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노벨 문학상 ‘사탄탱고’

‘의미의 구덩이’에서 ‘현혹의 탱고’까지...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by 제이슨

『사탄탱고』/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알마 인코그니타/2018

『현혹』/헤르만 브로흐/창비/2019

『구덩이』/안드레이 플라토노프/민음사/2007


[제18화 「어부와 해적 - 납치와 약탈의 세계사」를 마치면서 소말리아와 관련해 좀더 알아볼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만, 마침 2025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기에 헝가리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탄탱고』에 대한 글을 먼저 올립니다. 양해바랍니다.]


‘북조선’ 인민군 장교 할머니와 ‘섹스 산업’


1989년 부다페스트. 이제 막 개방의 문을 열고 자유를 찾기 시작한 시기였다. 내가 여장을 푼 호텔은 ‘두나’, 즉 도나우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밤중에 도착했고, 도시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인근 ‘체인 브리지’ 다리와 건너편 부다 지역 언덕에 자리 잡은 ‘어부성’의 조명만 창백한 빛으로 캄캄한 하늘에 섬처럼 떠 있을 뿐이었다. 개혁 개방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직 공산당 독재의 어둠을 떨쳐버리지 못한 시대 상황을 이런 도시 야경이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도나우’ 아닌가! 아무리 밤이 늦었고 피곤해도, 그냥 잠자리에 들 수는 없었다. 강변 산책에 나섰다. 잠시 후 맞은편에서 예쁜 아가씨가 조그만 사각형 백을 하나만 달랑 든 채 다가온다. 그런데 줄곧 나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처음엔 그냥 상냥하고 친절한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조금 있으니까 또 다른 아가씨가 나타나 미소 짓는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 산책하는 동안 네댓 명을 만났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어떤 ‘현상’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를 도와주는 현지인에게 물었다.


“직업여성이지요.”

“그럼 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미소만 짓는 거죠?”

“먼저 ‘거래’를 ‘제안’하면 매춘 혐의로 단속되니까요.”

“아니, 말을 하든 않든 어차피 매춘이잖아요…”

“아가씨가 추파를 던지고, 당신이 반응하고… 그래서 둘이 서로 마음에 들어 호텔 방으로 갔어요. 남녀가 눈이 맞았으니까 그건 매춘이 아니라 연애지요.”


무슨 이런 황당한 논리가 있나! 그러나 실제 그랬다. 경찰 당국도 같은 논리로 답변한다. 그럼 금품이 오갔다면 단속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당신은 연인에게 선물도 하고 필요하면 돈도 주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도나우 강의 '체인브리지'와 '어부성(어부의 요새)'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이 대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대한 세계사의 분수령이었다. 이때를 전후해 소련·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냉전이 끝났고, 그때까지 자유진영에만 머물렀던 대한민국의 대외관계의 지평이 전 세계로 확대된 것이다.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발 빠르게 문을 열어젖힌 나라가 헝가리다. 당연히 우리나라에게도 제일 먼저 문호를 개방했다. 그래서 우리 기업들이 진출하기 시작하고, 수교 절차도 진행되고 있었으며, 사람들도 왕래하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 도착 첫날부터 기묘한 경험을 했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막 열린 자유의 시대를 어떻게 누리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눈에 띈 것은 다소 의외였다.

우선 강변 유람선에 도박장을 개설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 차원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오늘날 온라인 데이팅 앱의 인쇄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신문 광고는 다소 황당했다. 60~70년대 우리나라에도 주간지 같은 데에는 펜팔 광고가 많았다. 그런데 여기는 아주 노골적으로 ‘섹스 파트너’를 찾는다는 광고란이 버젓이 나와있는 것이다. ‘언론자유의 오남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오프라인 모임으로 발전시킨 회사 광고도 있었다. 결혼중매회사가 아니다. 특정 장소를 빌려서 ‘퇴폐적인’ 쇼를 진행하고, 거기 모인 남녀가 각기 파트너를 찾아 즐기는 콘셉트라는 것이다. 내게 더 황당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 일을 주관하는 회사가 자유 사기업의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 회사를 찾아가 봤다.


한국어 통역이 있다기에 예약을 했다. 북한에 유학한 헝가리인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에 호텔로비에 나타난 사람은 한국인 할머니였다. 고향은 평안북도이고, 국적은 헝가리라고 하신다. 사연을 물었더니 6.25 당시 인민군 장교였단다. 북한에 파견된 헝가리군 장교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고 헝가리 시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분이 묘하다. 그런데 함께 가는 곳이 그렇고 그런 곳이라 더 머쓱하다.


내심 ‘괴상하고, 비도덕적인 사업’을 하는 회사라는 곳이라 이상할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회사 대표는 30대 초반의 젊은 친구였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이 당당했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전직 인민군 장교 할머니의 태연한 태도였다. 통역은 물론 자신이 ‘진지하게’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소감을 물어봤더니 “흥미로웠다”며 웃으신다. 그 표정은 서점을 둘러보고 유익한 시간을 보낸 사람 같았다. 결국 나만 지나친 ‘유교적’ 엄숙함으로 그런 비즈니스를 ‘죄악시’했던 셈이다.

