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다(2)

저 천국과 이 세상 사이에서

by 제이슨


『무엇이 잘못되었나』/버나드 루이스/나무와숲/2002

『오스만 제국』/오가사와라 히로유키/까치/2020(이상 제13화 『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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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나지브 마흐푸즈/민음사/2015

『눈』/오르한 파묵/민음사/2005

『페스트의 밤』/오르한 파묵/민음사/2022

『프랑스어의 실종』/아시아 제바르/을유문화사/2021(추후 다룰 예정임)


이슬람 르네상스?


“문화적 결정론’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이슬람이기 때문에 빚어진 차질도 분명 있다.


오스만제국을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 근대화 과정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제13화 『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다(1)』) 유럽은 르네상스를 이뤄낸 데 이어 ‘세기말’(19세기말 ~ 20세기 초) 2번째 르네상스라고 할 만한 지성의 폭발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반면 이슬람 세계의 르네상스는 없었다. 이는 인류 문명 전체의 큰 손실이었다. 중세 암흑기에 이슬람 문화의 융성이 세계 문명을 얼마나 살찌웠는지를 생각하면 그 손실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세기말 빈은 하나의 도시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지성의 실험장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클림트와 분리파의 미술, 말러와 쇤베르크의 음악, 슈니츨러와 호프만슈탈의 문학,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까지—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짧은 시간 동안, 빈은 마치 두 번째 르네상스를 살아내는 듯했다. 한 사회가 자기 내부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예술과 사상으로 승화시키며, 다시 세계사적 전환의 동력이 되는 순간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제국의 정체와 부패,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 그리고 식민지적 근대화의 외부 이식에 갇혀 있었다.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으로 근대의 초석을 다진 유럽과 달리, 이슬람 세계에는 자생적 지성의 폭발이 일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이슬람 문화는 본질적으로 근대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단순한 문화 결정론일 뿐이다. 내가 보려는 것은 문명의 숙명이 아니라, 왜 근대화의 타이밍과 동력이 그곳에서 꺾였는가 하는 역사적 맥락이다.


르네상스는 ‘사유의 다양성’과 ‘문화의 융합’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이슬람 르네상스가 있었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풍부한 지적·문화적 토양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이슬람권의 발전, 이슬람 문화의 융성을 넘어서, 인류 전체의 지혜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갈등보다 공존이 더 강화된 문명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본질적인 차이점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세속 권력의 탄압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반면 이슬람은 처음부터 권력과 함께 성장했다. 즉 이슬람공동체는 종교 정치 군사가 통합된 집단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내면화되고 사회는 세속화되었다. 세속 권력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도 하고, 때로 긴장관계에 있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는 늘 분리되어 있었다. 반면 이슬람은 세속 권력이 신앙을 지배하고, 신앙이 세속 권력을 지배하는 구조를 유지한다. 1979년 혁명 이후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이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므로 이슬람세계에는 세속 법이 아니라 샤리아, 즉 이슬람 법이 지배한다.

유럽의 근대화는 인본주의에 뿌리를 둔다. 르네상스가 그렇고 종교개혁이 그렇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는 지금까지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르네상스를 위한 토양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비이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슬람은 아직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슬람권의 딜레마는 세속적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엘리트와 종교 권력의 충돌이다. 튀르키예의 경우, 무스타파 케말이 세속주의를 내걸고 혁명을 일으켜 근대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케말주의 세력은 크게 쇠퇴한 상태다. 이란처럼 강경 이슬람주의로 돌아서지는 않았지만, 정치에 이슬람주의적 요소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 물론 저항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에르도안 정권은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를 투옥하는 등 세속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비느하스 이야기


앞서 이슬람이 중세 수세기 동안 “인류 문명 발전의 선두주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제13화 「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다(1)」) 그런데 이슬람세계는 근대화에서 뒤떨어지고, ‘야만’으로 무시했던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지금도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의 ‘변경’에 위치해 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겠는가? 절치부심,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2가지 길이 제시된다.

하나는 뒤처진 근대화를 열심히 추진해 서구를 따라잡고 궁극적으로 추월하는 길이다. 이는 이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 또는 문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세속주의적 관점이며 그 대표적인 성공 모델은 한국이다.

