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그리고 증오의 흔적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문학과지성사/2005(제15화 「아름다운 발칸…모자이크 또는 난마(1)」)
『발칸의 역사』/마크 마조워/을유문화사/2021
『부서진 사월』/이스마일 카다레/문학동네/2022
『죽은 군대의 장군』/이스마일 카다레/문학동네/2011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열린책들/2009
Ⅰ
도대체 ‘발칸’이 뭔데?
오늘날 발칸 여러 나라의 멋진 도시와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 한 세대 전에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떠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2022년 터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뒤 이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이곳의 과거사는 더 까마득한 옛일처럼 되었다. 이제 ‘유럽의 화약고’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그렇다면 이제 발칸은 안정되었을까? 잔혹한 분쟁의 불씨는 완전히 꺼진 것일까?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 그 연대기의 기록은 1914년에서 멈춘다. 바로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 부부가 암살당한 해다. ‘연대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터지고,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상황까지만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다시 한 세대 후, 발칸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당시 발칸은 전쟁의 ‘변방’이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느 나라 못지않은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다음은 모두 알다시피 그리스를 제외한 모든 발칸 국가가 공산 독재에 신음했고, 20세기말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면서 처절한 내전을 겪었다. 30~40년 주기로 난리를, 그것도 큰 난리를 치른 셈이다.
2025년 현재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이 과거와 다른 것은 여러 가지 불안요인을 제어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많이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발칸 제국 민족들 간의 영토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유럽연합(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이 안전장치로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장치’가 절대 무너지거나 작동 불능에 빠지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발칸의 역사를 살펴보자. 『드리나 강의 다리』가 훌륭한 연대기이긴 하지만, 그것은 보스니아, 그중에서도 비셰그라드라는 ‘외진 곳’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러므로 발칸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그 연대기에 기록된 사건과 사람들의 삶을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서가 뒤바뀌었다.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 『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초 역사 공부를 하겠다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슬람의 근대화에서 가장 최근까지 유럽의 이슬람지역으로 남았던 발칸으로 관심이 옮아갔고, 문학 작품으로 그 삶을 접하고 나니 ‘빈 구석’이 많이 생겨서 그 퍼즐을 맞춰보려고 역사책을 집어 들게 된 것이다.
도대체 ‘발칸’은 무엇인가?
『발칸의 역사』/마크 마조워/을유문화사/2021
“발칸의 역사는 200년 밖에 안 되었다.”
뭐라고? 그럼 그리스는 어디 있었고,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은? 당연한 반문이다. 이 말 뜻은 ‘발칸’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이 이처럼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 200년만 다룬다.
저자 마크 마조워는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영국 역사학자로 특히 발칸사의 권위자다. 유럽 현대사를 연구하되 유럽 주변지역에 주목하는 독특한 시각으로 기존 유럽현대사의 해석에 도전한다는 평을 받는다. 이 책 『발칸의 역사』도 고정관념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발칸이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폭력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다. 앞서 전편에서 “발칸은 폭력적인가?”란 물음을 제기했었다.(제15화 「아름다운 발칸...모자이크 또는 난마 (1)」) 이 물음에 저자는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였다.
저자는 ‘발칸’이란 용어가 언제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논의로 운을 뗀다. 용어의 정의에서 시작하는 틀에 박힌 서술이라는 생각에 지겨운 느낌부터 들었다. 그냥 휙 훑어보고 대충 넘어가자… 그러나 아니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건성으로라도 꼭 읽어보아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용어나 명칭은 단지 말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격을 부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운명을 결정한다. 19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발칸 지역’이란 명칭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 지역의 역사와 특성에 대한 서사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선입견도 굳어졌다.
“애초부터 발칸이란 말에는 지리적 개념 이상의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이전 명칭들과는 달리 발칸에는 폭력, 야만, 원시성과 같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p.19)
이 책은 프롤로그: 명칭들 1. 발칸의 영토와 주민들 2.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3. 동방 문제 4. 국가 건설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발칸 지역은 위치로는 ‘유럽 남동부’이고, 역사적으로는 ‘유럽의 터키’라고도 한다. 오늘날 튀르키예가 마르마라 해 건너편의 작은 유럽대륙 땅을 제외하면 아나톨리아 반도에 한정된 것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현재 발칸지역이라고 하는 유럽 남동부와 아나톨리아 반도에 걸쳐 있었다.(이집트 북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편 오스만 이전 시대에는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은 비잔틴 제국 신민, 오스만 제국 신민이었다. 즉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은 근대의 산물이다.
이곳 주민들은 그리스인과 대규모로 이주해 온 슬라브족이다. 이들은 정교회로 개종하고 비잔틴 제국의 신민으로 정체성이 규정되었다. 이들은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이 문자는 정교회 선교사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가 선교를 위해 만든 것이다. 물론 이들 발칸 슬라브인들도 불가리아 세르비아 알바니아 등등 분파가 많고, 언어도 조금씩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교류가 어려운 산악지역으로 서로 고립돼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차이점이 있었지만, 모두 비잔틴 제국의 신민이었고,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제국 내 기독교인으로 규정되었다. 오스만이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무슬림과 비무슬림으로만 구분했기 때문이다. 실제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려고 주민들을 만난 지식인들이 경험한 것은 이렇다.
