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에서 사마르칸트까지… 첵이 이어주는 기억
『둔황』/이노우에 야스시/문학동네/2018
『사마르칸트』/아민 말루프/교양인/2003
Ⅰ
카자흐의 고려인 소녀
그 소녀는 유달리 키가 작았다. 아니 그 아이가 작았다고 하기보다는 함께 있던 친구들 키가 컸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35년 전(1990년)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알마티의 당시 명칭) 외곽 어느 공원에서 만난 소녀들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키 작은 아이는 동양인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서양인 얼굴이면 십중팔구 러시아인이고, 동양인 얼굴이면 카자흐인 아니면 고려인이다. ‘까례얀까(러시아어로 ‘코리언’의 여성형)냐고 물었더니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한다. 러시아 아이들 틈에서 왜소해 보여서 안쓰러웠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놀라면서 신기해한다. 당시는 아직 소련이 해체되기 전이었고, 그곳은 한국인의 방문이 거의 없었던 곳이었다.
그 아이는 한국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할머니가 한국어를 하시는데 자기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다. 고려인 4세다. 그 아이의 선조는 ‘원동’(‘극동’의 러시아식 용어)에서 이곳으로 강제 이주 당했을 것이다. 강제 이주 이유는 ‘이적 행위’를 할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따라서 소련 당국은 극동지역의 한인들이 일본 편에 설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한인들은 짐짝처럼 열차에 실려 카자흐, 우즈베크 등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환경이 열악했던 곳은 심지어 주거지도 마련되지 않아서 한겨울에 땅굴을 파고 추위를 피해야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 곳에서 한인들은 맨주먹으로 땅을 일궈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그냥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근명성과 기술로 생산성을 크게 높여 농업 생산은 물론 그 지역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주의 ‘김병화 콜호즈’(집단농장)이다. 그는 소련 시대 2번이나 ‘노력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0년대 당시에는 오랜 ‘철의 장막’이 걷히고, 한국과 소련이 교류의 물꼬를 튼 시기였다.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정체성을 찾는 열기가 높았고, 그와 함께 한국에 대한 관심도 컸다. 소녀를 만나기 전, 나는 이미 알마아타에서 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고려인 역사학자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또 그전에는 우연히 독립운동가 황운정 옹의 장례식에도 참석, 그 지역 고려인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내가 접한 사람들은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었고, 젊은 축이라고 해야 40대였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은 그렇다 치고, 나는 이 어린 소녀에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우선 그 아이의 가정환경은 그저 고려인이라는 것 외에는 민족 정체성에 대한 어떤 교육도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소련의 ‘공민’(시민)이라는 인식이 있을 뿐이고, 러시아인 소녀들의 틈바구니에서 같이 어울려, 어쩌면 러시아적 정체성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민족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카자흐 인이라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나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콧잔등이 시큰하기도 했다. 그 아이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정말 단 한 가지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강한 끌림을 느꼈다. 나는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조카를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아이도 그랬다. 말과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체성에 대한 기본 인식은 그냥 체득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흔히 “핏줄은 못 속인다”라고 하지 않는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래 이야기했다. 대중가요가 담긴 카세트테이프, 한국 소개 화보집 등 가지고 있던 것을 선물로 주고 헤어졌다.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음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 아이도 초로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평생을 간직한다. 내가 별생각 없이 행동했더라도,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평생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의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기억이 그러할진대 기록은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가끔 몇 백 년 전 누군가 쓴 일기 같은 것이 발견되어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는 기사를 접한다. 안동의 ‘월영교’에 얽힌 사연이 그러한 사례다. 이 다리는 2003년에 만들어졌지만, 사연은 4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조선 중기에 살았던 이응태라는 사람의 묘를 이장하다가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응태의 처 ‘원이 엄마’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적어 무덤에 함께 넣은 애절한 편지였다. 편지의 날짜는 병술년(1586년) 유월 초하룻날로 되어 있다. 편지와 함께 ‘원이 엄마’의 머리카락을 섞어 넣어 짠 미투리도 발견되었다. 이 사연은 2007년‘Locks of Love’란 제목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되었다고 한다. ‘월영교’는 이런 사연을 모티브로 한 다리다. ‘원이 엄마’는 자신의 편지가 40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인의 심금을 울릴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수천 년, 수백 년 전의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두루마리, 필사본 등은 오늘날도 끊임없이 새로 발견된다. 기억이 기록이 되고, 기록이 다시 기억이 되는 순환이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오늘 쓰는 이 글이 어쩌면 수천 년, 수만 년 후에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Ⅱ