그리하여…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첫 며칠 동안의 소감은 한마디로 힘겹게 얻은 소중한 자유를 도박과 퇴폐적인 곳 같이 “쓸데없이 허비한다”는 것이었다. 약간 분개했다고 할까? 물론 이후 계속 머무르면서 목격한 것은 미래를 위한 치열한 고민과 진지한 토론,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보통 사람들의 분투… 그런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당시는 아직 분리 전이었다), 폴란드, 루마니아 등 체제전환기의 동유럽을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헝가리가, 유교적 시각에서 볼 때 ‘도덕적 측면에서 훨씬 더 느슨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피상적인 느낌에 그치지 않는 것은, 헝가리가 동구권 중에서도 비교적 느슨한 체제였다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서방과의 교류가 다른 동구권 나라에 비해 활발했다. 관광산업에 비중을 많이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검열도 느슨하고, 영화 등 대중문화도 많이 유입되었으며, 경제의 사적(私的) 영역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주변 국가들에 비해 가톨릭의 영향력이 약했던 점도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부다페스트는 빈, 프라하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주요 대도시로서 오페라, 카페, 문학, 저널리즘, 심리학, 포르노그래피까지 갖가지 ‘도시적 감수성 실험’이 이미 19세기부터 이뤄졌던 곳이다.

이런 배경을 감안하면, 다른 주변국에 비해서 도박이나 섹스산업의 활성화가 두드러졌던 것은 맞지만, 이것이 정작 현지인들에게는 ‘별 일도 아니었던 데’ 반해 한국의 ‘도덕군자’ 연하는 내게는 ‘괴상망측한 현장’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헝가리인이 된 북한 인민군 장교 출신 할머니에게도 그것은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약간 ‘흥미로울 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동유럽 국가들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체제전환기에 매춘과 조직폭력 마약 등으로 홍역을 치렀다. 정도의 차이, 선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억눌렸던 ‘자유’는 이런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에서 먼저 분출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헝가리는 ‘철의 장막’ 붕괴로 정치와 함께 ‘감각’이 먼저 깨어난 나라인 셈이다.


사탄탱고


도나우 강변의 밤, 그리고 인민군 장교 할머니가 문득 떠오른 것은 노벨문학상 때문이다.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탄탱고』. 2018년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되었을 때, 신간 목록에서 보고 관심이 갔지만 ‘장바구니’에 담아 놓기만 하고 구매하지 않았다. 그의 책 대신 선택한 것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라는 러시아 작가의 『구덩이』였다. 당연히 노벨문학상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읽었더라면 한껏 잘난 척할 수 있었을 텐데…


헝가리는 참 묘한 나라, 묘한 민족이다. 내게는 특히 2가지 점이 인상적이다.

첫째는 우리처럼 성(姓)+이름 순으로 쓴다. 그래서 많이 헷갈린다. 왜냐하면 헝가리 인들은 우리처럼 성부터 말하지만, 서양 언론은 이를 소개할 때 뒤집어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문으로 된 기사나 문서를 볼 때면, 헝가리식으로 쓴 것인지, 영어식으로 바꿔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크러스터호르커이 라슬로는 헝가리식으로 쓴 것으로 안다.


둘째는 식당에 가면 우리나라처럼 테이블에 고춧가루 종지가 놓여있는 곳이 많았다. 대표적인 헝가리 음식 ‘굴라쉬’ 수프를 나는 ‘양배춧국’이라고 불렀었다. 거기에 고춧가루 타고, ‘스팀드 라이스’ 시켜서 말아먹으면 영락없이 배춧국에 밥 말아먹는 맛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흉노의 후손인가, 우리 사촌쯤 되는 민족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헝가리란 이름부터 ‘훈 + 가리’ 아닌가? 흉노가 서쪽으로 간 것이 ‘훈’이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그 관련설이 “부정된다”라고 한다. ‘헝가리’란 국명 자체도 헝가리어로는 ‘마자르’, 정확히는 ‘Magyarország’다.(뒤의 오르사그가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이때 ‘sz’는 영어의 ‘s’로 발음되며, 그냥 ‘s’를 쓰면 영어의 ‘sh’ 발음이 난다.(폴란드어는 정확하게 반대여서 헷갈리기 쉽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 Laszlo도 ‘라즐로’가 아니라 ‘라슬로’다.


『사탄탱고』/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알마 인코그니타/2018


쉽게 읽히지도 않고, 재미없다고 느끼기 쉬운 책이라는 생각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보통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바로 찬탄을 쏟아낸다면, 많은 경우, ‘허세’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 “뭐 이래!”하고 중간에 집어던졌을 확률이 높다. 그나마 상을 받았으니, ‘내가 무식해서 그러려니’ 하면서 꾹 참고 꾸역꾸역 끝까지 읽는다. 애당초 나는, 읽어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플라토노프의 『구덩이』를 택했다고 하지 않았는가.(사실 『구덩이』도 이와 비슷해서 인내심이 많이 필요했다.)

이런 ‘빌어먹을’ 책들은 대체 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묘사가 이렇게 자세한지 모르겠다. 스토리는 별 것 없는데 마룻바닥이 차갑고, 창문에는 먼지가 끼었고, 거미줄이 어떻고, 비는 어떻게 오고, 길은 진창이고, 냄새는 지독하고…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런데 작가는 ‘거장’이고, 그에 비하면 나는 ‘무지렁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갑자기 이런 온갖 잡다한 묘사에 뭔가 심오한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때부터 머리가 아프다. 스토리는 좀 지루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읽는 것이 체질에도 맞고, 재미있다. 그래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데… 쏟아지는 졸음을 참고 꾸역꾸역 끝까지 읽는다. 서평이나 소개 글을 읽어보면 모두가 심오한 의미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나만 무식하구나…!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다. 밤새도록 머리를 쥐어짜 본다.

