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기독교, 두 세계의 공존 400년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문학과지성사/2005
『발칸의 역사』/마크 마조워/을유문화사/2021(2편)
『부서진 사월』/이스마일 카다레/문학동네/2022(2편)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열린책들/2009(2편)
Ⅰ
발칸 맛보기… 루마니아에서 순대를
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 것은 꽤나 힘겨운 여정이었다.(제13, 14화 「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다 1, 2」) 이제 발걸음을 돌려 이슬람세계의 변방으로 나가보려 한다. 이슬람과 유럽이 만나 ‘섞였고’, 지금은 그 뒤섞인 부분을 정리하느라고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곳, 수세기 동안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발칸 지역이다.
20세기말 최대 격변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는 루마니아였을 것이다. 그런 격동기에 그 격동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출발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다. 루마니아는 독재자 차우세스쿠 부부가 처형당하고 난 다음, 새로운 체제가 자리잡지 못한 상태에서 전국이 어수선할 때였다. 부다페스트발 부쿠레슈티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그러나 탑승 수속은 없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결항이라는 것이다. 그냥 운항이 불가능하며,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다는 설명뿐이다.
안 뜨는 비행기를 탈 수도 없고, 계획된 일정을 취소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육로로 가는 수밖에 없다. 차를 수배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티미쇼아라. 차우셰스쿠 정권을 무너뜨린 전국적인 시위에 불을 붙인 곳이다. 아니면 내처 수도 부쿠레슈티까지 가도 좋다. 그러나 정정이 불안한 나라를 가겠다는 운전자는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오라데아까지는 가겠다는 기사가 나타났다. 오케이. 오라데아든 티미쇼아라든 일단 루마니아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시작부터 꼬인 여행이 순탄할 리 없었다. 오라데아까지는 잘 갔다. 저녁 늦게 찾아든 호텔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우선 출입문부터 시골 농가 보일러실처럼 엉성한 알루미늄 문짝인 데다 침대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객실은 난방이 제대로 안 되어 썰렁했다.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가 넘었던 것 같다. 점심도 못 먹었으니 배가 고팠다.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더니 손님은 없고, 웨이터는 식사는 안된다면서 달러화가 있으면 환전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렇게 달러 환전을 조건으로 식사를 주문했다. 아니 주문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그냥 주는 대로 먹는 것이다. 스테이크와 빵이 나왔다. 음료는 그냥 차가운 수돗물. 그런데 이 빌어먹을 스테이크는 아무리 씹어도 구두 가죽인양 그대로 입안에서 맴돌기만 한다. 조금씩 잘라서 씹다 지쳐서 조금 더 잘라 입에 넣고…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니까 삼키지 못한 고기가 입안 가득이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육수’만 빨아먹다 말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프런트에 차를 불러달라고 했다. 부쿠레슈티까지. 프런트에 계속 재촉을 해도 오고 있다는 대답뿐 7시에 부른 차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짜증을 내니까 기름 넣으러 갔으니 곧 올 거라며 조금만 더 참아달란다. 결국 운전자가 나타난 것은 10시가 넘어서였다. 그런데 운전기사 이 친구는 또 자기 집에 들렀다 가야 된다고 한다. 잠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루마니아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일반 가정집을 들여다볼 좋은 기회였다. 집에 들른 이유는 먹을 것을 싸 가려는 것이었다. 집은 비좁았지만, 꽤 규모가 있어 아기자기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식료품이 천정까지 가득 쌓여 있는, 한 평 정도 되어 보이는 다용도실이었다. 그 이유도 곧 알게 된다.
그렇게 먹을 것을 잔뜩 싸 들고, 차도 한잔 얻어 마시고 드디어 부쿠레슈티를 향해 출발했다. 거리는 대략 600km. 출발한 것이 11시였으니 잘하면 부쿠레슈티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길은 험난했다. 얼마 가지 않아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야 했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히터를 틀었는데도 차내는 추워서 모포를 다리에 감고 덜덜 떨어야 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는데도 고속도로는커녕, 깊은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중간에 휴게소 같은 곳을 몇 군데 들렸지만,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조리 품절이라는 것이다.
