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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11. 2024

위로가 필요할 때...
나의 사랑을 쓰십시오

치유의 묘약은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속에

내 마음을 토로하는 것.

그것은 배우자를 잃은 슬픔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인간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는 묘약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면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누군가, 즉 내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상대로서의 누군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럴 때 대안이 있으니, 바로 글쓰기입니다.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처음엔 힘들 수 있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에게는 글쓰기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경우, 내 형제 자매, 내 친구, 어쩌면 내 자식 또는 부모 등 가까운 사람들이 잘 들어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만도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생면부지의 사람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 상대가 전문 카운슬러이기는 하지만, 일면식도 없었던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처음 만난 사람이었기에 더 쉽게 모든 것을 열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허구한 날 그 사람을 붙들고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온 후, 하루 이틀 사흘…날짜가 지나가면 가족 친지 조문객 등 모두 떠나가고 결국은 혼자 남게 됩니다. 그 사람들도 자기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하므로 언제까지나 있을 수도 없고, 또 붙들어둘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붙들어둔 들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슬픔은, 특히 상실 초기에는, 한시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이야기하기를 통해 한번 비워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금방 다시 마음과 정신을 채워버립니다. 그 약효가 몇 날 며칠씩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 아무리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허구한 날 붙들고 들어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혼자 하는 과정이므로 언제든지 내가 필요할 때 모든 것을 쏟아내어 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노트를 하나 준비합니다.

컴퓨터에 익숙하다면 추모 사이트나 블로그를 하나 개설하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공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같이 나눌 수 있다면 제한적으로 또는 완전히 공개한다고 해서 안될 것도 없습니다.

노트를 준비했다면 펜을 잡고 손으로 글을 쓰면 되고, 추모 사이트나 블로그를 개설하면 거기에 쓰면 됩니다. 저는 노트에 쓰고, 스마트폰에 쓰고, 추모사이트에 쓰고… 그냥 생각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썼습니다. 

이렇게 쓸 수 있는 공간, 도구가 확보되었으면, 그 다음으로는 쓰는 방식, 즉 형식이 문제입니다.

그 답은 아무렇게나 원하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즉 일기를 써도 되고, 편지를 써도 되고, 수필 또는 시를 써도 됩니다. 그냥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적당한 형식을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공에 발표할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읽을 것도 아니며, 무슨 공모전에 응모하는 것도 아닌 만큼, 솔직하게,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나는 글을 써 본 적이 없어….”


이렇게 절망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기록하면 됩니다.

처음엔 단 한 줄로 시작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그 사람이 생각난다. 보고싶다.”


이 정도로도 훌륭합니다.


“점심 때 만사가 귀찮아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끓여준 라면이 생각났다. 첫 술에 눈물이 쏟아져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아, 너무 보고싶다.”


이런 식으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펜이 가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쓰다 보면 점점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쉬워지고, 그래서 내용도 더 풍성해집니다. 풍성하다는 것은 글 내용이 좋아진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을 더 많이 솔직하게 털어내 놓는다는 뜻입니다.


글은 말과 달리 뚜렷하게, 물리적인 존재로 남게 됩니다. 이 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의식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쓰는 추모의 글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다 보면 누군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글 자체를 의식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내가 나를 속인다’고 표현합니다. 즉 누군가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측면도 있지만, 스스로도 감정이나 글의 내용을 꾸미는 것이지요.

아무리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불편한 것, 창피한 것, 좋지 않을 것 같은 내용 등은 숨기고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솔직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토로하지 못합니다.

그냥 내 마음을 그대로 쏟아놓아야 합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좀더 고상하게 슬픔을 표현하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본능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 마저도, 즉 ‘스스로 속이는 것’ 마저도 의식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다만 그때그때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기만 하면 됩니다. 100% 솔직하지 못하더라도, 의도적으로 꾸며서 쓰지만 않으면 됩니다.

때로 그 사람이 못 견디게 보고싶은 밤, 그 마음을 토로하는 글을 쓰고, 또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쓰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은 나날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매번 똑 같은 말을 쓰는 경우도 있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냥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나의 슬픔을, 나의 고통을 토로하듯이, 또는 하늘나라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 속으로 나누는 대화를 기록하는 것처럼 글로 쓰는 것입니다.

글이 남아서 어떤 성격으로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길이 보존해서 나중에 보고 또 보고 할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쓰는 행위 그 자체가 힐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종이나 노트, 또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은 언제 어디서나 싫증내지 않고 귀 기울여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치유의 묘약은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속에, 내 마음에, 내 혀와 손 끝에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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