독립투사 또는 볼셰비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과 관련해서 황운정 선생 이야기를 좀 더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황운정 선생은 1989년 12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때 마침 나는 알마아타에 머물고 있었다. 그 장례식에 참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당시 나는 그분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과거 우리나라가 올림픽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하고 있을 때, 유명한 소련의 한국계 선수들이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5개나 따낸 체조의 넬리 킴, 올림픽 금메달을 직접 따내지는 못했지만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빙상 팀 감독으로 소련의 종합 1위 달성에 큰 기여를 했던 마이 황 등이 유명하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올림픽 금메달 갈증에 대리만족을 주는 존재였다. 그중에서 바로 이 마이 황이 알마아타에 살고 있었고, 나는 그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것이다. 마이 황의 풀 네임은 ‘마이 운데노비치 황’. ‘마이’는 이름이고 ‘운데노비치’는 부칭이다. 즉 ‘운덴’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는 소련 빙상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어서 그곳에서는 모두 ‘마이 운데노비치’라고 불렀다. 이렇게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은 존경의 표시다. 보통 가까운 사람끼리는 애칭을 사용한다. 그 부친의 이름 ‘운덴’이 ‘운정’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것이다. 황 마이는 황운덴, 즉 황운정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황 마이 일가로부터 부고를 받고, 뜻하지 않게 황운정 선생의 장례식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실제로 그렇게 소개되었다.) 매장 절차가 끝나고 시내 큰 식당에서 식사가 있었다. 이 식사는 단순히 밥을 먹는 자리가 아니라 장례식의 연장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엄숙한 자리다. 당시 알마아타의 유력 인사들이 다 모였다. 식사에 앞서 한 사람씩 일어나 추모사를 하고, 건배를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이 순서는 끝이 없었다.
러시아인들의 추모사는 ‘당에 대한 충성’을 칭송하는 것 일색이었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 용감한 볼셰비키로 붉은 군대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 그의 공적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나열했다. 독립운동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고려인’, 또는 ‘한인’으로서의 황운정 선생 추모가 아니라 볼셰비키로서의 ‘황운덴’에 대한 추모였다. 나는 독립운동사를 깊이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운정 선생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장례식에서 들은 추모사를 통하여 그를 소련의 영웅으로만 기억했다.
그런데 2005년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2019년에는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는 뉴스도 들었다.
넬리 킴은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TV 인터뷰를 본 적은 있다. 넬리 킴은 몬트리올 올림픽 도마에서 10점 만점으로 금메달을 따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여자 기계체조의 전설이다. 그런 만큼 국내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컸다. 국내 어느 TV 기자가 마침내 그녀에게 마이크를 대고 인터뷰를 시도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러시아어로 간략하게 답변했다.
“나는 소련의 공민입니다.”
한국어 자막은 다르게 나왔음은 물론이다.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넬리 킴은 벨라루스, 황 마이는 카자흐스탄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두 소련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 그때의 사정을 감안하면 그런 태도, 그런 답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00년대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것은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야기이고 기억과 기록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이는 고국에서 수만 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기도 하고, 그런 사연은 어딘가에 묻혀 있다가 수천 년, 수백 년 후에 발견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기도 한다. 그런 사연을 찾아 멀리 서역으로 떠나보자. 이 여행은 둔황을 거쳐 사마르칸트로 향한다.
Ⅲ
사막의 대장서관
제12화부터 16화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세기말 모습에서 이슬람세계를 거쳐 발칸지역까지 길고 숨 가쁜 여행을 했다. 이제 휴식을 위해 오아시스를 찾는다.
『둔황』/이노우에 야스시/문학동네/2018
일본 작가가 쓴 중국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한 인간의 좌절과 모험, 애틋한 사랑과 영혼의 안식을 찾으려는 신앙, 그리고 기록, 즉 책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과 거의 천년을 뛰어넘은 기적 같은 발견 등의 스토리가 다이내믹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대한 스케일에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절묘하게 버무려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냈다.(실제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노우에 야스시(1907~1991)는 일본에서 ‘국보급’으로 추앙받는 작가다. 시 수필 소설 미술평론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역사소설은 치밀한 취재와 연구를 바탕으로 수작을 남겨 일본의 여러 문학상을 휩쓸기도 했다. 이런 그의 명성은 이 작품, 『둔황』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대가 되는 서역의 사막, 오아시스, 산맥, 강 등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하게 묘사된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은 가보지도 않고 썼다는 사실이다. 그가 처음 둔황을 방문한 것은 이 작품을 쓰고 20년 후였다고 한다. 그만큼 치밀하게 연구하고 조사했다는 뜻이다.