결국 휴게소 한 곳에서 쉬면서 운전기사가 싸 온 음식을 얻어먹게 되었다. 메뉴는 순대와 딱딱한 빵. 거기에 맹물이다. 냄새를 맡았는지 개 네댓 마리가 몰려와서 주변을 맴돈다. 아무튼 집에까지 가서 먹을 것을 싸 온 녀석이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쫄쫄 굶었을 테니…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 고속도로란 것은 부쿠레슈티 거의 다 와서 한 30~40km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다. 예약해 두었던 호텔 프런트에서는 체크인 시간에 안 와서 예약이 취소되었다면서도, 방을 내주었다.
이 여행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동구 공산권 붕괴 당시 루마니아, 나아가서는 전체 동구권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기 때문이다. 우선 자동차 기름 문제다. 공산 정부 말기에는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유통망이 붕괴되었다. 그래서 생필품이나 식료품이 없어 상점마다 줄을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라데아에서 차를 불렀을 때 오는데 3시간이나 걸렸던 것은 주유소에서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해명한 것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 그랬으면 도중에 주유하느라 서너 시간은 더 지체했을 것이다. 실제 우리 차의 운전기사는 예비 기름통까지 가득 채워와서 도중에 기름을 보충하기도 했다. 루마니아는 자급자족까지는 안되었지만, 그래도 산유국이었다. 그런데 주유소에는 차량 수백 대가 줄을 서 있고, 그중에는 기다리다 기름이 완전히 떨어져서 밀고 가는 차도 여러 대였다.
이런 유통망 붕괴는 기사의 집 다용도실에 식료품이 가득 쌓여 있었던 이유도 설명해 준다. 그것은 그 당시 시민들의 생존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가게에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살 수 있을 만큼 사서 집에 쟁여둔다. 즉 쇼핑은 필요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가게 재고에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빈 쇼핑백과 가진 현금을 모두 들고 다니고, 상점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으면, 무엇을 파는지 모르면서 무조건 줄을 섰다.
먹을 것을 싸 들고 다는 것도 같은 이유다. 휴게소에 음식을 파는 곳이 없었다고 했다. 이는 수도인 부쿠레슈티 시내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묵었던 곳은 인터콘티넨탈 호텔. 부쿠레슈티 중심가의 최고급 호텔에 속하는 곳이었다. 당시 루마니아에 급하게 개설된 한국 임시 대사관도 그 호텔에 있었고, 대사는 그 호텔 레지던스에 살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기자들도 대다수가 묵고 있어서 프레스센터를 방불케 하기도 했다. 그런 곳임에도 불구하고 호텔 레스토랑 입구에는 “저희는 호텔 투숙객 여러분 모두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없사오니 꼭 미리 예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처음 식사하러 갔을 때 안내문을 못 보고, 사람들이 식사와 함께 별도의 박스를 받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날 시내 나갔다가 점심을 굶은 다음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시내 식당에는 음식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호텔 레스토랑에서 전날 예약해서 도시락을 구매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오라데아에서 끝까지 씹어 삼키지 못했던 저녁의 그 스테이크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는 여행길은 고행길만은 아니었다. 인상 깊은 장면도 많았다. 그중 하나는 시골 마을 풍경이다. 슬라브 적인 느낌에 튀르키예 풍이 섞인 독특한 정경이 차를 세우고 머물다 가고 싶은 충동마저 불러일으켰다. 정교회 건물이 눈에 띄었고, 이슬람 모스크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뭔가 달랐다. 루마니아에는 무슬림 비중이 매우 낮지만, 시골 마을 풍경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오늘날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는 길은 멋진 관광 코스다)
또 하나는 양치기였다.
