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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n 20. 2024

8. 내게 글쓰기란 구겨진 하루를 잘 다려 걸어놓는 일


패착(敗着): 바둑에서, 그곳에 돌을 놓았기 때문에 패하게 된 악수(惡手).

글쓰기 수업에서 맨 앞자리에 앉은 건 패착이었다.


수업 첫째 날, 정시에 도착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이미 뒷자리는 빼곡하게 사람들로 차있었다. 강의실의 좌석은 마치 컵에 물을 부을 때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차오른다. 어쩔 수 없이 맨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가장 가까워서인지 글쓰기 수업 시작 전 강사가 나에게 물었다.

 

"책을 내고 싶으신 거예요?"

"아직 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막연한 생각이 구체적인 인물(작가)의 입에서 현실로 발화되었을 때의 아득함이란.

책 출판이 목적은 아니었다. 물론 글을 쓰다가 어느 정도의 분량이 된다면, 내용이 마음에 든다면, 소장할 겸 책으로 만들어 볼 수는 있겠지만,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가치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다.


책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며 읽는 이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했다.  전달하려는 가치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자의식 과잉, 감정 과잉, 생각 과잉인 글만 쓴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이윤영작가는 책이 되는 콘텐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인생의 굴곡이 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2. 유명한 사람들의 자기 이야기(셀럽, 인플루언서 등)

3.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4. 위 어느 곳에도 해당 없음


나는 어느 곳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인생의 굴곡에 대해 쓰려하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고, 유명보다는 무명이 편하고, 전문성이야말로 너무나도 전문적인 분들에게 배우는 입장이다. 그럼 무엇을 써야 할까?


"네가 말하고 싶은 요점이 뭐야?"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읽을 것과 볼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 구태여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을 표명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표현이 아닌 남의 표현입니다. 나의 감정과 생각이 아닌 타인의 감정과 생각입니다. 괜히 어설프고 서툴게 표현한 말과 글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다 보니, 표현하지 않고 '묻어가는 삶'도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가끔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것은, '나만의 표현을 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이윤영 『자기 표현력』


나에게 글쓰기란 구겨진 하루를 잘 다려 발광하는 모니터에 걸어놓는 일, 그리고 그것을 가끔 꺼내보는 일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몽연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구겨진 옷을 다리는 이유는 다시 그 옷을 입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구겨진 오늘을 다리는 이유는 내일을 조금 더 반듯하게 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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