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어요. 고운 모습으로요."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어둠의 긴 터널 끝에서 마그마를 부은 듯한 붉은 하늘을 본다. 안개가 나직이 내려앉은 하늘빛에 반사된 연분홍색 주차장을 지나며 시작되는 하루. 한 번도 똑같은 상황이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준비된 것은 오로지 최선을 다한다는 나의 자세일 뿐.
7호실 환자를 맡게 되었다.
고운 중년 여인이었다. 얼굴엔 엷은 화장기까지 돌고 있었다. 환자가 수술실로 옮겨 가기 전, 화장을 지울 것을 권유했지만 환자는 화장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수술할 부위는 가슴의 아래쪽, 폐에 있는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어서, 원하는 대로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수술실로 보내며, 그쪽 간호사에게 인계해 줬다. 환자가 화장 지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환자가 수술실로 간 후, 필요한 기구들과 모니터 등을 점검하며 왜 화장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궁금했다. 예정보다 수술은 일찍 끝났고, 환자는 안정된 상태로 중환자실로 돌아왔다.
한 시간쯤 후 환자는 서서히 마취에서 깨어났다. 돌아 눕히기도 하고, 기침을 시키면 따라 하기도 하고, 물도 마시고, 심호흡을 시키며 산소 포화도도 올리는 등,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저 화장 괜찮나요? 지워지지는 않았죠?"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직 남아 있어요. 그런데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을 안 지우는 거예요?"
7호실 환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그런데 이제 지워도 될 것 같아요. 혹시 뜨거운 물수건 하나 주실 수 있나요?"
나는 그녀의 요청대로 수건 하나를 꺼내 물에 적셨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뜻하게 만들어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뜨거운 물수건을 받아 든 환자가 얼굴의 화장기를 닦으며 이야기했다.
"혹, 수술하다가 죽게 되면 하늘나라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어요. 내가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남자 친구… 웃기죠? 이 나이에 무슨 남자 친구? 그 사람에겐 늘 고운 모습만 보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남자 친구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어요? 기다린다고 연락은 왔고요?"
수줍은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녀를 향해 난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가면 꼭 만날 수가 있을 것 같았어요. 내가 너무너무 좋아했거든요. 이혼한 지는 오래됐고, 혼자 사는 일이 편하고, 누굴 만나 또 어떤 관계로 엮인다는 것이 두려웠지요. 그런데 한 반년 전쯤 그 사람을 만난 거예요. 친구의 직장 동료인데, 셋이서 가끔 저녁을 먹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했어요. 몇 달 전부터는 급격히 가까워졌어요. 아니요. 내가 미친 듯이 그를 좋아하니까, 그 남자가 날 받아 준 거죠.
그런데 두 달 전 선착장에서 사고로 바다에 빠졌어요. 그리곤 영영 나를 떠났죠. 그저께가 그가 떠난 지 꼭 두 달이 되는 날이었어요. 노란 국화 한 송이 사서 선착장에 갔어요. 꽃을 바다에 던져 놓고, 파도에 밀리는 배들과 갈매기들을 바라보는데, 그와의 추억에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앞이 잘 안 보였고, 넘어졌어요. 팔꿈치가 매우 아파서 뼈가 다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응급실을 왔고 팔과 가슴 쪽의 X-ray와 MRI를 찍었는데, 엉뚱하게 폐 수술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응급으로요…. 폐에 종양이 있다고 해요.
그이를 만나러 가지 않았더라면 내 폐의 종양은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죠. 많이 진행되고 호흡이 문제가 될 땐, 이미 종양이 많이 커진 상태이겠지요. 그가 날 살리려고, 넘어지게 했고, 난 이렇게 수술을 받고 여기에 있네요. 그이는 이곳에 없는데..."
환자는 돌아눕게 도와 달라고 했다. 돌아누운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그녀가 우는 건 남자 친구를 만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그와의 추억이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그녀의 절절한 마음. 죽어서 만나도 예뻐 보이고 싶었던 천생 여자.
그녀에게 울지 말라는 말도 못 했고, 왜 우느냐는 우문도 던지지 못했다. 얼마나 보고 싶고, 얼마나 그리울까.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기억되는 시간. 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그와 함께했던 추억. 그곳에선 잘 있는지, 날 잊지는 않았는지, 편하긴 한 건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녀는 혼자 눈물 흘리는 것일까. 눈물의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아 등 돌리고 혼자 우는 그녀. 조용히 혼자 울게 두었다.
누구나 로맨틱한 사랑을 한 번은 꿈꿀 것이고, 자신들의 사랑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증거라고도 했다. 역경이 많은 사랑일수록 애틋하고 아프고 오래 기억이 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일은 오랫동안 추억이 되어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풍요로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첫사랑의 추억, 지워지지 않는 가슴속 문신으로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