앞서 이야기한 헝가리에서 보고들은 것들이 묘하게 겹치면서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이 제법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 인민군 장교 할머니나 ‘섹스 파트너’ 광고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것들이 선명한 그림으로 떠올라 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별 상관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열쇠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다시 말하지만, 나의 경험에서 이 책의 스토리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작품은 ‘종소리’로 시작해서 ‘종소리’로 끝난다. 종소리는 말기 공산 독재 시대 구원에의 초대이지만, 여기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딘가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음울함이 깔려 있다. 구원은 구원이 아니고, 끝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그리하여 비처럼 내리는 축복으로서의 자유를, ‘자유로서’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록이다. 무너지기 직전이지만 아직 공산 독재가 숨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줄거리>


분위기는 시종일관 우중충하고, 스토리는 밋밋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망해버린 농촌 마을에 부흥을 이룩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는 지도자 격인 사람이 나타나는 데서 빚어지는 사건이다.

무대는 헝가리의 쇠락한 시골마을이다. 1985년 작품이므로 시대는 그 언저리다. 분위기로 볼 때 이곳은 망해버린 집단농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에는 몇 집 남아있지도 않다.


첫 장면은 후터키라는 남자가 잠결에 종소리를 듣고 깨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일대에는 종이 없다. 그는 불륜 관계인 슈미트 부인의 침대에 있다. 갑자기 그녀의 남편 슈미트 씨가 들이닥친다. 멀리 돈 벌러 갔다가 예정보다 조금 빨리 온 것이다. 후터키는 절묘하게 빠져나갔다가 금방 온 것처럼 꾸며 슈미트 씨를 찾아온다. 그가 받아온 돈에 후터키가 주장할 수 있는 몫도 있는 모양이다. 슈미트는 함께 갔던 크라네르와 반씩 나눠 갖고 도망칠 작정이었다. 이제 오히려 후터키가 슈미트를 닦달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결국 셋이 나누기로 하고 도망과 잔류, 마을의 미래 등을 놓고 고민하면서 관망하는 사이에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그의 부하 격인 페트리너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리미아시는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을 지을 수도 있는.” 마법사 같은 사람이다.


작가는 이리미아시의 정체를 일찌감치 폭로해 버린다. 그는 기껏해야 경찰이나 국내정보기관의 끄나풀 같은 존재 정도일 뿐이다. 구체적인 묘사는 없지만, 죽은 것으로 알려진 것은, 그들이 어떤 일 때문에 감옥살이를 했고, 그래서 고의로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는 관계 기관에 불려 들어가 갖은 모욕을 다 당하고 다시 ‘서류’를 제출하고 임무를 받아 나온다.


그들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논란이 분분해진다. 결국 이리미아시가 마을을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면서, 기대와 의욕이 넘치게 된다. 실제로 이리미아시가 마을에 나타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슈미트 등이 번 돈도 새로운 ‘사업’을 위하여 몽땅 다 내놓는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미래 비전에 따라 사람들은 마을을 버리고 새로운 정착지로 떠난다. 폐허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의문을 품게 되고, 싸움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곧 이리미아시가 다시 나타나면서 마을 사람들은 믿음을 ‘회복’한다. 그러나 이리미아시는 새 정착지에는 문제가 생겼다며 모두 흩어져서 ‘감시’를 잘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모여서 새로이 건설에 나설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가 지시하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 '사탄탱고' 중 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장면

이 작품은 원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1장부터 6장까지 진행된 다음 거꾸로 5장, 4장 순으로 1장까지 돌아온다. 그리고 마지막은 소설 첫머리 후터키가 종소리를 들었던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것을 기록하는 사람은 농장이 망하면서 해직당한 마을 의사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래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은 사실상 비어 있었다. 이제 늘 마을을 관찰하던 자기 집 창가에서는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그는 처음 일기를 쓸 때(그것은 마을 연대기에 가깝다)의 사명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쓰는 글이 그대로 마을에서 현실이 된다고 인식하고, 마을의 역사를 자신이 만들어간다는 책임과 의무감을 절감하면서 글을 쓴다.


그렇게 해서 ‘원이 닫힌다’. 즉 한 바퀴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고, 마을은 버려졌지만 버려지지 않았다. 역사는 그렇게 돌고 있는 것이다.


<3개의 에피소드>


나는 이 작품에서 소녀 에스티케와 술집에서의 ‘차르다시’ 춤, 즉 탱고, 그리고 이리미아시의 연설 등 3가지 에피소드가 중요한 축이라고 보았다.


소녀 에스티케의 고양이 살해와 자살

이 장면이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에스티케는 이 작품에서 유일한 순수한 영혼이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 ‘박약’하다. 가족과 공동체에서 소외된 존재다. 어머니로부터는 야단만 맞고, 오빠에게는 놀림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오빠가 친절하게 대해준다. 에스티케는 죽으면 천사가 영접해서 천국으로 간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천사에게 나갈 수도 있는지, 즉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지 묻는다. 오빠는 쥐약을 먹으면 된다고 가르쳐준다. 오빠는 또 땅을 파고 에스티케의 돈을 묻은 다음, 물을 잘 주면 돈나무가 자라서 돈을 수확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에스티케는 오빠의 변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말을 잘 듣는다. 며칠 후 에스티케는 돈나무가 파헤쳐진 것을 본다. 그리고 오빠에게 오히려 놀림을 받는다. 에스티케는 자기가 아끼던 고양이를 잔혹하게 죽인다. 그리고 죽은 고양이를 안고 옛 성터에 가서 쥐약으로 자살해 버린다.