때는 중국 북송시대, 서기 1026년이다. 주인공 조행덕은 뛰어난 실력으로 급제를 자신하고 있는 과거 응시생이다. 어느 날 그는 상서성의 시험에 불려 나간다. 이 시험만 통과하면 황제 앞에서 답변하는,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전시(殿試)’만 남겨놓게 되고, 그것마저 통과하면 고관대작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자기 순서를 기다리던 행덕은 깜빡 잠이 든다. 그리고 황제 앞에서 당시 송나라의 골칫거리인 ‘서하(西夏)’의 침범에 대한 계책을 설파하는 꿈을 꾼다. 그 사이 자기 순서가 지나가 버리고, 잠에서 깬 행덕은 속절없이 모든 것을 날려버린 것을 깨닫는다. 일장춘몽이었다. 그렇게 과거를 망치고 그의 인생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서하는 1038년에서 1227년까지 중국 북서부 간쑤 성, 산시성에 위치했던 티베트인의 분파인 탕구트족의 왕조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시작하는 시대는 서하가 야심 차게 힘을 키우면서 왕조를 건설해 나가던 시기다.
조행덕은 과거를 망쳐버린 허탈감에 저잣거리를 방황하다 우연히 사지에 몰린 서하 여인을 돈으로 사서 구해주게 되고, 그녀로부터 미지의 문자가 적힌 천조각을 하나 받는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 시험에 대한 집착을 내던져버린다. 그 빈자리는 그 여인에 대한 강렬한 인상과 미지의 문자가 이끄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 자리 잡는다. 그 미지의 문자는 서하 문자였다. 그래서 그는 서하로 가기로 결심한다.
행덕은 천신만고 끝에 서하의 변방에 도착하지만, 그 시대에 낯선 이방인을 환대해 줄 리는 만무하다. 그는 붙잡혀 얻어맞은 다음 말단 병사로 서하 군에 강제 편입된다. 그 부대는 서하 군이지만 한족으로 구성돼 있다. 지휘관은 난폭하고 무식한 주왕례란 사람이다. 주왕례 부대는 서하에서는 이방인들이므로, 요샛말로 하자면 ‘총알받이’에 가까웠다. 그래서 전투마다 선봉에 서는 기병대이고, 매번 대부분이 전사한다. 주왕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늘 전투에 앞장선다. 평생 공부만 한 백면서생 행덕은 형편없는 병사다. 그러나 체구가 크지 않고, 힘이 없어도 말안장에 달린 발석기(發石機)로 돌만 날리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기병으로서는 유리했다. 게다가 삶에 연연하지 않아서 두려움도 없었다. 그래서 전투 때마다 자잘한 부상은 입기도 했지만 늘 살아남았다. 몸을 말에 묶어놓기 때문에 전투 중 실신하고, 결국은 말에 실려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병사 생활과 전투에 적응하고, 주왕례와도 어떤 동지애 같은 것이 생겨 나날을 보내던 중 위구르족의 한 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위구르 왕족 여인을 만나 숨겨 주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달콤한 꿈도 잠시, 이별을 맞는다. 그사이 그가 글을 알고 학식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신분이 상승했고, 마침 서하 문자를 배울 기회가 되어 수도 흥경으로 가게 된 것이다. 행덕은 1년을 약조하고, 그녀의 뒷바라지를 주왕례에게 맡기고 떠난다. 위구르 왕족 여인은 행덕에게 자신의 쌍목걸이 중 하나를 증표로 준다.
흥경에서의 생활은 당연히 전장을 전전하던 때와 비교하면 안락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글을 읽고 쓰는 것, 즉 본업으로 돌아온 셈이니 행덕은 보람찬 나날을 보낸다. 전장에서 생사를 넘나들다 보니 이전에 경멸했던 불교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그렇게 시간은 1년을 넘어 빠르게 흘러갔다. 흥경에 그대로 눌러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행덕은 다시 주왕례가 있는 ‘전선’으로 돌아간다. 주왕례와 위구르 공주가 어떤 숙명처럼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행덕에게 주왕례는 퉁명스럽게 위구르 왕족 여인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전쟁으로 돌아간다. 어느 날 성 안에서 길을 가던 행덕 앞에 훗날 황제를 칭하게 되는 서하군 총사령관 이원호의 행렬이 지나간다. 그런데 이원호를 따라 말을 타고 지나가는 여인이 행덕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은 황급히 말을 달려 지나가고, 행덕은 그녀가 죽은 줄로 알고 있던 위구르 왕족 여인임을 알아본다. 얼마 후 출정을 앞두고 이원호의 사열을 받고 있던 행덕은 성벽 위 봉화대에서 떨어지는 한 점 같은 것을 목격한다. 위구르 왕족 여인이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것이다. 행덕이 없는 사이 주왕례가 그녀를 정부로 삼았고, 그 후 이원호가 그녀를 빼앗아간 것이다. 행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을 자책하면서 죽고 난 후 오히려 그녀를 더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행덕의 사랑은 불심으로 승화된다. 그리하여 그는 불경을 서하 문자로 번역하는 일에 매달린다. 주왕례의 부대는 마침내 사주, 즉 둔황에 입성, 이원호의 서하군 본진을 기다린다. 주왕례는 그러나 이원호 군을 영접하는 척하면서 공격해 이원호를 죽이려 한다. 그렇게 주왕례 군과 이원호 군이 맞붙게 되고, 병력은 물론 모든 면에서 열세인 주왕례는 패배하고 전사한다. 주왕례 군은 도주하면서 사주성을 이원호의 서하 군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불을 지른다. 이때 행덕은 그곳 사찰들이 소장하고 있는 엄청난 분량의 불경을 화마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일부 승려들과 합심해 서책들을 상자에 담아 봉한다. 그리고 피난 가는 사주 태수의 귀중품을 탐내 그것을 석굴에 숨겨주겠다고 하는 위지광이라는 탐욕스러운 상단 대장을 이용한다. 불경이 든 상자를 태수의 귀중품이라 속여 석굴에 숨기는 것이다. 행덕 일행은 위지광이 석굴에 파둔 감실에 서책을 쌓은 다음 밀봉한다. 그렇게 사주는 파괴되고, 사찰과 남은 귀한 서책들은 불에 타 사라진다.