또 하나는 이슬람 특유의 인식으로, "훼손된 이슬람의 가치를 되살려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옛 영화를 되찾는" 것이다. 이는 신앙의 타락으로 신의 진노를 산 것을 ‘고난’의 원인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것이 원리주의, 극단주의가 피어나는 토양이 된다.


여기서 '비느하스 사건'이 떠오른다.

비느하스 사건이란 성경 구약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사건이다. 비느하스는 제사장 아론의 손자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모압 평야에 있을 때 대대적으로 역병이 돌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 하고, 바알브올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이다. 이때 족장 중 한 사람이 미디안 여인을 자신의 장막으로 데리고 왔다. 비느하스는 이 두 남녀를 창 하나로 꿰어 죽인다. 비느하스의 ‘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정결’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신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내리신다.

이것은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 건전한 사고의 소유자라면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문자 그대로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문제를 신앙의 정결이 훼손된 탓으로 보고 그 원인을 제거하겠다고 나서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순간 폭력은 범죄가 아니라 ‘정화 행위’이며 ‘성스러운 의무’가 된다. 여기에 종말론적 긴장이 더해지면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더 큰 진노’가 임할 것이고, 신의 언약과 공동체가 파괴된다는 위기의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 극단주의의 논리이고 행동 양식이다.


‘비느하스 정신’은 유대-기독교의 관점이지만, 이슬람에도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지 않을 뿐, 그 정신은 코란의 ‘충성과 단절’ 교리, ‘지하드 의무’, ‘신성 모독에 대한 열심’ 등의 개념으로 교리적 법학적 원리가 발전돼 하나의 규범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극단주의자들은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왜 서구 모델에 따른 발전이 아니라 종교적 원리주의, 극단주의로 흐를까?

이것이 딜레마다.

물론 이슬람 세계 여러 나라는 건전한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가 순탄한 발전을 방해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원리주의의 함정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식민 지배 하에서 타율적으로 근대성이 이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세속주의 엘리트는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이자 이슬람 가치의 배신자로 여겨진다.


여기에 이른바 ‘자원의 저주’가 겹쳤다. 많은 이슬람 국가들은 석유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부는 국민의 세금을 대체했고, 권위주의 정권을 강화했으며,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자율성을 억눌렀다. 그 결과 이슬람 세계는 민주화의 길을 놓쳤고, 불만과 갈등은 종교적 극단주의로 흘러갔다.


만약 석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산업화는 더디게 진행되고, 사회적 진통도 컸겠지만, 그 속에서 세금 기반의 국가가 성장했을 것이다. 국민은 권리를 요구하고, 제도는 점차 민주화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자유와 학문적 탐구가 결합하여, 중세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이슬람 르네상스가 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처럼 모순에 모순이 겹쳐 많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원리주의, 근본주의, 극단주의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가장 고민은 깊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슬람 세계에 살고 있는 당사자들일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본다. 마호메트는 마지막 선지자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말하자면 ‘최신 버전’이다. 즉 유대교 기독교 등은 불완전하고, 이슬람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알라의 율법이 다스리는 이슬람국가가 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가 이슬람화 되어야 한다. 이슬람 국가야 말로 가장 발전된 국가이고, 이슬람 문명이야 말로 가장 발전된 문명이기 때문이다. 알카에다 ISIS 하마스. 무슬림형제단 등등이 모두 궁극적으로 좇는 목적은 이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알라의 뜻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란이 이슬람공화국이 된 것이다. 이제 그것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과업만 남았다.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이슬람이 가장 발전된 문명이라고 믿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들 원리주의자들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주는 나라 중 하나는 한국이다. 다른 서구 선진국들이 앞선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제국주의 착취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에 성공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이슬람주의자들의 모든 논리를 무너뜨리는 사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신권과 속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 절묘한 알레고리


『우리 동네 아이들』/나지브 마흐푸즈/민음사/2015

이제 이슬람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고뇌를 들여다볼 시간이다.


이 책 『우리 동네 아이들』은 세계관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이슬람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나 ‘발칙한’ 내용이다. 당연히 ‘신성모독’ 낙인이 찍혔고, 이 때문에 작가가 테러도 당했다.


