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회쇠크광장에서
시절(時節)이란 사람의 일생을 여럿으로 구분한 어느 한 동안을 말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회쇠크 광장 가운데에는 36미터(아파트 15층)에 달하는 탑이 있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유지보수를 위해 가브리엘 동상을 지상으로 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아마 그곳에서 가브리엘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보수 기간이 몇 년이라고 하니,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철거 중인 가브리엘 동상을 볼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온전한 광장과 가브리엘을 보지 못한 것에 아쉬워해야 할지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하지만 커다란 크레인에 묶여 내려오는 가브리엘을 보았을 때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가 우러러보는 곳에,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존재가, 인간의 도움을 받아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줄 몇 개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전지전능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신성은 바래지 않았다. 전지전능함이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신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아니라, 그 누구를 언제 만났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와 한 시절을 공유할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 순간만을 골라야 한다면 어느 순간을 고를 것인가? 나는 항상 누군가와 끝나는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 가브리엘 천사장이 처음 탑에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의 경외심이 탑 꼭대기를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땅으로 내려오는 이 순간, 그런 시선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익숙한 탓인지 관광객 이외에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철거공들의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에 의지한 채 천천히 내려오는 이 순간을 그래서 나는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신이지만 인간적인, 완전함이 도움의 손길에 온전히 몸을 맡긴 이 순간을.
누군가와 헤어질 때면 슬프다. 다시 만날 기약 따윈 하지 않는다. 처음 보았던 모습이 그였는지, 끝나는 순간의 얼굴이 그인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끝나는 순간이 어쩌면 그의 솔직한 모습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냉정함, 무관심, 분노, 체념, 이러한 감정들이 '어느 한 동안'의 끝을 묶고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을까? 아니면 끝은 원래 이런 모습이었을까?
失期는 때를 놓치는 것이고, 失戀은 인연을 놓친 것이며, 失望은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실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슬프고 화가 나기도 한다. 실망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 비난으로 들린 까닭이다. '실망했어'라는 말은 이젠 '너에게 기대하지 않아'라는 말로 들린다. 이제 '너는 아무런 희망도, 가능성도 없는, 더 나아가 투명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산다. 하지만 이제는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는 언명이 '실망'이라는 말에 담겨 있다. 그러나 실망이란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타인에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품어야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기대에 어긋나서 마음이 상하는 사람은 나고, 기대를 하며 부담을 준 사람도 나이며, 기대하고 그 마음을 잃어버린, 놓아버린 사람도 나일뿐이다. 실망에서 올라와야 하는 이도 나고, 실망이 절망이 아님을 말해야 하는 이도 나다.
너는 아무 상관없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너의 삶을 변화시킬 필요도 없고, 나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실망은 너에게 준 나의 마음이 잠시 길을 잃어버린 것뿐이다. 실망은 너의 마음이 너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음을 알린 것뿐이다.
잃어버린 마음이 있다는 것은 잃어버리기 전의 마음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그 존재했던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실망은 아프기 전에 솔직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