그로부터 850년 후 한 도인이 우연히 석굴군을 발견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경이 숨겨진 감실을 막은 흙이 부푼 것을 보고 평평하게 하려고 파내다가 그 속에 있는 엄청난 양의 서책들을 보게 된다. 그는 당국에 신고했으나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이후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지의 학자들이 찾아와 얼마간의 돈을 주고 이 서책들은 사갔다. 그리고 나중에는 베이징에서 군이 들이닥쳐 남은 모두를 수거해 갔다. 이것이 막고굴, 즉 둔황 석굴과 방대한 양의 고대 불교 경전과 서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사연이다.
행덕이 이처럼 목숨을 걸고 불경을 지켜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불경 번역 작업을 하던 중, 자신이 지켜주지 못한 위구르 왕족 여인을 위한 ‘공덕’이라는 의무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번역작업에 가일층의 열의를 가지고 임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무감이었다. 인생무상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했던 데서 한걸음 나아가 위구르 여인에 대한 사랑도 영원으로 승화된 것이다. 또 자신에게서 그 여인을 빼앗은 격인 주왕례에 대해서도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게 되었다. 그것이 불경을 화마로부터 지키는 행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 행덕의 눈앞에 불현듯 과주성을 탈출할 때 본 시뻘건 불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과 똑같은 불길이 당장 오늘 밤에 사주를 덮쳐, 조 씨 일족을 멸망시키고, 경전을 태우고, 성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행덕의 뇌리를 스쳤다. 다름 아닌, 경전만은 이곳에 닥칠 운명으로부터 구해낼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불쑥, ‘영원’이라는 글자가 행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복받쳐 오르는 감동에 행덕의 가슴은 크게 요동쳤다….”
그렇게 막고굴의 한 구석은 ‘사막의 대장서관’이 되었다. 한 사람의 사랑이 신심으로 승화되고 그 믿음이 ‘영원’으로 가는 길을 연 것이다. 어떤 이는 탐욕으로 굴을 팠지만, 그것은 사랑과 믿음의 힘 앞에서 영원으로 승화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변용, 놀라운 이적이 아닐 수 없다. 조행덕이란 인물은 작가의 창작이지만, 어쩌면 막고굴의 고문서는 이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한 사연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Ⅳ
사마르칸트의 시인
둔황이 실크로드에서 서쪽으로 갈 때,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출발지라면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한 중심지로 페르시아·투르크·몽골·이슬람 문화가 교차하며 화려하게 번영한 ‘문명의 교차로’였다. 산지와 사막, 그리고 강 사이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로 실크로드의 전략 요충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이곳을 점령했다. 당시 도시 이름은 ‘마라칸다’였다.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오아시스 도시로 발전해 있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사마르칸트에서 볼 수 있는 역사 유적은 대부분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유산이다. 레기스탄 광장, 비비하눔 모스크, 티무르 황제 일가의 영묘인 구르 아미르 등이 유명하다. 비비하눔은 티무르의 애첩 사라이 물크 하눔의 이름을 따 명명된 것이다. 이 일대가 이슬람화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8세기의 일로 우마이아 왕조 칼리프 치하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앞서 알마아타의 키 작은 고려인 소녀와 소련 빙상팀 감독 황 마이 씨 일가 이야기를 했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중심지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이다. 알마아타와 같이 이곳, 카자흐스탄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등지에 고려인들이 많다. 내가 방문했던 1990년 당시만 해도 비비하눔 모스크 옆의 중앙시장, ‘시압 바자르’에는 고려인 아주머니들이 직접 담근 김치를 파는 점포가 여럿 있어서 한 코너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가슴 아팠던 기억은 그 아주머니들의 아들 자랑이었다. 자랑스럽게 내 보이는 사진은 십중팔구 군복 차림이었다. 그중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찍은 사진도 여럿 있었다. 그때는 이미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다음이었지만, 그런 사진으로 미뤄볼 때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 젊은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희생되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실제 여러 가지 기록에서 아프간 전몰 소련군 병사들 중 고려인으로 확인된 사례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휩쓸려 러시아의 극동지역으로, 거기서 중앙아시아로, 또 거기서 징집돼 아프가니스탄까지, 그렇게 원하지 않는, 명분 없는 전장에서 스러져간 청춘들… 아주머니들과 함께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소설 『둔황』에서 주인공 행덕이 타국인 서하 군의 병사로 전장에 내몰린 운명과 비슷한 것일까? 아니다. 그래도 행덕이 서하 행을 결심한 것은 최소한 스스로의 뜻이었다.