저자 나지브 마흐푸즈(1911~2006)는 ‘이집트의 발자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소설가로 1988년 아랍권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카이로의 중산층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교육을 잘 받았다. 부친이 공무원이었고, 작가 자신도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전업작가가 되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1959년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문 알 아흐람에 연재되었다. 그러나 신성모독 논란에 휩싸여 이집트에서는 책이 나오지 못하고, 1967년에 가서야 레바논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2권 8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한 마디로 신권과 속권, 즉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그 대상은 첫째는 이슬람이고, 확장하면 인류 역사 전체이다. 한마디로 이 ‘절대자’인 신이 종교권력에 공동체를 위임했고, 종교권력은 세속권력을 통해 통치하지만, 이들 두 권력이 결탁해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기만하고 착취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신’은 응답하지 않고, ‘영웅’이 나타나 구원하지만, 그 영웅의 시대가 지나가면 번번이 다시 착취 체제로 되돌아가버린다. 그리하여 작가는 그 ‘신’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 대리인을 자처하는 신권과 속권의 위선을 고발한다.


무대는 카이로 외곽의 광대한 사막지대다. 그곳 마을 카페에 구전 역사를 전하는 이야기꾼, 또는 음유시인이 있고, 그가 대대로 내려오는 영웅 설화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 역사는 천지창조에서 근대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것이다. 그러므로 세대에 세대를 이어가면서 이야기가 하나씩 하나씩 덧붙여져 간다.


‘자발라위’라는 대지주는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지역을 평정한다. 그는 높은 곳에 대저택을 짓고 아들, 하인 등과 함께 산다. 그 저택에는 낙원과 같은 정원이 있다. 자발라위의 후손은 번성해서 큰 공동체를 이룬다. 그렇게 대대로 살아가는 동안 아드함, 자발, 리파아, 까심, 아라파 등 5명의 영웅이 나온다. 이 영웅 5명이 연이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웅의 출현 시기 사이에는 긴 세월의 간극이 있다.


자발라위는 ‘창조주’ 신이다. ‘우리 동네’, 즉 자발라위가 평정하고 그 후손들이 살아가는 카이로 외곽의 이 지역은 ‘세계’를 뜻한다. 그렇다면 5명의 영웅은? ‘선지자’다. 코란을 읽지 않았으므로 구약 성경에 대입하면 아드함은 첫 인간 아담이고, 자발은 아브라함(?), 리파아는 예수, 까심은 마호메트가 된다. 마호메트가 마지막 선지자라면 이 책에 등장하는 마지막 ‘영웅’ 아라파는? 이는 저자가 창조한 가상의 인물로 책 내용 상으로 보면 ‘과학’이다.


저자는 서두에 ‘머리말’을 통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먼저 제시해 준다.


“… 동네 사람들은 고생스럽거나 불공평한 처사에 휘둘려 억울하고 사람대접을 못 받을 때마다. 사막과 맞닿은 동네 안쪽 높은 곳에 위치한 대저택을 가리키며 비통하게 말합니다. 저건 우리 시조의 집이야 우리 모두 그의 후손이라 그의 재산을 나눠가질 자격이 있는데 그런 우리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왜일까? 어째서 수모를 겪는 것일까?...”


첫 영웅 아드함은 자발라위의 장자가 아니라 서자다. 그런데 자발라위는 자신의 ‘재산관리인’으로 장자인 이드리스가 아닌 아드함을 지목한다. 이드리스는 당연히 분노해 저항하다가 쫓겨난다. 아드함은 ‘재산관리인’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그런데 쫓겨난 이드리스가 끊임없이 그를 유혹한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타를 날린다. 자발라위의 유언장 내용을 알려 달라는 것이다. 유언장은 누구도 볼 수 없다. 아드함도 예외가 아니다. 이드리스는 아드함의 아내를 회유한다. 아드함의 아내도 유언장 내용이 너무 궁금하다. 결국 아드함은 아내의 꼬드김에 넘어간다. 그러나 유언장을 개봉하려는 순간, 자발라위에게 발각되고, 그 일로 아드함도 쫓겨나고 만다.


그렇게 ‘우리 동네’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무엇인가? 그렇다. 이드리스는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악한 천사, 이블리스, 즉 사탄이다. 아드함과 그의 부인은 아담과 하와다. 아드함… 이름 자체가 이미 아담 아닌가.