깊은 산중, 캄캄한 밤 멀리 작은 불빛이 흔들린다. 아주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신비한 느낌까지 주었다. 먼 거리에서 작은 불빛이라면 가까워 올수록 커져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마침내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양치기가 들고 있는 작은 회중전등의 불빛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모피 외투에 모자까지 눌러쓴 양치기의 작은 플래시 불빛을 따라 수백인지 수천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양 떼가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발칸 지역의 양치기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존재다. 그래서 그 모습이 마치 중요한 발칸 역사의 한 장면처럼 뇌리에 박혔다.
Ⅱ
“직업은 산적, 취미는 암살”?
루마니아는 지도상으로 볼 때는 발칸 반도 북쪽에 치우쳐 발칸 국가라 하기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종과 언어도 독특하다. 루마니아인들의 발음은 ‘로무니야’에 가까웠다. ‘로마인의 나라’라는 뜻이다. 로마 군단이 들어와 주둔하면서 다키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루마니아인들은 이들 로마인의 후예라는 것이다. 역사는, 로마 군단은 철수했지만, 정착민으로 남은 이들이 있었고, 이들과 훗날 이곳으로 이주한 슬라브인 등 다양한 민족이 섞여 오늘날 루마니아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아무튼 고유의 언어를 유지한 것을 보면 최소한 로마인의 후예로서의 정체성은 간직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루마니아어는 주변국가들은 다 슬라브어권인데, 유일하게 인도유럽어족의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는 오랜 세월, 특히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발칸 반도 여러 나라 또는 민족과 많은 경험을 공유했고, 그래서 공통점도 많다. 그러니 발칸 국가로 분류해도 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마니아에서 받은 인상과 느낌으로 “발칸의 공기를 마셔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이다.
‘발칸’ 하면 제일 먼저 어떤 느낌이 드는가? 대부분 ‘폭력적’이란 인상이 강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의 화약고’라 하지 않는가? 당장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이 발칸 반도의 사라예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소련 동구권이 붕괴된 후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얼룩진 곳도 이곳이다. 유고 연방이 붕괴되면서 세르비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 격렬한 내전으로 ‘인종청소’라고 할 정도로 대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사실 이미 19세기말 20세기 초 오스만 세력이 물러나고, 이 지역이 다시 ‘유럽’이 되었을 때, 서유럽 여행가나 역사가들 중에는 발칸 사람들에 대해 ‘직업은 산적, 취미는 암살’이라고 극언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황태자 암살사건이 일어났으니, 그런 세평은 그대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20세기말에 벌어진 내전과 인종청소는 그런 인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실제 발칸 사람들은 거칠고 폭력적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폭력적으로 만들었을까? 나도 루마니아에 갔을 때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선입견이 있으니, 당연히 그 사람들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루마니아에는 드라큘라가 있지 않은가?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지역의 왈라키아공국 군주인 블라드 3세에서 비롯된 캐릭터다. 그는 ‘말뚝형’으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말뚝형’이란 처형한 시신을 말뚝에 꿰어 세워놓는 것을 말한다. 블라드 3세가 이를 활용해 오스만 군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 스토리는 이렇다. 1462년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메흐메트 2세가 누군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린 인물이다. 약소국인 왈라키아가 술탄을 막아내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블라드 3세는 기상천외한 전술을 쓴다. 오스만 군 포로들을 처형해 말뚝형에 처하고, 이 말뚝 수천 개를 오스만 군 진격로에 세워 ‘숲’을 만들었다. 이것을 보고 기겁을 한 오스만 군은 철수해 버렸다.