사마르칸트는 둔황에서 서쪽으로 약 2,400㎞ 떨어져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캐러밴이 이동한다면 타클라마칸 사막과 텐산산맥, 파미르고원 등을 지나는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중심부는 그야말로 ‘죽음의 땅’이라 캐러밴이 통과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주변을 우회해 타림분지의 북쪽이나(텐산 북로), 남쪽(텐산 남로)으로 돌아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가야 한다. 북로로 가면 둔황-투루판-우루무치-쿠차- 카슈가르, 남로로 가면 하미-호탄-카슈가르를 거친다. 거기서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타슈켄트를 거쳐 사마르칸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파미르와 텐산의 험준한 고개를 넘고 강도 건너야 한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다. 자동차로 이동하면 대략 300㎞ 거리이고, 내 기억으로는 4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당시에는 가는 길에 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혀 지체되지 않아서 그렇지 오늘날 교통량이 많아졌다면 시간은 더 걸릴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고속철도가 개통돼 2시간이면 갈 수 있고, 항공편도 생겨서 1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제국의 수도였고 그 유적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천년 이상 앞선 시대부터 교역과 문명의 교차로서 꽃 피웠던 찬란한 문화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 일부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소설 『사마르칸트』다. 내가 갔을 때는 관광객도 없었고, 주요 유적지들이 제대로 복원, 정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레기스탄이나 비비하눔도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레기스탄 광장에 혼자 섰을 때의 그 공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치 중세에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은 고독감, 그 속에서 실크로드의 동서문명이 혼합된 신비한 향기가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듯했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랬고, 순백의 뭉게구름은 보석처럼 빛났다.
『사마르칸트』/아민 말루프/교양인/2003
제목 그대로 사마르칸트에 바쳐진 작품이다. 『둔황』이 불교 경전을 모티브로 11세기 한 지식인의 삶과 사랑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를 물었다면, 이 『사마르칸트』는 한 시인의 삶을 매개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지은이 아민 말루프는 1949년 레바논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다. 2022년 제11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해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그는 1986년 르네상스시대를 배경으로 한 첫 장편소설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발표해 작가로서의 이름을 알렸다. 이어 1988년에 발표한 『사마르칸트』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작품으로 아민 말루프는 프랑스출판협회상을 받고, “동방의 지성을 대변하는 새로운 거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993년 19세기 레바논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 『타니오스의 바위』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상을 받았다.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중동 아프리카 지중해 세계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에 환상적인 요소와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종교적, 정치적 갈등과 그로 인한 ‘폭력’을 그려냄으로써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마르칸트』는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다. 스토리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전반부는 오마르 하이얌의 삶을 그린다. 후반부는 그로부터 800여 년 후 하이얌이 남긴 필사본, 즉 ‘사마르칸트 필사본’의 행방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화자는 프랑스계 미국인 벤저민 O. 르사즈로 전반부는 ‘사마르칸트 필사본’에 삽입된 연대기(하이얌의 전기 격으로 그의 제자가 써넣은 것)를 바탕으로 하이얌의 삶을 재구성해 서술하는 형식이다. 후반부는 화자가 직접 ‘사마르칸트 필사본’의 행방을 쫓으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페르시아, 즉 이란의 19세기말 ~ 20세기 초의 근대 격변사를 보여준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픽션을 가미한 것으로 화자 자신이 한 행위자가 되어 겪은 여러 사건을 회고하는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야기는 오마르 하이얌이 사마르칸트에 온 데서 시작해서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데서 끝난다. 왜 느닷없이 타이타닉 호가 등장하느냐고? 그 사연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그것은 하이얌이 시를 통해 일찍이 설파한 예언과 같은 것이다.
오마르 하이얌은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학자다. 그의 ’루바이’ 즉 4행시 시집인 ‘루바이야트’로 유명하다.(국내 번역본도 나와있다: 『루바이야트』/지식을만드는지식/2020) 그러나 루바이야트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영어 번역본을 낸 후이다. 그전에 하이얌은 시인이 아닌 수학, 천문학, 철학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운 것으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예컨대 대수학에서 미지수 ‘x’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방정식 연구, 이항 정리 등 수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천문학에서는 별과 행성의 움직임을 관측해 태양년의 길이를 아주 정확하게 계산해 냈고, 1079년에 이미 16세기 그레고리력보다 정확한 태양력 ‘잘랄리력’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수학 천문학 업적도 언급되지만 ‘루바이’ 즉 시를 더 많이 조명한다.