‘시조’ 자발라위는 아주 독선적이고 무섭고 타협하지 않는다. 자발라위는 쫓겨난 이드리스와 아드함의 후손들이 번성하는 동안에도, 이드리스와 아드함이 죽고 또 그 후손들이 죽고… 그렇게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계속 대저택에 살고 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 대저택에 범접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인가? 야훼 또는 알라? 바로 그런 존재다.


‘우리 동네’는 ‘재산관리인’이 다스린다. 각 마을에는 ‘수장’이 있다. 이들 수장은 ‘몽둥이와 주먹’으로 사람들을 다스린다. 이들 수장을 통제하는 것은 ‘두목’이다. 그러므로 ‘재산관리인’은 ‘두목’을 임명하고 그를 통해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두목은 ‘재산관리인’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동네’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동네 아이들’이라는 제목에서 ‘아이들’이란, 읽기에 따라서는 ‘동네’ 주민들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재산관리인과 두목, 그리고 수장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몽둥이와 주먹’으로 다스린다. 재산권 행사를 위한 10가지 조건도 있다. ‘10계명’이다. 즉 율법을 내세워 억압하는 체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알레고리일까? 관재인이란 어떤 특면에서는 성직자 또는 교회 권력, 즉 ‘신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목’이란 것은 세속권력이다. 이 두 권력이 자발라위의 후손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그 고통이 극에 달하면 영웅이 나타나서 관재인과 두목을 물리치고 ‘회복’을 한다. 그런데 그 영웅이 사라지면 또다시 세속권력과 신권… 관재인과 두목이 권력을 잡고 ‘몽둥이와 주먹’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누군가? 모두가 자발라위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자발라위의 재산에 대한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재인과 두목이 그 아래 수장들과 함께 갈취하고 학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못 견디는 상황까지 가면 또 새로운 영웅이 나타난다.


그래서 아드함은 아담이고, 자발은 아브라함일까? 리파아는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다. 왜냐하면 이 사람을 사랑을 설파하고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 추종자들이 동네를 장악해서 사람들이 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나고 또다시 착취와 학대가 시작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신음할 때 까심이란 영웅이 나타난다. 이 사람은 마호메트다. 돈 많은 훌륭한 과부와 결혼하고 추종자를 모아 전쟁을 통해서 관재인과 두목과 수장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자발라위의 후손들에게 권리를 찾아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 준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나고 또다시 착취와 학대가 시작된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라파다. 그는 앞서 나온 영웅들과는 다르다. 마호메트가 마지막 선지자이므로 까심 이후 다시 영웅이 나타나는 것은 비이슬람적이다. 아라파는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인물이다. 작품 속 활동을 보면 의인화된 ‘과학’이다. 그러나 아라파 역시 일시적인 ‘회복’은 이루지만 결국 억압 체제로 돌아가게 되면서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근대화의 실패’다.


시조 자발라위, 즉 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후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도 않는다. 그의 대리자인 재산관리인이 ‘두목’과 각 마을의 수장들을 통하여 다스리는 체제는 억압 학대 착취 수탈로 점철돼 있다. 정의롭지 않고, 구성원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신권 체제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근본적으로 신의 의지에 반하는 체제다.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태초에 창조가 있었다. 자발라위가 ‘우리 동네’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자발라위는 재산관리인에게 관리를 맡겨둔 채 동네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는다. 존재하되, 동네 사람들에게는 ‘부재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암시된다. ‘암시’라 하는 것은 작가가 감히 “죽었다”라고 표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그리하여 작가는 마침내 이슬람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신은 응답하지 않고, 그 대리인은 불의하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전면 부인’이다. ‘신성 모독’이란 반발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이슬람 만의 이야기일까? 작가가 이집트인이라는 선입견 없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인류 문명 전체의 알레고리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고립과 허무 – 오르한 파묵의 튀르키예


눈은 모든 것을 덮고, 한 공간을 고립시키고, 그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지만, 결국 눈은 녹고, 고립은 해소되며, 그와 함께 고립된 공간에서의 모든 것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눈은 어쩌면 ‘허무’다.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버린다. 아픔, 부끄러움, 잊어버리고 싶은 모든 것을 감춰준다. 흰색은 정결이며 순결이다. 그러나 녹은 후에는 끔찍하다. 모든 것이 더 더러워진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은 아름다움 뒤에 오는 허무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눈』/오르한 파묵/민음사/2005

폭설로 고립된 도시에서 연극과 현실의 쿠데타가 서로에게 녹아든 상태로 진행되는 묘한 스토리의 소설이다. 그 속에서 저자는 민족주의, 세속주의, 이슬람주의, 사회주의 또는 진보주의 등의 복잡한 이념의 충돌에 따른 혼돈을 그려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눈이 녹는 것과 함께 허무하게 녹아내린다. 사랑도, 한 사람의 생애도 그처럼 허무하게 스러져버린다.