고양이 이야기는 단순한 ‘살해’의 서사가 아니라 ‘구원’의 서사인 것 같다. 에스티케는 고양이가 천사의 영접을 받아 천국으로 가기를 원한 것이다. 자신과 함께. 그러나 이 아이는 정죄할 수 없다. 행위 자체로는 죄악이지만, 그 발상이 순수한 무지에서, 그리고 선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살상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구원의 아이러니다. 이리미아시의 구원이 마을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어갈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술집의 탱고

문자 그대로 이 책의 제목인 ‘사탄탱고’다.

이리미아시가 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하나 둘 동네 선술집에 모여든다. 술을 마시고, 이리미아시의 ‘도래’가 어떤 의미일지, 어떤 결과를 빚을지 설왕설래한다. 또 술기운이 오름에 따라 사람들의 ‘더러운’ 욕망도 꿈틀거린다. 술집 주인은 육감적인 슈미트 부인이 옷을 벗게 하려고 난로를 세게 틀어서 실내를 덥게 만든다. 부부가 같이 왔지만, 서로 다른 부인을 집적거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춤판이 벌어진다. 그러는 사이 순수한 소녀 에스티케는 옛 성터에서 죽어간다. 모두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지만, 진지한 모색은 없고, 벌거벗은 욕망만 꿈틀거린다. 마을 사람들이 특별히 타락한 사람들이거나, 악한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이 술집의 탱고는 희망을 빙자한 절망의 몸부림이다.

마을 사람들은 밤새 술판, 춤판을 벌인 끝에 모두 여기저기 널브러져 곯아떨어진다. 이때 마침내 이리미아시가 등장한다. “도적처럼 임하리라”는 성경의 메시아 재림 예고를 연상시킨다.


영화 사탄탱고 중 술집의 춤판

이리미아시의 연설

이리미아시는 마을 사람들에게 미래의 비전이 아닌 에스티케의 죽음을 ‘설교’한다. 에스티케가 공동체에서 소외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리미아시는 교묘하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원죄’의 서사와도 같다. 그리고 결론은 에스티케의 죽음은 회개와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거룩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묵시록적 서사’란 표현이 어울리는 스토리다.

마을 사람들은, 앞다퉈 가진 돈을 모두 내놓는다. 마치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모든 재산을 내놓듯이. 그리고 집과 재산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어찌 보면 종잡을 수 없는 이리미아시의 연설도 이미 구원의 서사에 빠져든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들리는 것이다.


<3개의 메타포>


비와 냄새, 그리고 종소리 이 3가지는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3대 메타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고, 도처에서 불쾌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종소리가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다.


종소리

이 작품은 후터키가 종소리 때문에 잠을 깨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근처에는 종소리가 날 만한 곳이 없다.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작은 성당이 있지만, 파괴된 상태이고 종도 없다. 그 종소리의 출처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 일기를 기록하는 의사가 소성당까지 가서 어떤 미친 노인이 종을 치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종소리는 영적인 의미가 크다. 불교의 종은 깨달음의 소리다. 기독교의 종소리는 구원이 임한다는 예고이자 구원에의 초대이다. 그러나 후터키의 잠을 깨운 종소리는 왠지 불안하다. 구원의 예고, 여기서는 이리미아시가 온다는 예고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불길한 기운이 깔려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공산 독재는 무너져가고 있고 새로 도래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새벽의 종소리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것은 비 때문인 것 같다. 『사탄탱고』의 세계에는 비가 멈추지 않는다. 대지는 진흙 투성이이고, 사람들은 언제나 축축하고 무거운 옷을 입고 있으며, 도시와 농장의 경계는 흐리다. 사람들은 질척거리는 길을 가다가 웅덩이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진흙탕에 넘어지기도 한다. 담배는 젖어서 피울 수 없고, 옷이나 양말은 벗어서 쥐어짜야 한다.

문학에서 보통 비는 씻김, 정화, 새 출발 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비는 그 반대다. 끊임없이 내리고, 그래서 작품 전체 분위기는 우울하다.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망해버린 농장의 은유이다. 규율과 체제는 무너지고, 설비는 ‘진흙이 뒤덮어 버린 것처럼’ 방치되어 못쓰게 되었다. 집단 농장이 해체되었으므로 구성원들은 자유롭게 된 셈이다. 술집이 ‘사(私) 기업’이고, 술집 주인이 부자가 된 것처럼. 그러나 이 자유는 남아있는 농장 구성원들에게는 누릴 수 없는 것이고, 혼돈일 뿐이다. 그래서 옷은 무겁고, 길은 진창이다.