그는 1048년 ‘6월 18일 동틀 무렵’ 오늘날의 이란인 페르시아 니샤푸르에서 태어나 1131년 12월 4일 사망했다. 생일을 이처럼 정밀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어머니에게 묻고, 천문학 지식을 활용해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일생을 하나의 키워드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관조(觀照)’라고 하고 싶다. 이것은 이 책에 묘사된 그의 삶과 그가 쓴 시를 통해서 받은 인상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 책에 나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신이시여. 당신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제가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부족했다면 용서하소서!”
즉 그는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았고, 정치와 폭력에서 늘 한걸음 물러나 있었으며,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종교의 신념에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부단히 노력했다”, “부족했다”는 말은, 이 책에 묘사된 그의 삶에서 유추해 보면, 그런 의미다. 그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과 쾌락, 포도주를 즐기는 현실주의자이자 자유사상가였다. 루바이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권력과 종교의 폭압 속에서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에서는 그가 꿈꾸는 자유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의 도피처는 학문이고, 시이고, 포도주이고, 사랑의 쾌락이다. 그렇다고 해서 방종한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의 사랑에서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반부에는 세 사람의 삶이 대조를 이룬다. 하이얌과 재상 니잠 알물크, 암살교단 창시자 하산 사바흐. 이들은 모두 페르시아인이고, 당시 왕조는 투르크 족의 셀주크였다.
하이얌은 사마르칸트에 도착해 저잣거리로 나섰다가 거리 폭력사건에 휘말려 재판관 앞에 나간다. 이미 명성이 높았던 터라, 재판관은 그를 알아보고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지만 하이얌은 거절한다. 그러나 재판관은 하이얌에게 거처와 연금을 제공한다. 특히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건인 고품질의 종이로 만든 책을 선물한다. 그 책은 백지다. 하이얌이 내용을 써서 채우라는 것이다. 이후 하이얌은 어디를 가더라도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거기에 시를 쓰고, 나중에는 제자에게 자기 삶을 이야기해 주면서 여백을 채우게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모티브가 되는 ‘사마르칸트 필사본’이다.
사마르칸트에서 하이얌에게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부하라의 여성 시인 자한을 만난 것이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은 곧 깊은 관계를 맺고 연인이 된다. 자한과 하이얌은 쾌락주의에서는 일치하지만, 그녀는 하이얌과 달리 야심이 있어 권력에 접근한다. 훗날 이스파한에서 둘은 결혼하고, 자한은 술탄의 애처의 측근으로 권력 투쟁 전면에 나선다.
하이얌은 사마르칸트에 온 재상 니잠 알물크를 만난다. 니잠 알물크는 술탄을 도와 셀주크 투르크를 이슬람 세계 최강 제국으로 키워낸 인물이다. 후에 이스파한에서 다시 만난 니잠 알물크는 하이얌에게 자신을 위해 일해줄 것을 요청한다. 요샛말로 비밀경찰 총수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권력의 편에 서지 않으려는 하이얌이 이런 자리를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하이얌은 니잠 알물크를 만나기 전, 이스파한으로 가는 길에 자신과 막상막하의 지식을 통달한 하산 사바흐를 만나 친구가 된다. 하이얌은 니잠 알물크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그 자리에 하산 사바흐를 천거한다.
이렇게 하이얌과 니잠 알물크, 그리고 하산 사바흐의 삶이 얽히기 시작한다. 하산은 놀라운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마침내 니잠 알물크와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노회한 재상에게 패배하고 달아나 암살교단을 창시한다. 그는 원래 이스마일파의 핵심으로 셀주크를 무너뜨리기 위해 잠입했던 것이다. 훗날 니잠 알물크는 하산의 암살교단이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한다. 니잠 알물크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술탄이 암살교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이얌의 아내 자한도 피살되고, 하이얌은 이후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된다.
오마르 하이얌은 권력도 재물도 추구하지 않는다. 니잠 알물크는 권력과 재물을 모두 탐한다. 하산 사바흐는 오로지 권력을 탐한다. 이 세 사람의 대비를 통하여 하이얌의 삶과, 정치는 물론 종교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신념이 도드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얌은 현실로부터 도피한 에피큐로스주의자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범주를 넘어가는 부분이 너무 많다. 욕망을 절제하기만 하는 소박한 삶 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진수성찬과 좋은 포도주를 마다하지 않고, 사랑의 욕망을 억제하지 않는다. 하이얌과 자한의 결합에서 이슬람의 엄숙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지나치게 에로틱하다고 까지 할 만하다. 인생무상을 이야기하지만 그 허무는 우울하지 않다. 도피는 하지만 밀실에 꽁꽁 숨지는 않는다. 그가 만약 사마르칸트를 지나 둔황까지 왔더라면 어땠을까? 해탈을 추구하는 승려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허무는 ‘초월적 허무’였다고 할까…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하산 사바흐다. 그가 건설한 난공불락의 요새 알라무트에 대한 묘사는 널리 알려진 내용과 상당히 다른 점이 있어 흥미롭다.
