할 내부 통제 기능이 생각보다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금융기관에서 실적을 거양하는 곳은 프런트 부서, 즉 영업 일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 평시에는 이들의 입김이 경영진에게 강하게 다가옵니다.
'결국 당신들이 받는 성과급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한 것 아니냐!'는 주장에 미들과 백오피스에 있는 구성원들의 의견은 잘 먹히지 않는 것이죠.

결국 그렇게 프런트 입장을 대변해 주다 보면 이런 사고들이 하나 둘 터지기 마련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금융기관에 있는 내부통제 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능력입니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해당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영업 부서에서 좋은 실적을 올리지 못해서 방출당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모든 기관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적어도 제가 근무했던 은행에서는 저 실적자들이 내부통제부서나 준법 부서에 배정받는 일이 많았음)
이들은 왠지 모를 패배감에 젖어 있어요. 그러니 제대로 된 관리, 감시가 될 턱이 없죠.
뭐라도 해볼 생각이면 곧바로 프런트에서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네가 뭘 안다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에 대해 논리적으로 대처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그러니 결국 사고가 반복해서 터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은행, 25억원 규모 금융사고 발생···올해 네 번째 - 경향신문
돌이켜보니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이제까지 3번 정도 큰 금융사고를 경험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의 금융사고를 저지른 자들 모두 꽤나 영리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더 재밌는 것은 사고의 근원에는 그들의 영리함을 믿고 관리 없이 모든 걸 맡겨버린 무능한 리더들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제가 직접 경험했던 금융사고들입니다.
1. 위조된 지급보증서를 가지고 무위험 대출이라는 상대방의 말에 속아 100억 대 손실을 끼친 대리와 본부장.
2. 친인척을 동원해 사업자 대출을 자전거래해서 포르셰를 구입한 팀장과 그가 올리는 서류에 무책임하게 도장만 찍어댄 지점장.
3. 부동산 시행법인에게 무리한 대출을 해주고 분양권과 법인카드를 상납받은 직원과 그를 방치한 영업점 팀장.
이외에도 많지만 위 세 건이 제가 경험한 가장 기억에 남는 금융사고입니다.
'이런 것들이 왜 반복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결론은 하나로 모아지더군요.
결국 제대로 된 처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번 사례의 담당자는 면직되었지만 본부장은 정년을 채우고 명예퇴직금도 두둑이 받고 집에 갔습니다.
2번 사례의 지점장은 오히려 본부 핵심 부서의 팀장으로 발령이 났고 이후로 다시 지점장 발령을 받았죠.
3번 사례의 직원은 처벌받았지만 팀장은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물론 '나는 이 사기 거래의 핵심 가담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리더에게는 관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돈도 더 많이 받는 것이죠.
그런데 그 관리 책임에 대한 처벌이 우리나라 금융권에서는 너무 관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입니다.
생각해 보면 금융기관은 신뢰 하나로 먹고사는 기관입니다.
자기 돈 10%로 나머지 90%의 고객 돈을 굴릴 수 있는 곳이 흔하지는 않죠.
금융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더욱 커져서 이런 사고 기사를 안 보는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