냄새

그렇다면 작가는 왜 장면마다 냄새를 강조할까? 냄새는 ‘썩음’의 상징이다. 소설 도입부에서부터 종소리에 잠이 깬 후터키가 불륜 상대인 슈미트 부인 옆에 다시 누울 때 작가는 굳이 “땀내를 풍기며 자고 있던 슈미트 부인”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그 냄새는 가는 곳마다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피어오른다. 곰팡이 냄새, 젖은 옷 냄새, 썩은 고기 냄새, 술 냄새, 비 냄새, 흙냄새… 뿐만 아니라 죽음의 냄새, 절망의 냄새와 같은 ‘형이상학적 냄새’까지. 그것은 ‘언어의 죽음 위에 감각으로 드러내는 진실’이라 할 만하다. 말은 거짓일 수 있지만, 냄새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리미아스가 왔다. 구원이 임한 셈이다. 거기에는 자유와 풍요로운 삶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비는 내리고 어디선가 썩은 냄새가 피어오른다. 여기서 비와 냄새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노아의 홍수’는 세상을 새롭게 했다. 그러나 이리미아스의 ‘재림’(?)과 함께 내리는 비는 모든 것을 질척거리게 만들고 냄새를 풍긴다. 노아가 방주를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다. 자유가 오고, 구원이 임하지만, 방주를 만들지 않은 탓에 그 비는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질척거리고, 썩게 해서 냄새만 피우는 것이다. 공산당이 몰락해가고 있던 그 시점이 그러했다.


<세 사람>


등장인물 중 이리미아시, 의사, 후터키 등 세 사람을 중심으로 보는 것도 유용할 것 같다.


이리미아시

그렇다면 이리미아시는 메시아인가, 사탄인가? 이 작품의 서사가 이리미아시의 본심을 읽어 내기에는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거의 ‘전지전능한’ 메시아로 여겨진다. 그러나 관계 당국에 소환되어 ‘대위’와 대면하는 장면에서 그는 그저 그렇고 그런 협잡꾼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 마을 사람들의 부흥을 이끌 의지는 있었을까? 위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돈을 있는 대로 다 내놓을 때 그는 만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마을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첫날밤을 지내고 난 다음 이리미아시에게 속았다고 느끼면서 분개하고 다툼이 벌어졌을 때 홀연히 나타나 모든 의심을 잠재운다. 강력한 카리스마가 아닐 수 없다. 이 장면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아론이 십계명 돌판을 깨뜨리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마을 사람들은 또 새로운 공동체 건설은 ‘연기’되었고, 자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알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지면서도 실망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리미아시의 ‘마법’에 이성이 마비된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스스로 자신을 마비시켜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마을 사람들을 기만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탄인가? 결과적으로 사탄 노릇을 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가 사탄이라기보다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자유와 구원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래서 사탄의 세력에 놀아나는 인간으로 생각되었다.


의사

내게는 또 의사라는 캐릭터가 인상 깊었다.

그는 기록자다.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늙고 병든 그는 바깥세상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창가에 안락의자를 놓고, 몸을 최소한만 움직여도 되도록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배치해 놓고 있다. 그리고 마을 전체, 그리고 마을 사람 각 개인별 노트를 마련해 두고 벌어지는 일과 자신의 감상을 일일이 기록한다.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는 엄중한 과업을 부과한 것이다. 비축해 둔 통조림을 먹고 끊임없이 술을 마신다.

그는 정신박약아 소녀 에스티케가 병들었을 때 곁을 지켜주었던 고마운 사람이다. 사건 당일 그는 술 공급 문제로 무리하게 술집을 찾아 나섰다가 마침 오빠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애타게 구원을 찾던 에스티케를 만난다. 에스티케는 병상에서 든든하게 의지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의사에게 매달리지만, 그는 뿌리친다. 그렇게 에스티케는 떠나고, 마음이 바뀐 의사는 뒤늦게 그녀를 찾아 헤맨다. 빗속에서 무리한 탓에 그는 쓰러졌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진다. 그 사이 에스티케는 죽고, 이리미아시가 왔으며, 마을 사람들이 집과 가재도구를 버리고 모두 떠난다. 그 후 의사는 빈 마을에 돌아와 다시 제자리에서 기록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쓰는 글이 마을에서 실제 행동으로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렇게 그는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이처럼 그는 관찰자이자, 이 작품의 화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티케의 간절한 소망을 뿌리침으로써 세상을 ‘배반한다’. 구원의 초대를 외면하고, 자신의 소명을 뿌리친 채 무기력한 ‘국외자’, ‘방관자’로만 머무르려는 현대적 무관심 사회의 대변자인 셈이다.


후터키

그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기술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유연하게 걷는다. 그러면서도 마을 모든 남자들이 노리는 슈미트 부인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그 방면의 ‘재주꾼’이기도 하다. 그는 이리미아시의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고, 이것이 마을 사람들이 이리미아시를 따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한때 이리미아시에 대한 믿음이 의심으로 변했을 때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작품 전체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기술자로서 비이성적인 믿음을 따른다는 점에서 이성과 컬트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표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내가 뽑은 문장>


다음은 작품 속에서 내가 뽑아본 문장과 단락 일부다.


“그자들은 여전히 더러운 의자에 주저앉아 저녁마다 감자 요리나 먹으면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의아해하고 있을걸. 의심에 가득 차 서로를 감시하고 조용한 방에서 큰 소리로 트림이나 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끝도 없이 기다리다가, 누군가 자기들을 속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겠지. 돼지를 잡는데 혹시 뭐 주워 먹을 거라도 떨어질까 싶어 바닥에 배를 댄 채 도사리고 앉아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말이야. 그자들은 옛날 성에서 시중을 들던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주인은 벌써 머리에 총알을 박고 자살했는데, 저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체 주위에서 우왕좌왕하는 거야….”...

“주인 잃은 노예들인 주제에 명예와 자부심과 용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들 하지. 그 믿음으로 저자들은 살아가는 거야. 둔한 마음 깊은 곳에선 저런 덕목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저 말들의 그늘 속에서 살고 싶은 것뿐이니까.”...