“19세기 초 그리스와 불가리아 애국자들은 오스만 치하 마케도니아 정교회 농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예상외로 힘겨운 작업이었다… 그들에게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 그러니까 로마이오이(로마인, 즉 그리스인)냐 불가로이(불가리아인)냐고 물었던 것 – 그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성호를 긋고는 자기들끼리 내 말의 의미에 대해 뭐라고 쑥덕거린 뒤 순진하게도 이렇게 대꾸했기 때문이다. ‘우리야 뭐, 기독교인이죠. 그런데 로마이오이니 불가로이니 하는 게 대체 뭔 말이요?’…”
그렇다면 이슬람 오스만의 지배를 받는 기독교, 즉 주로 정교회, 신자들은 핍박을 받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오스만은, 또는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을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 해서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다. ‘책’이란 ‘성서’ 또는 ‘토라’ 등을 가리킨다. 물론 인정해 준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스만은 더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등 차별은 했지만, 정교회(또는 유대교)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에 따라 정교회는 총대주교의 지도 하에 제국에 협조하면서 상당한 자치와 이익을 누렸다. 심지어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느니 튀르크인이 되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슬림과 기독교도, 유대인들이 어울려서 잘 살기도 했다. 예컨대 기독교인이 이슬람 교리가 유리하면 교회나 제국 법정이 아니라 이슬람 법정으로 송사를 가져가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발칸은 왜 이슬람화가 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오스만 제국이 핍박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차별은 분명히 존재했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 사업이나 군, 또는 관리로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개종했다. 그렇게 이슬람으로 개종해 부자나 세도가가 된 그리스인들을 ‘파나리오테’라고 한다. 물론 개별적인 개종이 아니라 ‘가문’ 전체가 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오스만 제국이 강력한 이슬람화를 밀어붙였으면 발칸이 이슬람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제국은 개종을 적극 권장하지 않았고, 심지어 개종을 거부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비이슬람은 세금을 훨씬 많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칸이 대규모로 개종해 버리면 세수가 확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교회는 왜 발칸지역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했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부패했기 때문이다. 총대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정교회는 많은 특권을 누렸다. 특권이 많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 교회는 거룩하지만, 우리 성직자는 도둑이다”란 단 한 줄로 요약된다. 결국 그리스 총대주교가 관할하던 정교회는 불가리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경제와 민생의 측면에서 발칸은 기본적으로 자작농, 또는 소농의 사회였다. 오스만 제국 시대, 그리고 일부 이후의 민족주의 시대에도, 많은 폭동이나 사회적 불안은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질 때 일어났다.
“…19세기 발칸에 일어난 대중 민족주의는 오스만 제국에서 일어난 이 같은 드라마틱한 경제 사회적 변화의 관점으로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대중 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에는 어차피 농민이 포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라든지 그 밖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땅에 대한 권리, 생계 수단, 공정한 세금이었다. 농사가 화폐로 결정되고 전통적인 세금을 현금징수로 대체하자, 농촌 지역에서는 계층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발칸에서 오스만 권력의 붕괴를 촉발시킨 원인인 1875년 헤르체고비나 폭동도 알고 보면 흉작과 그에 뒤이은 세금징수와 관련해 군인들이 농민들을 학대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pp. 76,77)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 등으로 착취를 당하면 도망쳤다. 유랑하거나, 산지로 올라가 양치기나 산적이 되거나, 아예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미국으로 대거 이주했다. 발칸의 산적은 꽤나 독특한 역사다. 이들은 저항의 아이콘이 된다. 그래서
“하이두크(Hayduk), 클래프트(Klepht), 아르마톨로스(Armatoles), 산적(Brigand)(모두 산적이란 뜻이지만 나중에는 투르크에 저항하는 반체제 세력을 발전함) 이들 모두 발칸 민족주의자 신전에 영웅으로 모셔져 있고, 이들 공적은 전설과 구비 서사시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pp.179, 180)
근대 서구 열강과의 충돌과 내부의 저항으로 오스만 제국은 약화되었다. 서구에 새롭게 불어닥친 민족주의 세례를 받은 발칸 민족들의 자각, 열강의 세력 다툼 등이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19세기 말엽부터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발칸에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정세는 복잡 미묘하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이 지역에 욕심을 내면서도 서로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의 지나친 약화는 또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생 발칸 국가들은 저마다 영토 확장 욕심이 컸고, 그 욕심만큼이나 공격적이었다. 아무 민족 이름 앞에 ‘큰 대’만 붙이면 될 정도였다. 대(大) 세르비아, 대(大) 불가리아, 대(大) 알바니아… 그리스는 고토 회복을 명분으로 터키와 전쟁을 벌였다. 한 지역의 주류 민족은 다른 지역에서는 소수민족이 되었다. 한 민족이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쫓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스에서 터키인들이 수십만 명 쫓겨났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인 100만 명이 그리스로 이주했다. “세르비아인이 사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 땅”이라는 대(大) 세르비아주의 의 슬로건은 세르비아 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심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한 듯하다. 이런 충돌은 19세기말~20세기 초 국가 형성 시기에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두 차례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를 거치면서 잠복해 있다가, 소련 동구권 붕괴 후 다시 민족주의로 분화하면서 대대적으로 폭발했다.
