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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 밤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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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l 16. 2024

여자친구 있어?

그게 왜 궁금한데.

사진: Unsplash의 Rafael Garcin


누가 말해도 해로운 말이 있습니다. 그 말들은 마음의 한 귀퉁이를 바스러뜨리고 어딘가에 얼룩처럼 배어듭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다른 누군가가 말할 때면 귓가의 속삭임처럼 부드럽기도 합니다.


20대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여자친구 있어?"였습니다. 만나는 이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이를 물어보셨죠. 그걸 왜 그렇게 궁금해하셨는지, 왜 꼭 하나같이 '여자친구'로 단정 지어 말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없다고 말하면 그들은 운명을 점지해 주는 신이 되려 하니, 저는 항상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이른 나이에 직장을 잡고, 사지가 멀쩡하니 그다음 수순은 결혼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며, 대한민국의 저조한 출산율을 극복하는데 일조하는 참된 시민이 되라는 의미였겠죠. 삶의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의 자녀는 낳아야 한다는 말이 마치 사족처럼 따라붙는 건 당연한 이치였고요. 조심스러운 척하며 묻는 말에 지금이라면, "그게 왜 궁금하시죠?"라고 도발적으로 되물었을 텐데 말이죠.


중학교 2학년(가오가 육체를 지배하던 시절), 저는 집에서 누구와도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저의 방은 마치 굴 같았죠. 학교가 끝나면 컴컴하고 눅눅한 굴 속에 들어가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적막한 방 안에서 라디오의 잡음마저 없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 라디오를 형광등처럼 켜 놓았습니다. 어두운 방안에 누워 라디오 진행자의 말이나 음악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같다고 느껴질 때면 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침묵과 그 침묵을 침범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하던 어느 날 오후, 잠시 한가해진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집 뒤 놀이터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그네에 앉아 앞뒤로 가만히 움직였고, 어머니는 웃으시며 나에게 다가와 '혹시 여자친구 있니?'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런 걸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줄 몰랐습니다. 제 기억으론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친구의 존재를 물어보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물음에 '없어'라는 한 마디가 그날 대화의 전부였지만, 그 물음이 오랫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누군가 나의 내밀한 부분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 준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쩌면 그런 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나의 내밀한 부분을 물어봐 주기를.


"여자친구 있어?"라는 말은 사회적 기대와 압박이 담겨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깊은 관심과 애정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맥락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느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 친구 있어?"라고 묻기 전, 물어볼 그에게 난 어떤 존재인지 자문해 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나에게 쌓인 온기만큼 그는 이미 서늘해졌을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뱉은 말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말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또 이 긴긴밤에 주책없이 씁니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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