이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일까? 사실이다. 다만 과장은 섞였다. 전해지기는 말뚝형을 당한 오스만 군 병사가 2만 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1/10도 안되었고, 오스만 군이 일시 철수했지만, 결국 왈라키아는 정복당했다. 그러나 이런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을까? 왈라키아는 다른 발칸 지역처럼 오스만의 직접 지배는 받지 않고 속국으로 명목상의 독립은 유지했다. 그러므로 서사의 뼈대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적어도 허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드라큘라의 전설은 이런 사실이 바탕이 되어 탄생한 것이다. 다만 현재 유명 관광지가 된 드라큘라성, 즉 브란 성은 실제 블라드 3세가 살면서 나라를 다스린 곳이 아니고, 드라큘라 전설을 이용해 조성된 관광 시설이다. 그가 실제 머물렀던 산악 요새 포이아나리 성은 현재 거의 폐허 상태라고 한다. 또 왈라키아의 실질적인 통치 중심지였던 곳은 타르고비슈테 궁전이다.
아무튼 발칸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까지 ‘학을 떼게’ 만들었으니 대단한 전투민족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은 원래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 자체가 과장된 오해일까?
Ⅲ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발칸 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가 500년 이상 공존해 온 역사적 경험을 지닌 가진 지역이다.
발칸 반도는 아드리아해를 두고 이탈리아와 마주 보고 있는 반도다. 지도상으로 그 지형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짙은 황토색 역삼각형으로 보이는 지역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등 옛 유고슬라비아연방 국가들, 그리고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이 있고, 반도 남쪽 끝은 그리스다. 지도 오른쪽 윗부분, 즉 동북부에 녹색으로 흐려진 황토색 부분이 루마니아다. 지도가 명암으로 구분이 된 것은 밝은 쪽이 발칸반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루마니아는 순수 지리적 분류에서는 발칸 반도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발칸반도는 지도에서 보듯이 험준한 산지로 가득 차 있다. 루마니아 중심부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카르파티아 산맥이고, 그 아래 둥그스름한 호를 그리면서 가로로 놓여 있는 것이 발칸 산맥이다. 이런 험준한 산악지형이 왕래를 가로막아 역사적, 문화적으로 서부나 중부 유럽과 단절되는 결과를 빚었다.
발칸반도 북서쪽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자리 잡고 있고, 동쪽으로는 흑해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튀르키예 조지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과 마주 본다. 이런 지리적 위치는 로마와 비잔틴에서 오스만 제국,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러시아제국 등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역사에 부대끼며 살아온 지역임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가 만나 오랜 시간 충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존해 온 지역이란 뜻이다. 이런 지역은 전 세계에서 발칸이 유일하다. 이슬람의 지배는 스페인이 훨씬 오래 받았지만, 스페인은 이른바 ‘레콩기스타’를 통해 자력으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세계를 회복했고, 이슬람의 유산은 그로써 단절되었다. 반대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의 정복으로 기독교는 소수 종파로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발칸 지역은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스만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독교가, 불평등 가운데서도, 공존했고, 많은 발칸 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해 제국의 행정·군사 엘리트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다층적 구조를 유지했다.
이런 발칸 지역의 특성은 이곳에 이중성을 낳았다.
첫째는 문화적 지체 현상이다. 서유럽의 르네상스나 산업혁명 같은 혁신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이지만, 지리적 단절로 인해 이곳에 전파되지 않았다. 그래서 낙후된 지역으로 남았고, 유럽 속의 ‘비유럽’이라는 모순된 위치로 남게 되었다.