이보 안드리치는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 후의 피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다.
“… 아이들과 가장 필요한 살림살이들을 가지고 떠나는 그 피난은 카사바에 ‘대홍수’가 났을 때의 그 힘겹던 밤을 연상시켰다. 다만 이번에는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섞이는 일도 없었고, 공동의 불행에 대한 모색을 함께 찾으려는 공감대도 없었으며 예전처럼 대화 속에서 방법과 위안을 찾기 위해 함께 앉는 일도 없었다…” (p.435)
발칸은 그렇게 먼저 종교에 따라 갈라서고, 그다음 민족으로 갈갈이 찢어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폭발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격렬한 내전은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국한되었고, 다른 국가들은 비교적 순탄한 행로를 밟아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大)~주의의 망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21세기의 사반세기가 지나가는 동안 크게 위험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시 발칸의 폭력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4장의 표제어로 불가리아 작가의 “우리가 심은 것은 장미였으나 얻은 것은 가시뿐이다”란 말을 인용한다. 20세기 초의 혼란에 대한 탄식이다. 하지만 얻은 것이 가시뿐이라고 해서 ‘장미’를 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발칸의 폭력성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저자는 범죄율, 인구 대비 수감자 수 등의 통계를 들어 발칸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폭력적이 아님을 입증한다. 특히 폭력 범죄의 경우, 유럽 평균보다 훨씬 낮다는 주장이다.
책을 덮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성에 대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은 결국 발칸의 역사가 지역적 특성 때문에 민족 간 충돌을 야기했고, 그것이 잠재된 ‘인류 보편적 폭력성’을 폭발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20세기 초반 발칸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다.
“종교의 시대는 끝나고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오고 있었으며 민족주의는 이 둘 다에 걸쳐 있었다.”(p.186)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도 갔지만, 새로이 오고 있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둘 다에’ 민족주의는 여전히 ‘걸쳐 있다’.
Ⅱ
복수와 죽음은 운명?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는 간명하게 역사를 서술해 입문 또는 개괄서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간명하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은 점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기초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짧은 시간 루마니아를 여행하면서 얻은 발칸에 대한 인상을 그 역사를 개괄함으로써 어느 정도 구체적인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아무튼 루마니아, 보스니아를 거쳤으니, 이제 발칸에서도 ‘독특한’ 나라로 꼽히는 알바니아로 떠나보자.
알바니아를 ‘독특하다’고 표현한 것은 언어와 인종이 다른 발칸 민족 및 국가들과는 크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발칸 민족들은, 그리스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슬라브인들이 이주해 와서 형성됐다. 즉 남슬라브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알바니아인들은 스스로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보다 먼저 발칸으로 이주한 일리리아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일리리아인이란 ‘고대의 발칸반도 서부, 이탈리아반도 연안 남동부에 거주하던 인도유럽인 민족’으로 정의된다.(위키피디아) 그래서인지 언어도 주변 민족의 언어 대부분 슬라브어족에 속하지만 알바니아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현재 알바니아는 총면적 28,748㎢의 소국으로 인구는 300만 명 내외에 불과하다. 무슬림이 약 60%로 유럽에서 가장 무슬림 인구 비중이 높은 나라다. 나머지는 정교회와 가톨릭이다. 알바니아인들은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소국 코소보 인구 200만 명 중 약 90%를 차지한다. 코소보는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세르비아 내의 자치공화국 지위로 있다가 연방 해체 후 세르비아에 속해 처절한 내전을 겪은 끝에 2008년 독립을 선언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90% 이상이 무슬림이다. 알바니아와 코소보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합 의지가 강하다. 반면 세르비아는 역사적으로 코소보를 지배해 왔기 때문에 절대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발칸이라는 ‘유럽의 화약고’ 중에서도 폭발 잠재력이 가장 큰 곳이라는 뜻이다.