이것은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인 동시에 근대성과 중세적 종교성의 갈등에 갇힌 튀르키예, 나아가서는 이슬람 세계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오르한 파묵(1952년 이스탄불 출생)은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1982년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이어 『하얀 성』, 『순수 박물관』, 『페스트의 밤』 등 많은 명작을 남겼다. 『하얀 성』(1985),『검은 책』(1990), 『내 이름은 빨강』(1998) 등 색채 3부작은 ‘하양’, ‘검정’, ‘빨강’ 등 3가지 색을 통해, 튀르키예라는 문명 경계의 국가가 겪는 자아의 혼란과 기억의 미궁, 문명의 충돌을 그리고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눈』은 모친상을 계기로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가 귀국한 주인공 카(Ka)가 튀르키예 동북부 국경도시 카르스(Kars)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명목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녀들의 연쇄 자살에 대한 취재 의뢰다. 이 의뢰를 받아들인 데는 그곳에 살고 있는 옛사랑과의 재회 기대가 큰 몫을 했다. 그가 가던 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도시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다. 이 소설은 이처럼 눈으로 고립된 외딴 국경도시에서 벌어지는 사흘 간의 이야기다.


앞부분의 설정이 조금 의아하다. 다름 아닌 소녀들의 자살 동기다. 논란이 있지만, 그 동기는 히잡 착용 문제다. 나는 히잡 착용이 이슬람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당연히 소녀들의 자살이 히잡 착용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반대였다. 히잡을 벗으라는 세속주의 당국의 명령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처음부터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갈등을 바탕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주인공 카는 시인이며 진보주의자다. 망명 생활 속에서 시를 한 줄도 쓰지 못했지만, 카르스에서는 가는 곳마다 시가 나온다. 카와 함께 카르스에는 극단이 도착한다. 첫날밤 공연에서 카는 예정에도 없던 시 낭송을 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잘 짜인 각본처럼 진행되고, 그것은 이 지역신문이 예언자처럼 선제 보도를 하고 있다. 카는 옛사랑인 이펙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호텔에 묵는다. 재회는 이뤄지고, 사랑도 다시 결실을 맺을 것처럼 보인다. 그는 또 이슬람주의 추종자인 이슬람학교 학생, 영적인 카리스마가 넘치는 이슬람 설교자, 옛사랑의 전남편인 시장 후보 출마자, 과거 톱스타였던 극단 대표인 연기자를 만나고, 신문 발행인도 만난다. 이 모든 만남은 모두 각각의 의미가 있다. 카는 이슬람주의, 이슬람 신앙의 영적인 힘, 민족주의, 세속주의 등 튀르키예의 모든 갈등 요소를 접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연극 공연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이슬람주의 학생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이것은 연극인줄 알았지만, 연극인 동시에 실제 쿠데타였다. 그 지도자는 극단 대표이자 배우인 수나이 자임이다. 일각에서는 쿠데타가 진행되고, 다른 쪽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해외 언론에 전할 성명을 준비한다. 사회주의자, 이슬람주의자, 민족주의자, 쿠르드 분리주의자 등등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분파가 분분하게 토론한다.


