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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Sep 05. 2024

더 이상 왕자는 필요 없어.

대성당의 가고일.

성 비투스 대성당


대성당의 가고일


올려다보고 있으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집니다.

나약했던 어느 시절이 곧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 그만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외면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이곳에서만큼은 그렇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위태로운 듯 하늘에 닿아있는 첨탑과 정교한 조각들을 보고 있노라면 불쑥 튀어나와 있는 흉측한 괴물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내가 잘못 봤나'라며 다시 들여다봐도 괴물의 형체를 한 조각이 대성당 곳곳에 튀어나와 있습니다. 이들을 '가고일'이라 부릅니다. 프랑스어로 '목구멍'을 뜻하는 gargouille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프랑스 전설에 의하면, 루앙 지역에 용의 모습을 한 가고일이라는 괴물이 살았습니다. 루앙의 대주교인 성 로마누스가 십자가로 가고일을 사로잡았으며, 사로잡힌 가고일은 마을로 끌려와 화형에 처해졌지만, 목과 머리는 불을 뿜는 부위였기에 타지 않고 멀쩡했다고 합니다. 이후 새로 지어진 성당에 악령을 쫓기 위해 괴물의 머리를 달아놓게 됩니다. 과거에는 대성당 외벽(석회암은 다른 암석에 비해 물에 대한 용해성이 높음)을 보호하기 위한 배수로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배수로를 벽면을 따라 설치하기 때문에 배수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대비되는 악을 숨기지 않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무언가를 감추고 꽁꽁 싸매려는 자신의 모습과 정반대이기 때문이었을까요. 내 안의 가고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파올로 우첼로, 1470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성인들의 전기를 모아놓은 『황금전설』에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일화가 나옵니다.

카파도키아의 왕 세르비오스(Selbios)의 성이 있는 라시아(Lasia) 부근 호수에 독기를 뿜어내며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용이 있었습니다. 용은 매일 두 마리의 양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고, 제물이 없을 땐 독기를 내뿜으며 사람들을 해쳤습니다. 양이 다 떨어지자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 시작했지만, 사람 수도 금세 줄어들며 왕의 외동딸을 용에게 제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침 게오르기우스가 이곳을 지나가다 이야기를 듣고, 공주가 제물이 되려는 찰나 용 앞에 나타납니다. 용이 독을 뿜어내기 위하여 입을 벌린 순간 긴 창을 입속에 찔러 용을 물리칩니다. 게오르기우스는 공주의 허리띠로 용을 묶어 도시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앞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을 무찌르고 나면 개종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에 이교를 믿던 마을 주민들은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주를 위협하는 용에 맞서기 위하여 기사나 왕자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용은 공주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입니다. 달래기에는 너무나 흉포하고, 싸우기에는 압도적인 모습에 당장이라도 굴속으로 숨어들거나, 뒤돌아 도망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용은 너무나 빠르고 힘이 세서 도망치는 것이 아무 소용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지 않을 기사나 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사가 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선택은 주체적인 결단이 아니라 상황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내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물며 전설이 아닌 내 안의 가고일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도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용에게 맞설 수 있는 기사는 오직 자신밖에 없습니다. 기사나 왕자는 공주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기사 혹은 왕자는 자신인 거죠. 뒷걸음질 치며 도망갈지, 용을 묶어 도시로 데려갈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면, 기사나 왕자 따윈 바라지 말고 맞설 수밖에 없어요. 돈키호테를 상상하거나, 궁지에 몰린 쥐를 떠올려도 괜찮습니다.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그것일 테니까요.


대성당 외벽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가고일이 나인 것 같아서,

한편으론 한 몸같이 보였던 대성당과 가고일이 왕자나 기사가 필요 없는 공주로 보여서 위로가 됩니다.

끊임없이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결국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알기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나의 가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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