- 이상은 이리미아시가 ‘소환장’을 받고 관계 당국에 갔을 때 불평하는 소리다. 공산 독재 말기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념이 떠나간 자리, 신념이 껍데기만 남은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 그리고 이른 아침에 거지가 교회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가슴 아픈 모양으로 태양이 떠올라, 흡사 빛으로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겠다고 다짐하는 듯이, 간밤의 하나같이 차갑고 강고하던 어둠 속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속박돼 있던 나무와 땅과 하늘 그리고 짐승들과 인간들을 마침내 분리하여 풀어준다....


- 일출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이 독특하다. 이 작품 전체의 암울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다음은 ‘기록자’ 의사의 소명감에 대한 묘사다.


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하찮은 세부라도 놓쳐선 안 되었다.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간과하는 것은 몰락과 질서 사이에 놓인 흔들리는 다리 위에 아무런 대책 없이 서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정직하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우두커니 기억만 하는 것은 무력하고 무능하므로 그것으로는 과업을 수행할 수 없었다. 기호들을 의미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연결할 방법이 있어야만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간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이 외에 소설의 말미에 서기들이 이리미아시의 보고서를 손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을 사람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분석한 보고서다. 그러나 워낙 형편없는 묘사로 기록되어 서기들이 수정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작가는 왜 굳이 이 장면을 넣었을까? 나는 그것을 2가지 이유로 본다.


첫째는 이리미아시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자명하다.


둘째는 공산독재 말기의 어이없는 비효율과 숨 막히는 감시체제를 폭로하는 것이다. 공산 정권은 체제 유지를 위하여 그물 같은 비밀경찰 조직을 만들어 온갖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감시했다. 이리미아시의 보고서는 감시 대상자나 감시 대상이 된 행동 등 모든 것이 전혀 감시할 필요도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공산 독재는 ‘이런 짓’을 하다가 망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짓’을 하는 권위주의 정권이 지구상에 여럿 존재한다. 이처럼 『사탄탱고』는 말기 공산 독재의 민 낯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게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를 읽은 소감을 정리해 보았다. 어찌 보면 작품이 너무 그로테스크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그만큼 현실의 어둡고 아픈 단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94년 헝가리의 거장 벨라 타르에 의해 러닝타임 7시간 18분짜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나는 항상 영화화는 원작을 훼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좀 다를 것 같다. 물론 7시간 이상 영화를 보고 있을 자신은 없다.


더 읽기… 나만의 『사탄탱고』 3부작


『사탄탱고』를 읽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과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구덩이』이다. 이들 세 작품은 주제가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 면에서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지만, 나름대로 ‘3부작’이라고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 시기로는 『구덩이』가 제일 앞서지만, 다루는 시대적 배경으로는 1차 대전 후의 『현혹』, 스탈린 시대의 『구덩이』, 그리고 동구 공산권 말기의 『사탄탱고』 순이다.


『현혹』/헤르만 브로흐 /창비/2019


헤르만 브로흐(1886~1951)는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 시대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어권의 대표적 모더니즘 작가다. 원래 공과대학에서 방적기술을 전공하고 가업을 승계했으나, 40대에 사업을 청산하고 작가로 전업했다. 빈 대학에서 수학·철학·심리학을, 미국 망명 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군중심리학을 연구했고, 예일 대학 독문학 교수를 지냈다. 1932년 3부작 『몽유병자들』을 발표하면서 본격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1945), 『죄 없는 사람들』(1949) 등의 작품이 있고, 『현혹』은 작품을 쓰고, 수정작업을 하던 중 1951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현대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를 했고, 작품에 몽환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도 많다. 『몽유병자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현혹』 등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현혹』은 한 시골 마을에 기인이 나타나 독특한 사상으로 주민들을 현혹시켜 갈등과 비극을 불러일으킨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신(神)의 부재(不在)를 견디지 못한 인간들이 구원을 찾아 광기에 휩쓸려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사탄탱고』와 닮았다. 이것은 또한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을 나치즘의 굴레로 몰아넣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구원의 열망이 어떻게 이성을 마비시키고, 대중을 폭력에 무신경하게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브로흐는 이런 과정을 때로는 신비적이고 몽환적으로, 때로는 냉정하고 사실적인 필치로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내용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쯤 지난 어느 해 3월부터 11월 사이 알프스의 산골에서 벌어진 일을 화자인 의사 ‘나’가 회상하는 형식이다. ‘관찰자’가 같은 의사라는 점이 흥미롭지만, 『사탄탱고』의 의사가 칩거하는 반면, 여기서는 산골 아래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진료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나’는 어느 날 이동 진료 중에 마리우스 라티라는 낯선 사람을 만나고,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주시하게 된다. 그는 아래 마을 밀란트라는 사람 집에 임시 일꾼으로 들어가 기거하면서 자리를 잡고 이상한 교리를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아간다. 그의 교리는 일종의 근본주의다. 기계 문명, 대량생산,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도시적 생활 방식 등을 거부한다. 그래서 탈곡기 같은 것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이런 물품의 판매대리인도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미혼모는 마녀로 몰아버린다.


가톨릭 교회는 주민들의 삶의 중심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신부는 무기력하고 병약해서 주민들의 영적인 문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바로 그런 공백을 마리우스 라티가 차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는 다리를 절고, 외모도 초라한 데다 성불구자로 암시된다. 그러면서도 남성성을 강조하는 모순 속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얼핏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가 기거하는 집주인인 밀란트는 그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근본주의 또는 나치즘과 같은 광신주의가 태동하고 자라나는 토양이다.