널리 알려진 통념은 이렇다. 하산 사바흐는 ‘산 노인’이라 불리고, 암살교단을 일컫는 ‘아사신’은 ‘해시시’, 즉 마약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암살자 투입 과정은, 우선 알라무트에 진짜 천국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어놓고 암살 작전 전에 암살자를 데리고 와서 그곳에서 아리따운 여성과 열락의 나날을 보내게 한다. 그리고 성공하면 이 ‘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세뇌’한 다음 암살 작전을 수행케 한다. 이 과정에서 해시시가 활용됨은 물론이다.
반면 이 책의 묘사는 이렇다. 이 교단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강조한다. 알라무트에서는 가무음주 등 모든 세속적인 것은 금지되며 철저하게 율법에 따른 생활을 한다. 또 하산 사바흐가 만든 치밀한 교육체계에 따라 각 층위별로, 즉 일반 신자, 선교사, 교사, 지도자 등등 각자의 역할에 맞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그 직책을 수행한다. 특히 암살자는 투철한 신앙, 암살 기술, 그리고 암살 후 ‘당당하게’ 잡혀 죽는 태도까지 교육을 받고 작전에 투입된다. 해시시 같은 것은 없다. 하산 사바흐 자신은 규율을 어긴 자기 아들을 처단할 정도로 엄격했고, 엄청난 분량의 장서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도자의 승인이 없으면 숨도 크게 못 쉬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런 숨 막히는 체제를 오래 지탱하기는 어려운 일. 약 100년 후 등장한 4대 지도자가 수많은 금지를 풀어 변질되었고, 결국 몽골의 침공으로 1256년 알라무트는 파괴되고 ‘암살교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후반부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19세기 후반이다. 화자인 벤자민 O. 르사즈가 등장한다. 가운데 이름 ‘O.’는 오마르다. 오마르 하이얌에게 심취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공통 관심사가 매개가 되어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그래서 낳은 아들에게 하이얌의 이름 ‘오마르’를 붙여 준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서는 ‘오마르’란 이름이 금기다. 왜냐하면 오마르는 시아파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늘 이니셜만 쓰고 그것이 무엇의 약자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도 한때 루바이야트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관심이 다소 시들해졌을 때 뜻하지 않게 ‘사마르칸트 필사본’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가족의 연줄로 망명 중인 페르시아의 반체제 지도자 자말 알딘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계기로 페르시아 공주를 알게 된다. 사마르칸트 필사본은 페르시아에 있는 자말 알딘의 광적인 지지자 미르자 레자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 벤자민은 자말 알딘의 소개장을 들고 페르시아까지 간다. 그러나 필사본을 전달받기도 전에 미르자 레자는 페르시아 왕인 샤를 암살하고 체포된다. 그 바람에 그는 졸지에 샤 암살 공범처럼 되어 필사본은 구경도 못한 채 공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한다. 당시에는 기선, 나귀, 마차 등을 이용해서 오갔기 때문에 가는데 한 달, 오는데 석 달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정세가 완화되면서 다시 페르시아로 갔지만, 이번에는 입헌주의 혁명에 휩쓸리고 만다. 혁명이 성공해 의회가 열리고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결국 영향력과 이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의 간섭으로 혁명은 좌초하고 만다. 그 사이 사랑에 빠진 벤자민과 공주는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혁명의 좌절에 실망한 공주가 벤자민과 함께 페르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둘은 파리로 가서 결혼을 하고 미국에 신접살림을 차리기로 한다.
그렇다면 ‘사마르칸트 필사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샤를 암살한 미르자 레자가 체포된 후 필사본을 챙긴 사람에게서 공주가 입수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벤자민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필사본을 직접 만지고, 그 내용을 다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필사본의 운명에 대하여는 하이얌의 루바이 중 하나가 예언처럼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서 오느냐는 그대의 물음에
그 길고도 긴 이야기를 줄여 나 이렇게 말하리
바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노라고
그리고 갑자기 바다가 다시 집어삼키노라고
후반부의 내용은 실제 역사적 사건에 픽션을 섞어 스토리를 만든 것이다. 주요 인물들은 작가가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아 창조했다. ‘사마르칸트 필사본’의 운명도 픽션이다.
Ⅴ
알레고리 속의 메시지
『사마르칸트』는 이슬람세계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앞서 이슬람의 근대성에 대하여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이 보여주는 신권과 속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절묘한 알레고리를 살펴보았다.(제14화 「이슬람의 근대성을 묻는다(2) - 무엇이 잘못되었나?」) 그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메시지를 『사마르칸트』에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전반부 세 인물의 대비다.