둘째는 ‘저항’의 전통과 공간이다. 늘 외세 지배를 견뎌야 하고, 따라서 적응과 저항의 양면성을 지니게 된다. 험준한 산악지형은 저항의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하이두크’의 전통이 뿌리 깊다. ‘하이두크’란 산적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저항군의 산악 게릴라, 모빈후드나 임꺽정 같은 의적, 때로는 그냥 흉포한 산적 등 모든 가능한 성격과 형태를 띠었다. 농민이 착취를 피해 산으로 도망치면, 양치기가 되고, 양치기는 상황에 따라 하이두크가 되고, 그들이 다시 내려와 농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만난 양치기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한 존재라고 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발칸 국가들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지는 오늘날 매력적인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그렇다면 발칸 지역은 이제 ‘유럽의 화약고’란 오명을 벗어던진 것일까? 외형상으로는 분쟁과 갈등은 봉합되고 화해와 통합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민족 종교 정치성향 등의 갈등이 해소된 것도 아니다. 계속해서 지금처럼 편안하고 안전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지만,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타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복잡한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밑도 끝도 없다. 이미 서론이 너무 장황하고 길어졌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경계선에서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오늘날 일어나는 일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보스니아로 떠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런 발칸 지역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곳이다. 아드리아해에 접한 연안 총길이가 20km에 불과한 내륙국 비슷한 나라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두 지역이 역사적으로 분리되었다가 합쳐졌다가 반복해 왔고, 지금은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그중에서 보스니아, 또 그중에서도 세르비아와의 접경에 50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킨 다리가 있다.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문학과지성사/2005(초간은 오래전)
196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이보 안드리치(1892 ~ 1975)의 대표작이다.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의 트라브니크에서 태어났다. 자그레브와 빈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진보적 민족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11년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드리나 강의 다리』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해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발표했다. 이때 동시에 발표한 『트라브니크의 연대기』, 『아가씨』와 함께 ‘트라브니크 3부작’이라 불린다. 그중에서도 단연 빼어난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드리나 강의 다리』이다. 그는 발칸 지역의 역사와 인물 군상을 서사적으로 엮어 냄으로써 지역적이면서도 보편적 주제를 제시해 세계 독자들에게 ‘발칸은 곧 인류의 축소판’ 임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잔잔한 서술 속에 비극적 아이러니를 담아내며 역사와 권력, 폭력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도 존엄과 기억을 남기는 인간 존재를 포착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특징으로 ‘발칸의 호메로스’란 별명을 얻었다. 한마디로 그는 발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이며, 그의 작품 세계는 발칸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공간을 통해 인류 보편의 갈등과 화해, 폭력과 존엄이 그려진 ‘문학적 역사학’의 공간이 된다.
시작은 1516년이다. 조랑말 양 옆 자루에 10살 내외의 소년들을 하나씩 ‘실은’ 긴 행렬이, 오스만 병사들이 휘두르는 채찍을 무릅쓰고 따라오며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절규를 뿌리치고 비셰그라드 나루를 건너 먼 길을 간다. 여러 가정에서 ‘징집’된 이 아이들은 제국의 수도로 가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교육을 받은 다음 재능에 따라 술탄의 친위대인 ‘예니체리’나 행정 관료로 경력을 쌓고, 때로는 최고위직까지 오르게 된다. 이는 생명으로 세금을 대신하는 ‘혈세’와 같은 개념의 오스만제국 특유의 ‘데브쉬르메’란 제도다. 이때 끌려간 한 소년은 군과 관료의 경력을 쌓으면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마침내 황제의 사위가 되고, 제국의 제2인자,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그가 바로 보스니아 비셰그라드의 소콜루 출신 메흐메드 파샤 소콜리다.
그는 반세기도 훨씬 전에 자신이 끌려왔던 그 고향을 잊지 않고, 그곳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튼튼하고 아름다운 돌다리를 건설한다. 당시 보스니아 시골 한 구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멋진 석조 다리가 완성된 것은 1571년. 이와 함께 으리으리한 석조 건물 ‘한’, 즉 대상들이 묵어가는 ‘대상숙관’도 같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 즉 ‘드리나 강의 다리’다. 11개의 석공 아치 위에 길이 180m인 이 다리는 ‘오스만 건축 양식의 정점을 나타내는 공학적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에게 이 다리는 단지 역사의 증인에 그치지 않고, 세월을 함께 살아내는 이웃이자, 모든 사건의 중요한 ‘행위자’다. 그렇게 다리는 말없이 500년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주민들과 함께 삶을 지켜왔고,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모든 기념비적 건축물은 저만의 신화가 있다. 특히 드리나 강의 다리는 건설자 메흐메드 파샤 자신이 신화다. 여기에 건축 과정에서 스토야와 오스토야라는 쌍둥이의 희생, 검은 아랍인이라는 미지의 존재 신화 등이 가미된다. 이는 둘 다 건설 과정에 있었던 사건 사고가 신화로 발전된 경우다. 인위적으로 일부 강의 흐름을 가로막는 행위에 대한 저항도 있었다. 미신적인 믿음과 무보수 강제노동에 대한 반발로 일부 강제 징집된 사람이 공사를 방해하다가 잡혀 처형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공사 최고책임자는 ‘죄인’을 산채로 쇠꼬챙이에 꿰어 건설 중인 다리 위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세워 놓는다. 앞서 소개한 드라큘라 전설을 탄생시킨 왈라키아의 블라드 3세가 오스만 군에 저항해 전술로 사용했던 ‘말뚝형’인 셈이다.