이런 가운데 마을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황금의 전설을 되살려 채굴 욕망을 부추긴다. 아무 희망 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공동체에 영적인 불꽃과 현실적인 욕망이 함께 타오르게 되면서 서서히 광기로 치달을 조짐을 보인다. 그것은 결국 희생제의를 빙자한 살인과 폭력으로 얼룩지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화자인 ‘나’ 조차도 그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잠깐씩 휘둘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윗마을에는 전통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지혜로운 어머니 기손이 있어 닥쳐올 불행을 일찍이 내다보고 계속 경고한다. 그녀는 전통 사회의 샤먼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치유자이며 지혜의 화신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광기로 몰아가는 ‘사이비 세력’에 대한 견고하고 신비한 대항마다. 그녀는 전통적인 공동체적 가치를 고수하는 윗마을의 영적인 지도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외손녀인 이름가르트가 희생제물이 되어 죽는 것을 예견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는다. 그녀의 생사관과 운명관이 일반 상식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머니 기손에게서 대안적 유토피아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 기손의 세계는, 나로서는, 확실하게 감을 잡을 수 없다.


중간의 한 장에서는 화자인 ‘나’의 15년 전 사랑에 대한 회상이 포함되어 있다. 같은 병원의 젊은 여성 의사와 연인 관계였으나, 공산당 행동대원이었던 그녀가 쿠데타 실패 후 ‘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살해 버렸고, 그 상처를 안고 도시를 떠나 이 산골에 정착한 것이다. 그때도 행동이 아닌 방관자가 되어버렸던 것처럼, 이 산골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여러 사건에 참여하고 관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관찰자에 머물고, 산책으로 도피하면서 사색에 몰두하고 만다. 이런 점은 기록으로 마을의 역사를 만든다는 『사탄탱고』의 의사와 비슷하다. 이상한 카리스마가 있는 마리우스 라티 또한 『사탄탱고』의 이리미아시와 나란히 놓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작품은 사변적인 기록이 많아서 이렇게 스토리만 요약하면 그 내용의 절반, 아니 1/10도 파악할 수 없다. 본문 내용만 55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가득 찬 대화와 사색의 내용을 음미해야 비로소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비록 화자는 사색의 산책으로 도피하지만, 그의 사유는 몽환적이고 끈질긴 내면 독백으로, 이성의 몰락과 광기의 역설을 풀어내고 있다.


『구덩이』/안드레이 플라토노프/민음사/2007


『구덩이』에서는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거짓 메시아는 나오지 않고, 사람들이 눈에 띄게 '요란하게' 광기로 내몰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모두는 두드러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스탈린 시대 ‘집단화’의 거대한 집단화의 조류에 휩쓸려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는 공과대학을 졸업한 기술자로 토목, 특히 댐 건설 현장에서 일했지만, 일찍부터 시와 소설에 매진해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미 1927년부터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으로부터 “이중적인 이데올로기”, “무정부주의적” 색채 등의 비판을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1929년 혁명과 새로운 도시에 관한 장편 소설 『체벤구르』를 완성한 뒤 인쇄소에서 조판 작업까지 마쳤지만, 출판이 좌절됐고, 이어 지금 소개하는 이 작품 『구덩이』도 묻히고 말았다. 2차 대전 중에는 종군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단편 「귀향」을 발표했으나, 이 작품 때문에 신랄한 비판과 함께 작품활동이 완전히 금지되고 말았다. 이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1951년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해빙기에 복권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80년대에 가서야 대표작이 러시아에서 본격 출판되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읽어보면 단박에 그가 왜 탄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누가 봐도 소련, 그것도 스탈린 독재 치하에서 출판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독재가 싫어하는 자유로운 사유를 추구하고 있다.

원어 제목은 『코틀로반(Котлован)』으로 국내에도 이 제목으로 된 다른 번역본이 나와있다. '코틀로반'이란 건물 등 구조물의 기초를 놓기 위한 굴착공사를 말한다. 이것을 작가는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인민을 위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 굴착공사를 뜻하지만, 그렇게 파인 땅은 인민을 고통으로 끌어넣는 '구덩이'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것을 제목으로 하느냐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사적인 인생의 30주년 기념일에 보셰프는 그가 존재의 수단을 얻어 왔던 작은 기계 공장에서 해고되었다. 해고 통지서에는 증가하는 내면적 허약함과 전반적인 노동의 흐름 도중에 사색에 빠지는 성벽을 사유로 생산에서 파면 처분한다고 쓰여 있었다.


'사적인 인생'이라 함은 공산 독재의 '집단주의'를 거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보셰프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사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를 해고한 것은 '사사로운 사유'(思惟)를 금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당이 생각하고, 당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는 것은 해고 사유가 된다.

