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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16. 2024

슬픔은 내게 이렇게 답하였다

모든 원망을 잠재운 단 한마디는... 

상실은 끝없는 물음을 불러옵니다.

그 물음에 답이 있을까요?

저는 그 답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누구나 슬픔에 몸부림치면서 묻습니다.

왜?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 왜, 나는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가? 왜,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는가?

그 물음의 대상은 실체가 없는 존재일 수도 있고, 각 개인의 믿음에 따라 어떤 신이나 절대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물음에 누군가 분명하게 답을 해 준다면 슬픔을 가눌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런 물음에 분명한 답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슬픔이란 어쩌면 이런 물음의 연속이고, 그 물음은 결국은 대상을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에게 풀어놓은 원망일 것입니다.

그 원망 속에 슬픔을 실어 마구 내던지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원망이, 그 슬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라도 풀어놓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슬픔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터져버리지 않겠습니까?


종교를,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모든 일을 하소연합니다. 창조주이며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간절한 소원을 이뤄 주십사고 비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주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일 뿐이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대화’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소연’이란 표현을 쓴 것입니다.

하소연이므로 때로는 원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잃은 후 나의 기도는 어떤 것을 이루어 달라, 또는 어떤 것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보다는 하소연, 보다 과격하게는, 원망이 많았습니다.


“왜 나에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가셨나요?

왜 내가 이런 상실을 겪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그 사람은 왜 일찍 죽어야 하나요?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많은 불만도 터뜨립니다.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무슨 잘못을 했나요?

이렇게 벌을 받아야 하나요?

최대한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생활도 남들 못지 않게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불행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까?”


불만이 끝이 없고, 원망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란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존재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은 왜 존재하는 것인지… 한 마디로 평생을 지켜왔던 신앙 자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뒤죽박죽인 상태로 머리 속은 온통 흐트러져버립니다.

아무리 신앙이란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그에 따르는 삶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현세의 삶, 지금 나에게 덮친 불행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현세의 삶이 무의미하다면, 현세의 행복이 하찮은 것이라면, 그래서 오로지 영원한 행복이 중요하다면 애당초 현세의 삶이 주어질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세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를 보고 평가한 다음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주신다? 전능하신 절대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굳이 그렇게 하셔야 합니까?”


이런 불경스러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것은 무슨 논리나 의미를 지닌 사유가 아니라, 그냥 슬픔 속에서 마구잡이로 내지르는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아프고, 영혼은 그렇게 병들어가고, 육신도 그에 따라 고통 속에 쇠잔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은 의문, 불평, 원망이 계속되었고, 그 답은 없었습니다. 모든 답은 성경에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성경을 읽었지만,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러니 거기에서 무슨 답을 찾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그 답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너 그동안 행복하지 않았었니?”


마구 원망을 쏟아내던 나에게는 어떤 의미서는 ‘벽력’같은 한마디였습니다.

네가 아내와 함께 했던 그 긴 세월동안 너는 얼마나 행복 하였느냐? 그런데 그런 행복을 준 그 길고 깊고 넓은 은혜는 생각지 않고 지금 눈앞에 닥친 사별의 슬픔만 원망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단 한마디 반문으로 명쾌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응답이 그냥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깨달음인지, 상상 속에서 들린 것처럼 느껴진 것인지, 아니면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다른 현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때 나의 느낌으로는 분명히 사람의 언어로 똑똑하게 귀에 들렸습니다.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을 정도였으니까요.

말문이 탁 막혔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우리는 처음 만난 날 서로 사랑에 빠져버렸고, 그로부터 긴 세월을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살았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애인’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10배는 더 당신을 사랑해”


이렇게 서로 더 사랑한다고 토닥거렸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내게는 오직 그녀 한 사람만 있으면 다른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때론 싸우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꽤 오래 냉전이 계속되기도 했지요.

그러나 함께한 전체 기간은 그야말로 행복으로 점철돼 있었고, 사랑이 넘쳐 흐르는 세월이었습니다.


“너 그동안 행복하지 않았었니?”


이 한 마디 반문에 어떤 말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불평과 원망을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고, 원망이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꼬리를 무는 “왜?”라는 의문은 더 이상 되풀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라는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아닐지 몰라도, 그런 의문을 제기할 근거는 없애 버린 셈이니까요.

물론 왜 그 행복을 더 지속하게 해주시지 않으셨냐고 원망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 이야말로 ‘배은망덕’아니겠습니까?

슬픔이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슬픔만이 아니라 행복했던 기억의 기쁨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극복’이 아닐까요?

슬픔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되는 것.

그것이 애도의 마지막 단계, 아니 최고의 단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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