알바니아는 우리에게 생소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냉전시대 동유럽 공산권에서도 가장 고립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엔베르 호자란 공산 독재자는 철권을 휘두르면서 철저한 고립을 선택, 심지어 공산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과도 외교관계를 끊어버릴 정도였다.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이 없는 소국인 데다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봉쇄돼 있어 뉴스에서도 전혀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알만한 것이 없을까 찾아보면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테레사 수녀가 알바니아인이라는 사실 정도다. 그 외에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도 이주 알바니아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알바니아인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시대도 있었다. 바로 오스만제국 시대다.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의 ‘데브쉬르메’(제15화 「아름다운 발칸...모자이크 또는 난마 (1)」) 제도에 의하여 어린 소년들이 제국에 징집돼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군이나 관료로서 크게 성공한 인물이 많다. 19세기 초 현지 군벌 난립으로 혼란스러웠던 제국의 영토 이집트를 평정하고, 총독으로 임명돼 사실상 독자 왕국을 건설한 메흐메드 알리 파샤가 대표적인 사례다.
『부서진 사월』/이스마일 카다레/문학동네/2018(초판은 1999년)
알바니아 북부 고원지대의 전통 관습법 ‘카눈’, 그중에서도 복수를 소재로 한 독특한 스토리다. 복수는 ‘피를 ‘회수한다’고 표현된다. 그것은 가문의 성스러운 ‘의무’다. 이는 곧 복수로 희생된 사람의 가문에서 또 그 ‘피’를 회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복수의 무한한 순환이다. 그러므로 그 성스러운 의무를 이행한 사람은 그 즉시 다음 희생자가 될 운명이다. 그래서 삼월에 ‘피’를 회수한 사람은 살아있되 이미 죽은 목숨이며 따라서 그의 사월은 ‘부서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인간의 차원을 넘어 ‘반신(半神)’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의 눈동자는 허무와 영원의 심연이다. 거기에 생명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는 얄팍한 지성의 유희는 무참하게 익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복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승화되고, 그 허무 속에서 실존의 의미를 묻게 된다.
저자인 이스마엘 카다레는 1936년 알바니아 남부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나 티라나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1963년 처녀작 『죽은 군대의 장군』을 발표, 단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출판사 작가 소개는 “신화와 전설, 구전민담 등을 자유롭게 변주하며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내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했다”거나 “알바니아의 혼과 집단기억을 문학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리는…” 등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평가한다. 1990년 프랑스로 망명, 활발한 작품활동을 계속해 그의 작품은 ‘프랑스 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알바니아 고산지대의 관습법 ‘카눈’에 따른 복수로 삶이 ‘두 동강 나버린’ 스물여섯 청년 그조르그와 그 고산지대로 여행을 떠난 젊은 작가 부부의 이야기가 두 갈래로 진행되고 교차되는 구조다.
이야기는 그조르그가 매복하고 있다가 상대방을 소총으로 저격해 사살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의 ‘살인’은 ‘카눈’에 따른 정당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위엄’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자신의 삶도 끝난다. 그의 살인은 형을 살해한 사람에 대한 복수이지만, 그 복수가 완수된 순간 그는 희생자 가족의 복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카눈’이 규정하는 이른바 ‘피의 회수’다. 누군가의 피를 흘리면, 즉 생명을 빼앗으면, 그 피는 반드시 회수되어야 한다. 즉 복수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피의 회수’는 끝없는 복수의 순환이다. 그조르그가 속한 가문은 이 복수의 순환에서 70년 동안 “마흔두 개의 무덤을 팠다.”
복수가 이뤄지면 그 즉시 희생자의 가문에는 상대방 가문의 사람에게 복수, 즉 살해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살상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베사’다. ‘베사’는 ‘약속’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24시간 휴전의 약속을 말한다. 마을 원로들의 중재로 가해 측에서 베사를 요청하고, 피해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면 24시간 휴전이 이뤄진다. 이때 희생자의 장례가 치러지고, 이 장례에는 ‘그자크스’(‘피’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카눈에 의한 복수를 수행한 살인자를 말한다)가 반드시 참석해서 식사까지 해야 한다. 자기가 죽인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그 가족과 함께 식사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희생자가 땅에 묻힌 다음부터 ‘베사’의 24시간이 끝나기 전의 사이 시간에 대(大) 베사, 즉 30일간의 휴전을 요청할 수 있다. 피해 측에서 받아들이면 그자크스는 30일간은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대베사가 끝나면 언제 어디서든 복수는 가능하다. ‘피의 회수’는 반드시 소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자크스는 고원지대 ‘카눈’을 관장하는 대공의 오로쉬 성에 ‘피의 세금’을 내야 한다. 그곳에는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복수의 계보가 적힌 장부가 있다. ‘피의 회수’가 정확하게 이뤄졌는지, 현재까지 미회수분은 얼마이고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등등이 기록돼 있다. ‘피의 회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가문은 명예를 잃는 것은 물론 강력한 응징을 받게 된다. 그조르그는 며칠을 걸어서 오로쉬 성으로 가서 피의 세금을 낸다.