그러는 사이에 카와 이펙의 사랑도 줄타기를 한다. 카는 아름다운 이펙과 함께 독일로 가서 새로운 삶을 꾸리기를 소망한다. 마침내 둘은 사랑을 나누고, 이펙은 카를 따라 독일로 갈 결심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든 것이 겉도는 느낌이다. 쿠데타는 도시를 장악하지 못하고, 연극은 마무리되지 못한다. 카와 이펙의 사랑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늘 표류한다. 마침내 눈은 그치고, 카르스의 고립도 풀린다.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이는 극단 대표이자 배우인 수나이 자임의 ‘순교’ 시나리오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수나이 자임은 저물어가는 케말주의의 황혼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장엄한 ‘순교’를 통하여 케말주의 신화를 되살리려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마치 녹은 눈이 추악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렇다면 카는 무엇하러 카르스에 갔을까? 그는 사랑도 되찾지 못했고, 진보주의자로서 자신의 과거 신념을 실천하지 못했다. 쿠데타에 저항하지도, 찬성하지도 못했다. 신의 섭리에 끌렸지만, 끝내 믿을 수는 없었다. 시는 썼지만, 그것이 그의 시 정신을 온전히 되살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쓸쓸히 독일로 돌아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시작 노트는 사라진다. 허무다.


카르스의 모든 이념은 어디로 갔을까? 쿠데타는 멎었지만, 이슬람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도, 쿠르드 민족주의자도 얻은 것은 없다. 히잡을 벗는 문제 역시 결론은 없다. 단지 눈 녹은 뒤의 지저분한 거리만 남았을 뿐이다.

카르스를 소개하는 유튜브 동영상

케말주의란 오스만제국을 무너뜨리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한 ‘국부’ 케말 파샤, 즉 무스타파 케말의 세속주의를 일컫는 말이다. 그가 내세운 6가지 원칙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세속주의 인민주의 국가주의 개혁주의 등이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의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표면적으로 눈에 띄는 개혁은 ‘샤리아’를 폐지하고 공공기관 내 이슬람 복장을 금지하며 라틴문자를 도입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슬람 색채를 지우고 서구식 개혁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로부터의 강압적 개혁이라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래서 급진적인 개혁으로 근대화를 앞당기는 데에 크게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주의·민족주의의 반동적 부활을 낳는 조건도 만들었다. 엘리트와 일반 시민, 도시와 농촌 등의 격차와 억압에 대한 반발도 컸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슬람주의가 고개를 들고,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 문제가 불거지는 등 부작용이 표면화되었고, 오늘날 케말주의 정당은 소수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튀르키예 내부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장기 집권하면서 이슬람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여 세속주의와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눈』의 수나이 자임이 케말주의의 황혼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눈』은 머리 아픈 정치소설이라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1, 2 두 권에 600쪽이 넘는 대작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읽기 어려운 소설이 아니다. 일단 카르스라는 도시가 꽤 로맨틱하다. 지도상으로 보면 이스탄불에서 동쪽으로 끝까지 가면 나오는 도시다.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에 있다. 위치가 말해주듯 아르메니아적인 요소가 많고,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지배권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에 튀르키예 영토가 된 곳이기 때문에 러시아적인 요소도 섞여있는 도시다. 유튜브 소개 영상에는 ‘중세로 가는 여행’으로 선전되기도 한다. 스토리 자체도 재미있다. 카와 이펙의 사랑이나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섬세하고, 사건 전개도 흥미진진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은 이 작품의 배경설명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페스트의 밤』/오르한 파묵/민음사/2022

소설 『눈』을 이야기하다 보니 같은 작가 오르한 파묵의 『페스트의 밤』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세계로 퍼져 나가던 ‘팬데믹 시대’와 출간 시기가 겹치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서사는 훨씬 더 깊고 넓다.


『눈』과는 내러티브 구조가 놀랍도록 유사하다. 『눈』은 폭설로 고립된 카르스라는 국경 도시가 무대다. 『페스트의 밤』은 페스트로 봉쇄, 고립된 섬 민게르가 무대다. 민게르는 오스만 제국 령으로 묘사된 가상의 작은 섬이다.


이 섬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뒬하미트 2세가 비밀리에 파견한 그리스 정교도인 방역전문가인 화학자이자 약사인 본코프스키 파샤와 그의 조수의사 일리아스가 상륙한다. 황실 최고 화학자이자 다른 도시에서 6주 만에 페스트를 종식시킨 ‘영웅’인 본코프스키는, 그러나, 본격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한편 무슬림 의사 누리 부부는 같은 배편으로 민게르를 거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가 이스탄불에서 온 급전을 받고 다시 민게르로 간다. 죽은 본코프스키 대신 페스트 방역 업무 지휘를 맡은 것이다.


