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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l 24. 2024

여자의 얼굴로 바라본 전쟁. <피닉스>

https://www.youtube.com/watch?v=HdxYBGHcxSY

Speak low


1945년 6월 유대인 가수 넬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성형수술을 받는다.


의사: "어떻게 보이고 싶으세요? 환자분이 선택하시기 나름입니다."

넬리: "전 제 얼굴을 원해요."

의사: "그건 어렵습니다."

넬리: "왜요?"

의사: "어차피 다시 똑같이 될 수 없기도 하고, 새 얼굴이란 게 좋을 때도 있거든요."


넬리의 훼손된 얼굴은 전쟁의 상흔과도 일치한다.


레네(넬리의 친구): "병원에서 재건하려면 사진이 필요하댔어. 미안 말을 잘못했어, 의사가 재건 이래서 나도 그냥. 복원이라는 말이 낫겠지?"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영화 <피닉스>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상처와 그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넬리의 외모와 감정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훼손된 얼굴은 예전의 얼굴로 복원될 수 없듯이, 전후 독일을 그 이전의 독일처럼 재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모든 것을 숨기고 터부시 하는 분위기,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 시대정신 앞에 개인의 의지 따위는 깨지기 쉬운 유리잔 같은 것이었다는 자기 위안, 특히 독일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나 네오나치들이 나치시대의 만행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감독은 주의깊게 바라보는 것 같다. 


성형수술 후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 조니를 찾아 피닉스라는 바에 가지만, 바뀐 외모 때문에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나치정권에 빼앗긴 넬리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넬리에게 자신의 부인(넬리) 역할을 해주면 유산을 받아 일정 부분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한다. 넬리는 자신을 숨기고 조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넬리를 구해준 레네는 자신과 함께 이스라엘로 가기로 한 넬리가 조니에게 점점 빠져들자, 그가 넬리의 은신처를 나치정권에 밀고한 배신자이고, 밀고 전에 이혼절차를 밟은 사실을 알려주고 권총으로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다.


레네: "내가 말했지,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지만 나아갈 길도 없더라."


레네는 아우슈비츠를 잊을 수 없었다. 잊고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을 점점 잊어가는 넬리를 보며 끝없이 절망했을 것이다. 레네와 넬리가 함께 식사했던 날 <Speak low>라는 곡이 레코드에서 흘러나왔다.



조니의 계획이 거의 완성되는 순간, 넬리는 조니와 친구들을 피아노 앞으로 부른다. 피아니스트인 조니에게 <Speak low> 연주를 부탁하고 노래를 부른다. 결국 영화 엔딩에서 넬리가 부르는 노래는 아우슈비츠를 잊어버린 세계,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자 레네를 위한 진혼곡이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역사인식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을 함께 영화 속에 배치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두 가지는 <Speak low>라는 노래를 통해 소름 끼치게 들어맞는다.


사랑을 원하는 이유는 어쩌면 사랑이 짧고, 쉽게 변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랑의 대상은 대체되고,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히기도 한다. 기한이 짧고 변한다는 사실이 곧 가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쉬움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커다란 매력일 수 있다. 매 순간 변화하고 짧은 생애를 사는 우리는 우리와 닮음꼴인 사랑에 자주 빠져버린다. 그러나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자신을 증명할 유일한 무엇인가를 상실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랑은 자기 동일성의 유지가 아니라 자신이 타자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자유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넬리는 사랑을 통해, 사랑의 포기를 통해 조니의 아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된다.


일어난 일 이후에는, 그것이 거대한 전쟁이든 개인의 사랑이든, 우리가 전과 같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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