한편 작가 베시안 보릅시는 아름다운 신혼의 아내 디안과 함께 고원지대 여행을 떠난다. 베시안에게 고원지대는 ‘죽음의 땅’이고 ‘저주받은 산정(山頂)들’이다. 그에게 ‘카눈’은 흥미진진한 ‘민속’이고 작품을 위한 소재와 영감의 한 원천이다. 뿐만 아니라 이 ‘색다른’ 여행은 디안과의 부부 관계에서도 좋은 활력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다. 사실 피의 복수는 ‘카눈’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남녀의 결혼이나, 경계선 획정과 분쟁 조정 등 생활 전반의 규범을 세세하게 정하고 있다. 대도시의 작가로서는 그런 것들을 현지에서 직접 보고 체험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 멋진 기회가 될 터였다.
그러나 베시안의 기대와는 달리 디안은 이 황량한 고원에서 전혀 다른 감상에 빠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이 탄 마차와 오로쉬 성에서 돌아오는 그조르그가 조우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든다. ‘그자크스’가 된 그조르그는 살아 움직이되, 사실상 죽은 사람이다. 먹고 마시고 걸어가고 있지만, 생명은 이미 육신을 빠져나간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허무로 가득 찬 ‘저 세상’의 심연이다.
그 눈동자를 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안은 짧은 순간 그것을 보았고, 그 허무의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버렸다. 그것은 허무이되,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서 죽음은 곧 생명이다. 그 세계는 인간 세상과 신의 세상에 걸쳐 있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여행 내내 디안은 달리는 마차 창 밖으로 그 ‘청년’, 즉 그조르그를 찾는다.
그조르그 또한 디안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갈망을 갖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생명에의 갈증이 아니었을까? 그에게 희망은 단 하나. 디안을 다시 한번 ‘보는 것’이었다. 그뿐이다. 다른 어떤 생각도 없다. 그렇게 그는 대베사, 30일간의 ‘휴전’, 즉 유예 기간을 베시안과 디안이 타고 다니는 마차의 행적을 찾아 헤맨다.
일견 납득할 수 없는 ‘피의 회수’ 관습은 그러나 최소한의 회피 수단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복수를 할 수 없는 특정한 길이 여러 군데 있고, ‘그자크스’가 숨어 살 수 있는 도피성 같은 ‘유폐탑’도 있다. 또 양쪽 가문이 합의해서 ‘피 값’을 생명이 아닌 다른 금전적 가치로 치르고 마무리하는 절차도 있다. 그러나 매복과 소총사격이 원칙이고, 대세이며 명예를 지키는 수단이다. 끝없는 유혈이 불가피하고, 그래서 ‘저주받은 죽음의 땅’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베시안에게 ‘카눈’, 특히 ‘피의 회수’는 지적 유희 대상이자 관심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조르그에게 그것은 생명이고, 죽음이며, 허무이고, 숙명이다. 디안은 그조르그의 눈 속 심연에서 바로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고원지대에 영혼을 두고 ‘껍데기’만 도시로 돌아온다. 그조르그는 생명을 잃고, 베시안은 아내를 ‘잃는다’.
완고한 관습은 거미줄처럼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꼼짝할 수 없게 옭아 매고 있다. 그 속에서 한 인간은 깊은 회의 아래 절망적으로 저항해 보지만, 결국은 순응한다. 그는 무익한 구습의 희생자인가? 이 복수의 악순환은 누가 무엇 때문에 만든 것인가? 이것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눌리는 한 무력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이다. 또한 이것이 1970년대 작품임을 감안하면, 고원지대의 ‘카눈’처럼 사람의 팔다리는 물론 영혼까지 옭아매는 엔베르 호자 정권 하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베시안 보릅시의 고원지대 여행, 즉 ‘카눈’에 대한 ‘도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볍다’. 그리하여 그는 완고한 현실에 직면해 사실상 ‘영혼’을 잃고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복수의 테마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는 결국 복수의 악순환이다. 실제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은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 쇠퇴와 함께 독립 국가를 건설하면서 영토 확장을 위해 경쟁했고, 그것이 발칸전쟁으로, 또 나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이때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이 있었고, 그 앙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까지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하게 폭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내전 등으로 서로를 학살하는 ‘복수전’이 벌어졌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인 것이다. 사실 역사와 세계정세를 연결해서 들여다보면 이런 복수의 악순환 고리가 여럿 발견된다. 그런 곳은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알바니아 고원지대의 ‘카눈’은 어쩌면 인류의 숙명이면서 각 개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죽은 군대의 장군』/이스마일 카다레/문학동네/2011
이스마일 카다레를 말하면서 이 작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1963년 발표된 그의 첫 장편소설로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1999년 르몽드 지가 뽑은 ‘20세기 10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
카다레는 독특한 소재를 많이 다룬다. 『부서진 사월』도 그렇지만, 이 작품도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군대’란 전사자의 시신을 말한다. 즉 전사자가 많아서 소대 중대를 이루고 대대 연대 사단을 이뤄 ‘군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 전사자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장에 그대로 묻혀 있다. 그 시신 수습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대표단이 파견된다. 그러므로 이 일의 책임자인 장군은 전사한 장병들을 인솔해서 고국으로 귀환시키는 사령관인 셈이다. 그래서 ‘죽은 군대의 장군’이 되는 것이다.