이렇게 다리가 완성되고, 삶은 크게 달라진다. 사람과 물자가 오가면서 마을은 커지고, 삶도 조금 더 풍요로워진다. 다리의 중간에는 테라스가 있고, 그 테라스 한쪽은 ‘카피야’(‘문’이라는 뜻)이고 맞은편은 ‘소파’(‘현관’이란 뜻)다. ‘카피야’에서는 커피를 팔고, ‘소파’는 걸터앉아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주민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마을 회관이나 카페처럼 기능하게 된다.
이곳에는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등 3가지 신앙이 공존한다. 이슬람이 지배하고 불평등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큰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상생하는 모습이 보인다. 오스만의 지배는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느슨하다. 주민들은 ‘다름’을 보기보다는 ‘함께 살기’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짐짓 사소한 일을 화제로 삼아 묻어버리는 ‘지혜’에 근거를 둔다. 대홍수 에피소드가 당시의 삶을 잘 보여준다. 마을과 다리가 물에 잠기고,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된다. 각 종교 지도자들은 고지대로 올라가 자기 공동체의 대피와 보호를 지휘한다. 재난의 밤을 보내면서 그들은 짐짓 과거사의 사소한 일들을 화제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복구의 청사진을 그린다. 이심전심으로 재난을 극복하고 복구하는 것이다.
오스만이 쇠퇴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중 처음에는 헝가리, 나중에는 오스트리아 세력이 밀려오지만, 긴 세월 동안 바깥세상의 격변은 간접적이거나 미미한 영향으로만 이곳까지 미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일. 점차 큰 변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마침내 드리나 강의 다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19세기말, 이곳도 더 이상 세계 격변의 파도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갑자기 유럽의 세계가 밀려 들어온다. 거칠지만 느슨했던 제국의 통치 대신 부드럽지만 빈틈없는 세계가 들어온다. 저자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19세기까지 근근이 이어온 터키의 외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사람들은 자연히 한 번도 어떤 커다란 강국의 잘 정비되고 강력한 군대를 보지 못했었다. 이 사람들이 이제껏 보아온 군대란 잘 먹지도 못하고 옷도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직업 군인의 무리인 황제의 정규군이거나 이보다 더 사정이 나쁜 훈련이나 기강이 전혀 잡히지 않은 보스니아의 바쉬보주크(비정규병)들이 고작이었다. 이제 난생처음으로 그들 앞에 찬란한 상승의 군대, 언제나 자신만만한 제국의 정규군이 나타난 것이다. 이 군대를 한 번 보자 그들의 눈은 그냥 현혹되었고, 목이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첫눈에 말 장식과 군인들 제복의 단추만 보아도 힘과 질서가 다른 세상의 풍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놀라움은 컸고 감동은 깊었다.”
첫인상이 이러했다면, 실제 생활의 변화는 더욱 놀라웠다.
“무엇보다 카사바(마을 또는 지역)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의혹과 불신을 품게 한 것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그들의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계획과 그 계획의 실현을 추진해 나가는 꾸준한 노력과 인내였다. 이 이방인들은 평화롭지도 않았고, 타인들에게 평온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단호한 효과를 지닌 갖가지 법령, 규정, 명령의 망을 쳐서 사람, 가축, 사물 할 것 없이 온갖 형태의 생활을 간섭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도시의 외형은 물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풍속과 습관을 뜯어고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평화롭게 그리고 그다지 얘기도 없이, 완력이나 도발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의할 명분이 없었다.”