재상 니잠 알물크는 제국의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종교 권위와 정치권력을 절묘하게 결합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오늘날의 권위주의적 이슬람 정치와 닮은 꼴이다. 특히 이슬람공화국 이란이 가장 심하다. 천년의 시차를 두고 니잠 알물크가 부활한 셈이다.
하산 사바흐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슬람 극단주의의 테러를 연상시킨다. ‘종교적 이상’이란 미명 하에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모든 것을 통제한다. 자신이 믿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폭력까지도 정당화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지하드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오마르 하이얌은 권력과 재물, 그리고 종교적 위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했던 사람이다. 어쩌면 오늘날 이슬람 세계의 지식인과 자유주의자의 알레고리가 아닐까?
이렇게 놓고 보면 이들 세 사람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의 대비가 아니라, 이슬람 세계가 반복해 온 정치적, 종교적 딜레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마르 하이얌은 하산 사바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과 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걸세. 나는 인생을 숭배하고, 그는 죽음을 숭배하지.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네. ‘사랑할 줄 모르는데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자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산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사랑, 음악, 시, 포도주, 태양을 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네. 그는 피조물 중에서 아름다운 것은 모두 경멸하면서 감히 창조주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감히 천국을 약속하는 사람이란 말일세! 설사 그의 요새가 천국의 문이라고 해도, 나는 그런 천국은 거절하겠네. 그 가짜 교도들의 소굴에는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을 걸세!”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예리한 면도날처럼 본질을 파고드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후반부의 이란 근대사는 픽션이 가미되어 있지만 대부분 실제 역사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80년대 ~ 90년대 페르시아(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재정 파탄으로 각종 이권을 외국에 팔아넘긴다. 대표적인 사례가 담배 독점권을 영국인 탈버트 경에게 부여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입헌주의자들은 물론 상인과 성직자들도 이런 왕조의 행태에 격분한다. 그것이 1891년~92년 전국적인 담배 불매운동으로 번진다. 이 역시 소설 속에 종교지도자 상인 민중이 결집해서 투쟁을 일으키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1905년에는 상인 성직자 등이 반정부시위에 나서 이듬해 헌법이 제정되고 의회(마즐리스)가 설립된다. 그러나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협약을 맺고 이란을 분점해 사실상 주권을 상실한 상황이 되고, 이어 1908년에는 모하마드 알리 샤가 러시아 지원을 받아 의회를 포격하고 입헌파를 탄압한다. 소설 속에 이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결국 1911년에는 러시아 군대가 테헤란을 점령하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입헌 혁명은 좌절되고 만다. 이로써 이란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버린다. 소설은 이런 상황 속에서 벤자민과 공주가 ‘사마르칸트 필사본’을 가지고 이란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작가는 실제 역사를 충실히 따라가면서, 허구적 장치를 통해 ‘사마르칸트 필사본’이란 시집 한 권이 민족과 역사의 기억을 잇는 매개체로 기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이란, 나아가서는 이슬람세계에 그 기억이 갖는 교훈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페르시아 입헌주의자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내가 가장 큰 희망을 품고 있는 페르시아의 민중이여, 내가 죽기를 염원하던 그 인물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들이 흔들어야 하는 것은 해묵은 전통의 무게인 것을.” – 작중에서 망명 중 사망한 반체제 혁명가 자말 알딘
“내가 샤를 혐오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와 싸우는 건 아냐. 전제 군주 한 명을 쓰러뜨리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지. 난 페르시아인들이 자유로운 인간임을 자각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힘을 믿고 오늘날의 세계 속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싸우는 거야.” – 작중에서 입헌 혁명 지도자로 활약한 파젤
근대화 국면을 돌이켜보면 새삼 실감하게 되는 말도 있다.
“확신하건대, 이번 기회에 동방이 깨어나지 못하면 머지않아 서구 열강에 먹히고 말 겁니다.”
작중에서 교육의 사명을 띠고 선교학교 교사로 페르시아에 가서 입헌 혁명에 기여한 미국인 하워드 바스커빌은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밝혔다. 이는 이란 근대사에서 뼈아픈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페르시아 공주는 입헌혁명 후 이렇게 선언한다.
“감히 말하는데 이제 페르시아에서 광신도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믿어요.”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지금, 아니 오마르 하이얌의 시대로부터 천년이 흐른 지금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 이슬람세계에, 나아가서는 인류에게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오아시스 도시에서 편안히 쉬어 가려했는데, 또 복잡하고 힘겨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애초에 다른 책을 골랐어야 했나 보다. 이렇게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문득 이들 두 소설이 공교롭게도 같은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 두 작품을 통하여 당시 서역과 그 너머 이슬람세계의 생활과 문화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