무대는 알바니아다. 죽은 군대는 이탈리아군이다. 알바니아는 발칸반도 서부, 그리스 북쪽 아드리아해 연안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다 건너편은 바로 이탈리아의 ‘장화 뒤꿈치’와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 거리는 70여 km에 불과하다. 이탈리아는 1939년 알바니아를 침략, 1943년까지 점령하고, 그리스 침공의 발판으로 삼았다. ‘죽은 군대’는 바로 이 시기 알바니아에서 전사한 이탈리아군 장병들의 시신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소설에는 어디에서도 이탈리아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장군은 큰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알바니아로 떠난다. 과거의 전투와 매장 기록 등 자료가 있으므로 작업은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작업 환경은 열악하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도시의 아늑한 곳일 리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알바니아의 산악지대는 황량하다. 비가 내리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는 등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실제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현지 알바니아인들이다. 양국 정부 간 교섭으로 이탈리아가 비용을 부담하고, 알바니아가 협조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알바니아인들은 누구인가? 바로 몇 년 전에 자신들이 지금 발굴하고 있는 시신들과 전투를 벌였던 사람들이다. 장군은 ‘적군’ 병사들을 지휘해 자국 장병들의 시신을 발굴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의 근거지로 삼는 마을이나 도시 또한 과거 점령지로 핍박을 받았던 곳이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업이 진척된다. 그런데 시신과 함께 발굴되는 것은 추악한 전쟁의 모습이다. 이탈리아군이 운영하던 ‘위안소’, 강제 징발, 민간인 살해, 학대, 착취… 그렇지 않아도 스산한 분위기는 더욱 차가워진다. ‘장군’의 숭고한 사명감은 당혹감으로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고뇌가 된다. 자국에서 영웅이며 고귀한 희생의 아이콘으로 추앙되는 사람의 민 낯이 드러나면서 복잡한 감정은 극에 달한다.
저자는 자국의 저항과 투쟁을 외국인의 눈에 투사하여 간접적으로 그려낸다. 이 작품의 분위기는 앞서 소개한 『부서진 사월』과 전혀 다르면서도 똑같은 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굴종하는 듯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억눌려 있는 듯하지만 끝까지 저항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와 함께 같은 저자의 『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도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은 엄혹한 독재체제 하의 삶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으로 큰 반전이 있어 기억에 남는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작품은 국내에 많이 번역 소개되어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다. 나는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언급한 3권이 가장 감명 깊었다.
Ⅲ
자유, 자유, 자유!
루마니아를 출발해 발칸 전역의 역사를 훑어본 다음 알바니아까지 ‘탐험’을 했다. 발칸이 특별히 또는 원래 ‘폭력적’은 아니었음은 분명한 것 같지만, 알바니아 ‘카눈’의 ‘복수의 서사’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특별한 ‘기운’ 같은 것이 흐르는 느낌도 받는다. 그런 흐름을 가지고 이제 그리스로 가 본다.
그리스는 지금까지 살펴본 발칸의 다른 나라와는 결이 다르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20세기 역사에서 그리스만 공산권에서 벗어나 있었고, 또 그 이전 고대로부터 그리스는 이곳의 ‘주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다른 경험과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경험’이 더 많고, 그래서 함께 묶어서 보는 것이 종종 유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책, 그리스 하면 무조건 떠오르는 『그리스인 조르바』다.
그것은 감전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1974년에 나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고향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이불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서울에 왔다. 낯선 하숙방에서 뒹굴다가 맞은 첫 주말, 그 유명하다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가보기로 했다. 잔뜩 주눅이 들어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큰맘 먹고 책을 두어 권 샀다. 그중 하나가 어떤 문학지 과월호였다.(나는 ‘창작과비평’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아닌 것 같다) 거기에 ‘希臘人 조르바’란 제목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희랍인이라니, 그것도 한자로… 그러니 뭔가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첫 부분에서부터 대뜸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 왔다. 바닷가 부서지는 포말, 시끌벅적한 뱃사람들, 창밖으로 보이는 미지의 인물, 단박에 자신을 들이대고 고용하라는 무뚝뚝한 사내, 그리고 ‘짐승’ 같아서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는 악기 산투리… 이런 모든 것 하나하나가 너무나 신비로웠다. 마치 모험하는 신밧드가 된 양 흥분과 열광 속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르바를 만났고, 이후 1974년 박석기·이인웅 공역으로 나온 국내 첫 번역본, 그다음 1980년 이윤기 선생 번역본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지금까지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서 읽는 ‘나의 인생책’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열린책들/2000(최초 번역본은 1974)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 ~ 1957)는 크레타 출신의 그리스 현대 문학의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다. 두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와 마지막까지 경합한 끝에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카뮈가 자신보다 “카잔차키스가 더 수상자격이 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서 흔히 노벨 문학상보다 더 높이 있는 작가라는 말도 듣는다. 오스만제국의 지배, 터키와의 전쟁에서의 패배 등을 겪었고,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베르그송과 니체에서 불교로 가는 사상적 철학적 여정을 거쳤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는 그리스 정부에서 공공복지부 장관도 역임했다. 공산주의 성향으로 탄압도 받았고, 이후 소련 체제에 실망해 공산주의에도 회의적으로 변했다. 국내에서는 그의 전집이 나올 정도로 독자가 많고, 특히 이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는 세대를 이어가면서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스토리 뼈대는 화자인 ‘나’와 조르바가 만나 크레타 섬에서 갈탄 채굴 사업을 벌였다가 망하는 과정이다. 물론 사실 중요한 것은 갈탄 사업이 아니라 ‘나’와 조르바의 만남을 통하여 이어지는 깊은 인간 탐구와 사유의 여정이다.