해고된 보셰프는 거리를 떠돌다가 한 공사 현장 노동자 숙소에 끼어들어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밥을 얻어먹은 다음 그냥 거기서 같이 일을 하게 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로 여겨졌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공사는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함께 살 수 있는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 건설을 위한 기초 터 파기 공사다. 이렇게 시작된 보셰프의 인생행로는 농업 집단화 현장을 거쳐 다시 '구덩이'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보셰프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스토리 전개에 따라 중심인물이 바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물 중심 전개가 아니라 스토리 중심 전개인 셈이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의 특징으로는 문체를 꼽고 싶다. 번역서이지만, 원문의 분위기를 살렸다고 본다면, 문장은 매우 건조하고 딱딱하다. 우리가 북한 방송을 볼 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어떤 면에서는 문체라기보다는 서술하는 '말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이는 작가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이 '혁명을 조직하는' 의도된 전투적 말투라고 할까... 그런 것을 대화는 물론 전체 서술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나른한 권태 같은 것이 느껴지지만, 그 속에는 예리한 면도날처럼 시니컬한 독설이 숨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셰프와 함께 '공동 주연'이라 할 만한 사람은 굴착기 기사 치클린, 건설을 감독하는 건축기사 프루셉스키, 공사 현장에 들어와 지내게 된 어린 소녀 나스탸, 집단 농장 조직을 맡은 '활동가' 등이다. 치클린은 강인한 일꾼으로 이른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프루셉스키는 '부르주아' 출신으로 보셰프처럼 생각이 많다. 사회적 요구에 부합되지 않지만, 기술 때문에 '쓰임'을 받고 있으며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헴릿형 인간이다. 나스탸는 죽어가는 어머니 옆에 있다가 치클린에게 발견되어 그의 돌봄을 받는다.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 건설은 '사회주의 건설'을 상징한다. 터 파기 공사가 막 시작되었지만, 인근 골짜기로 더 적합한 입지가 있다면서 옮겨갔다가, 상급자의 변덕으로 규모가 4배로 또다시 6배로 확대된다. 그러나 공사는 진척되지 않은 채 보셰프, 치클린, 프루셉스키 등은 농업 집단화 추진 현장으로 보내진다.


참고로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실제 상황은 스탈린 집권 하에서 5개년계획이 시행에 들어가고, 농업집단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5개년계획은 생산량을 할당 시행함으로써 산업을 일으킨다는 계획경제의 실행을 뜻한다. 농업집단화는 이른바 부농을 숙청하고 농지와 가축 농기구 등을 모두 몰수해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것을 말한다.


집단 농장 조직은 밤낮없이 일하는 '활동가'의 노력으로 성과를 보인다. 농지와 농기구 등을 모두 몰수하고 부농들은 뗏목을 만들어 태워 멀리 추방해 버린다. 여기서도 치클린은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되는 농민을 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농민들은 기르던 가축을 마구 잡아먹어버린다. 빼앗기느니 먹어 치운다는 심리다.(실제로 당시 소련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이것이 후에 대기근을 초래했다) 프루셉스키는 '문화혁명'이란 임무를 띠고 왔으나 별로 하는 일이 없고, 보셰프는 치클린을 보좌하는 것처럼 따라다닌다.


집단 농장은 조직이 사실상 완료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활동가는 '상부'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는다. 통지문은 그의 과오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즉각 그리고 영원히 지도자의 위치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한편 '구덩이' 공사 현장에서 사람들이 병이 들어버린 나스탸를 데리고 오지만, 아이는 끝내 죽고 만다. 그렇게 해서 다시 돌아간 사람들은 구덩이에 무덤을 파고 나스탸를 묻고 소설은 끝난다.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 소설은 '철학적 우화'다. 나스탸는 혁명과 사회주의의 미래다. 소녀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제일 높은 사람은 레닌이고 그다음은 부디오니(소련의 장군 이름)예요. 그들이 오기 전에는 부르주아밖에 없었고, 전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레닌이 생기고 나서 곧 저도 태어난 거예요!"


그러므로 나스탸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의 '종언'이다.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의 기초를 놓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는 나스탸의 무덤이 된다.


"이, 빌어먹을 혁명!... 제일 잘났다는 그 혁명은 어딨어? 이리 와, 불구자 병사한테 한번 당해 봐라!" - 장애인


"산다는 건 내게 아무 소용없소... 난 더 이상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해요. 난 하느님을 뺏겼고, 하느님은 사람을 뺏겼어요..." - 마을 교회 신부


"이거 보시오. 오늘은 내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이 끝장날 거요. 그리고 결국은 당신들 우두머리 한 사람만 살아서 사회주의를 맞이하게 될 거요!" - 쫓겨나는 부농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메시아는 혁명의 형태로 왔다. 그러나 이념이 '언어'가 되면서 약속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약속의 대가로 인간은 말할 권리, 생각할 능력, 느낄 감각을 잃는다. 유토피아의 기초 터파기는 모두의 무덤이 되고 만다.




1989년 부다페스트에서 압제가 무너진 자리에 도박과 섹스... 퇴폐가 제일 먼저 둥지를 튼 것을 보았다. 그리고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그려낸 『사탄탱고』의 세계를 만나고, 이전의 기억을 좇아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을 거쳐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구덩이』까지 왔다.


체제가 무너진 후, 낡은 신앙이 힘을 잃은 후, 구시대가 무너진 후, 고대하던 메시아가 왔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이고 환상이며 인간성의 매장이었다. 이성은 무너지고 광기가 지배한다. 그것이 탱고로, 희생제의로,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 터파기로 나타났고, 그렇게 반짝 파토스의 불꽃을 화려하게 피운 뒤 헛되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이 '탱고 3부작'의 종착지다.


이 모두가 먼 옛날, 또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인 것일까?

지혜의 어머니 기손(헤르만 브로흐 『현혹』)마저 세상을 떠난 마당에 대안적 유토피아는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구덩이’를 파야 이 현혹의 탱고를 멈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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