다리가 생긴 지 400년 만에 이곳 사람들이 법과 제도의 테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사이 폭동 전쟁 반란 등 온갖 일들이 지나갔음은 물론이다. 원하지 않은 결혼에 대한 말없는 저항으로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진 아리따운 처녀,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다가 꿈같은 일을 겪고 허수아비처럼 변해 버린 사람, 잠깐잠깐 보았던 소녀의 눈빛에 빠져 경비를 게을리했다가 게릴라 지휘자를 놓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병사, 모든 주민의 놀림감이 되어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는 좀 모자라는 집시 남자, 끝끝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 방식을 고집하는 마을 유지, 새로운 형태의 호텔과 카페를 열고 교묘하게 술꾼과 호색한들의 돈을 긁어내면서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친족들을 도와 가문을 일으키는 요염한 유대인 여성… 긴 세월 살아오면서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 같은 마을의 온갖 사연이 다리 아래 흐르는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기도 한다. 그 사이 사람들을 처형해 다리 위에 효수하는 끔찍한 학살도 있었다.
마침내 상수도가 들어오고, 철도가 놓인다. 보스니아 벽촌의 청년들이 처음에는 군에 징집되어, 나중에는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세상은 급변한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새로운 사상이 물밀 듯 들어오고, 드리나 강의 다리 위 ‘카피야’에 모인 사람들은 지난 400여 년 간과는 전혀 다른 대화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칸전쟁, 제1차 세계대전… 이런 전쟁의 포화 속에서 끝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만의 논리로 버티어 오던 지역 무슬림 공동체의 원로 알리호좌는 집으로 가는 비탈길에 드러누워 가쁜 숨을 내쉰다. 이것이 400년 넘게 달려온 ‘드리나 강의 다리’ 마지막 장면이다. 이로써 이곳의 옛 질서는 완전히 무너지고 오스만 치하 다민족·다종교 질서는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알리호좌의 죽음은 발칸의 공존 구조가 해체되고 폭력적 민족주의로 치닫는 운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후의 갈등과 분쟁을 예언하듯이 소설의 중간 부분에 이미 이렇게 쓰고 있다.
“불신과 불안함, 주저와 잠시 머무르는 느낌의 첫 몇 해가 지나가자 카사바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식의 저 어두운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죽어서 묻혀버린 것 같지만, 특유한 인종과 신앙과 계급에 대한 기본적인 감정과 무너뜨릴 수 없는 신념이 그 의식의 밑바닥에 생명을 부지하고 안주하고 있었으며 먼 미래에 있을 뜻밖의 변화와 큰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어떤 민족도 이런 것들 없이 살 수 없지만 특히 이 땅의 사람들은 더욱 그런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이 작품을 발표한 지 거의 반세기 후인 20세기 말엽에 그가 주목했던 “특유한 인종과 신앙과 계급에 대한 기본적인 감정과 무너뜨릴 수 없는 신념이 그 의식의 밑바닥에 생명을 부지하고 안주하고” 있다가 폭발했다. 이렇듯 보스니아, 코소보 등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 지역에서 발생한 내전은 잔혹했다. 세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발칸의 ‘폭력성’에 주목했다. 그와 함께 이 작품도 다시, 또다시 읽히는 인류의 고전 반열에 올라섰다. ‘발칸의 호메로스’, ‘발칸 반도 400년의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위대한 서사시’라는 표현은, 그래서, 단지 광고 문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발칸 이야기가 너무 길고 복잡하고,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또한 너무 복잡하고 긴 세월이라 나의 이야기도 예상보다 더 길고 복잡해졌다.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 「아름다운 발칸… 모자이크 또는 난마」도 부득이 회를 나누게 되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 이스마엘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2부로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