‘나’와 조르바는 크레타로 떠나는 부두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로 의기투합, 함께 갈탄 사업의 동반자가 된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나’를 보던 60대 조르바가 성큼 들어와 묻는다.
“여행하시오?”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하느님의 섭리만 믿고 가시오?”
“크레타로 가는 길입니다. 왜 묻습니까?”
“날 데려가시겠소?”
조르바는 이처럼 직관적이고 단도직입적이다. 그리고 결정해 버린다.
“…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 버리는 거요.”
이렇게 동행은 결정된다. 길지 않은 대화지만,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영혼의 동반자임을 직관한 것이다.
그렇게 크레타로 가서 두 사람은 갈탄 사업을 시작한다. ‘내’가 투자하고 조르바가 현장을 총괄 지휘한다. ‘나’는 조르바에게 실무를 일임한 채 사색하고, 기다리고, 그래서 조르바가 돌아오면 대화하는 데 몰두한다. 조르바는 수많은 상념과 잡다한 인간사를 촌철살인의 몇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해 버린다. 공허와 허무, 윤회와 업보, 좀 더 현실적으로는 그리스 민족의 고난과 미래 등등의 상념은 조르바의 투박한 말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고 ‘나’를 깨우친다.
조르바는 ‘나’를 ‘두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결정적인 충고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책을 “확 불 싸질러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쓸모 있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음모가’ 일 수도 있지만, 본질은 단순하고 순진하다. 그래서 자유롭다. 길가의 꽃 한 송이에도 그 생명력에 경탄할 정도로.
그러므로 그는 위선을 참지 못한다. 산 위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이미 물질주의, 남색 등 그곳의 온갖 위선의 냄새를 맡아낸다. 조르바는 위험한 열정에 사로잡힌 수도사를 부추겨 수도원에 불을 지르게 하고야 만다.
조르바는 난봉꾼이다. 그러나 그의 난봉은 ‘과부’의 한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늙은 ‘부블리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해준다. 이미 볼품없이 늙어버린 옛 카바레 가수지만, 그는 여전히 그가 젊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인 것처럼 위선을 떤다. 귀여운 위선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부블리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리고, 망자를 위하여 최고의 애도를 바친다.
난봉 끼는 끝이 없다. 조르바는 대도시로 장비와 물품을 구매하기 위한 출장을 떠난다. 그러나 도착 첫날부터 젊은 직업여성을 만나 진탕 놀면서 돈을 탕진한다. 결국 빨리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고서야 일터로 돌아간다. 돌아와서는 변명하느라 쩔쩔맨다. 선물도 사 오고… 변명도 가관이다. ‘내’가 여자 화장비누 냄새가 난다고 빈정거리자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아, 두목. 내가 얼마나 박박 문질러 씻은 줄 아세요? 무지하게 씻고 닦았어요, 두목을 만나기 전에 살가죽이 벗겨지도록 박박 문질러 있었어요…. 그런데 이이고 이놈의 냄새… 하지만 도리 있습니까? 머지않아 없어질 겁니다. 나도 이 짓이 처음이 아니니까… 없어질 겁니다.”
갈탄사업은 망한다. 산 위에서 채취한 갈탄을 해변으로 운반하기 위해 철탑을 세워 케이블로 이송하게 만들었다. 모든 설비가 완성된 다음 축복을 위해 수도승들을 부르고, 마을 사람들도 오고, 파티를 준비했다. 그러나 시운전을 시작했을 때 재앙이 벌어진다. 첫 번째 테스트로 통나무를 매달아 내렸는데 마찰로 인해 불이 붙어 불덩이가 되어 떨어진다. 조르바는 괜찮다면서 2번째, 3번째 계속 시도한다. 그리고 4번째… 마침내 철탑이 모조리 무너지고 만다. 수도승들, 인부들, 마을 사람들 모두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파티를 위하여 굽고 있던 양고기만 익어가고 있다. 그다음이 걸작이다.