누리의 아내는 술탄 파키제, 즉 압뒬하미트 2세의 조카딸이며 이들은 신혼이다, ‘파샤’는 우리말의 ‘대감’ 쯤에 해당하는 장관이나 장군급의 경칭이고, ‘술탄’은 이슬람 국가의 왕이나 황제의 칭호로 알고 있지만, 실은 공주나 왕자 등 핵심 왕족도 이 호칭으로 불린다. 파샤보다 낮은 직급의 사람에게 붙이는 경칭은 ‘베이’, ‘에펜디’ 등이 있으며, 이 말은 우리 옛말의 ‘생원’, ‘진사’처럼 오스만제국 해체 후에도 일반인들에 대한 경칭으로 널리 쓰여 특히 튀르키예 문학 작품에 많이 나온다.


이 섬은 정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반반쯤 되는 곳이고, 따라서 알력과 불신도 있다. 약사 본코프스키의 죽음은 바로 그런 사정을 대변한다. 총독과 의사 누리 등은 협력과 일부 갈등을 겪으며 페스트 종식을 위하여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지만, 역부족이다. 이처럼 온갖 방역조치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자, 명망 높은 영적인 지도자 셰이크 함둘라흐의 이슬람세력이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신권’ 정치는 방역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민게르인의 각성이 일어나면서 민게르는 독립을 선언한다. 그 중심에는 의사 누리와 파키제 술탄의 경호 책임자로 온 ‘민게르인’ 캬밀이 있다. 그는 ‘지휘관’ 캬밀이란 별칭을 얻으면서 독립국 민게르의 건국 영웅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는 한 손에 모든 정보를 쥔 마즈하르 에펜디가 도사리고 있다. 그는 당초 총독의 정보 책임자였지만, 총독의 실각, 셰이크 함둘라흐의 몰락, 지휘관 캬밀의 죽음 등을 거치면서 계속 막후 실력자로 남아있다가, 파키제 술탄을 여왕으로 옹립한 다음, 결국은 술탄 부부를 ‘조용히’ 축출하고 전권을 장악한 후 종신 독재자가 된다


이렇게 읽어보면, 이것은 팬데믹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연히 출간 시기가 팬데믹 시대와 겹쳤을 뿐. 읽기에 따라서는 튀르키예 역사의 극단적 축약이자, 에르도안 정권 탄생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신화와 독재, 권력의 탄생과 존속에 대한 이야기다. 민게르는 민족주의 세례를 받고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신권정치는 실패했고, 남은 것은 상처뿐인 숨 막히는 독재다. 결국 이 작품은 제국의 실패, 이슬람의 실패, 근대 민족주의의 실패와 전체주의 독재로의 잘못된 귀결을 보여주는 셈이다.


오르한 파묵은 『눈』이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페스트의 밤』도 역사소설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정치적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같은 페스트를 소재로 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카뮈의 『페스트』는 페스트라는 전대미문의 고통을 겪는 고립된 도시민의 인간 실존 문제에 집중하는 미시적 접근이라면 『페스트의 밤』 은 공동체의 운명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을 그리는 거시적 접근 방식이다.


이 작품도 본문이 700쪽이 넘는 대작이다. 그러나 워낙 다양한 에피소드가 들어있어서 튀르키예 문화 종합 안내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이집트와 튀르키예는 근·현대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또는 지도급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 시리즈에 이들 두 나라의 대표작을 다뤄보았다. 이슬람 세계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고방식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이슬람권에 속하는 나라 수가 50개 내외이고 이들은 공통점도 있지만 각기 고유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통의 딜레마가 있지만, 각기 다른 사정도 있다.


나지브 마흐푸즈와 오르한 파묵의 작품에서 본 것은 대부분 이슬람 세계 다양한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공통적인 딜레마다. 그러나 파묵의 『눈』과 『페스트의 밤』에는 튀르키예 고유의 요소가 꽤 많이 들어 있는 반면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보다 보편적이다. 그러나 다른 이슬람 국가의 정서는 또 다를 수 있다. 그 때문에 이집트나 튀르키예와는 다른, 프랑스 식민지를 경험한 알제리의 사례로 아시아 제바르의 『프랑스어의 실종』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는 또 다른 서사가 펼쳐진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달리 파묵의 작품 『페스트의 밤』까지 언급하는 바람에 원고가 너무 길어졌다. 『프랑스어의 실종』은 다시, 다른 이슬람권 작품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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