“양고기가 숯이 되어버릴라!”
조르바가 이렇게 소리치며 꼬챙이 쪽으로 달려갔다…. 우리 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잘 구워졌어요. 잘 익었는데요. 두목, 한 점 해보시겠어요?”
“빵과 술도 가져와요. 배가 고픈데.”
그렇게 둘 만의 파티가 시작되고 조르바는 클래프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클래프트’란 산적이다. 그러나 보통 산적이 아니라 후에 발전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그리스 민족주의 저항 조직이다. 조르바는 클래프트의 일원으로 불가리아 군대와 싸우던 시기 결전을 앞두고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먹었던 양고기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노래한다.
“얘들아 나는 이래 봬도 클래프트 산적 떼로 40년을 설쳤네…”
그리고 둘은 춤을 춘다. 그리스의 전통 춤으로 ‘잘못’ 알려진 ‘시르타키’다. 시르타키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조르바 역은 앤서니 퀸이다. 그가 아니면 누가 조르바 역을 할 수 있겠는가!)에 나오는 것으로, 이 영화를 위해 창작한 안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이 전통 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까, 전통 춤의 현대적 안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 춤은 수많은 영화 팬들의 뇌리에 각인돼 조르바의 ‘자유’를 상징하는 몸짓으로 기억되고 있다.
‘클래프트’는 앞서 설명했던 발칸 산적 ‘하이두크’ 전통의 그리스 버전이다. 그렇게 조르바는 나무꾼 목동 산적 군인 광부 등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20세기 초반 그리스 역사의 현장을 누비고 다녔고, 그런 삶은 곧 그리스 민족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투쟁의 역사였다. 그리고 ‘내’ 게는 불교적으로 ‘해탈’의 길을 걸어온 ‘성자’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조르바는 다시 유랑의 길로 들어가 루마니아 러시아 등지로 떠돌다가 생을 마감한다.
여기서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그의 이름이다. 그는 간간히 엽서나 편지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그의 서명으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거룩한 은둔자 알렉키오스 신부” – 이것은 수도원에 있다는 이야기다. “시궁창 생쥐 알렉시스 조르베스쿠” – 이것은 루마니아에서 온 엽서다. “전 홀아비 알렉시스 조르비크” – 이것은 시베리아다. 이들 이름은 그리스 디아스포라의 숱한 고난을 상징한다. 그리스 독립과 그를 둘러싼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수십만, 수백만 명이 집단 이주했다. 말은 이주지만, 사실은 기근과 폭력, 살상에 노출된 위험한 탈출, ‘엑소더스’다. 이 작품에도 중요한 에피소드로 들어있는 것이 화자인 ‘나’의 친구가 러시아에서 넘어오는 그리스인들을 인도하기 위해 헌신하다가 죽는 장면이다. ‘나’는 늘 그를 위해 노심초사하지만 결국은 사망 소식을 듣고 만다.
‘하이두크’-‘클래프트’ 서사가 발칸적인 공통점이었다면, 또 하나 공유하는 가치 또는 관습이 있다. 바로 『부서진 사월』의 주 테마인 ‘피의 회수’ 관습이다. 여기서는 ‘과부’ 에피소드에서 일종의 ‘명예 살인’, 또는 ‘복수’의 피를 볼 수 있다. ‘나’와 조르바가 사는 곳에 가까운 마을에 아름다운 과부가 살고 있다.(‘과부’란 표현이 옳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읽은 책에 사용된 용어이므로 그대로 쓴다) 그녀는 ‘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마을의 다른 청년이 그녀를 짝사랑한다. 그 청년은 이 짝사랑의 아픔과 함께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삶에 절망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을 ‘과부’ 탓으로 돌리고 마을을 선동한다. 결국 과부는 마을을 어지럽히고, 청년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살인자’로 몰려 마을 사람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끝에 살해되고 만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로 심판한다”라고 외친다. 기실은 하느님도 정의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일말의 연정을 품었던 ‘나’는 무기력하게 슬픔에 빠지지만, 비겁하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만다. 그날 “내가 내린 구역질 나는 결론은, 일어난 사건은,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서로가 연정만 품었지, 실제로는 어떤 정분도 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넘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가지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했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 스토리 라인보다는 화자인 ‘나’의 상념, 그리고 나와 조르바와의 대화에서 보이는 영적인, 또는 철학적인 흐름이 더욱 소중한 내용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란 거장이 수백 페이지에 걸쳐 서술한 것을 우리가 몇 줄, 몇 페이지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내용을 훼손하는 행위가 될 것이어서 섣불리 시도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조르바의 ‘자유’에만 주목하는 것은 반쪽짜리 독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이 작품을 접하고, 그래서 조르바와 ‘자유’를 말한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키워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과 다른 별개의 작품이다. 소설은 ‘나’의 사유, 그리고 ‘나’와 조르바의 대화 등 두 갈래로 진행된다. 영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 큰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독서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