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장 속의 평화

‘‘「지리 문맹」이 세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by 제이슨


『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다카노 히데유키/글항아리/2019

『왜 지금 지리학인가』/하름 데 블레이/사회평론/2019


세계 1위 실패 국가


해적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아프리카 대륙(소말리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제18화 「어부와 해적 - 납치와 약탈의 세계사」) 그러나 소말리아에는 해적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 또한 소말리아의 이야기는 소말리아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르딘 파라의 『해적』은 2011년 작품이지만 거기 그려진 소말리아 형편은 2025년 현재도 그대로다. 세부적인 사항에는 변화가 많지만, 큰 틀은 변함이 없고, 여전히 ‘아수라장’이다. 소말리아는 ‘실패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024년 기준 ‘취약국가지수’ 1위에 올라있다. 이런 상황이 30년 이상 지속되었으니, 지금 30대 초반까지의 젊은 층에게는 이런 현실이 평생 살아온 ‘일상’이다. 『해적』에서 말하듯이 ‘천성’이 현실에 적응해 바뀌어 버린 상태를 ‘정상’인 것처럼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혼돈이 이미 ‘뉴 노멀’을 넘어 그냥 ‘노멀’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연은 복잡하지만 대략이라도 한번 살펴보자.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위치한다. 아프리카 동부의 중간 허리 조금 위쪽 아덴만을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 반도와 마주 보고 있는 뿔처럼 튀어나온 지역이다.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처럼 1960년 독립했다. 국토면적은 63만 7,657㎢로 한반도의 약 3배에 달하고, 인구는 2024년 현재 1,696만 명(IMF 추산)이다.

북부는 영국 식민지였고, 남부는 이탈리아 식민지였다. 그래서 남북 간에 문화와 정서의 차이가 좀 있다. 북부는 척박한 토양이라 전통적으로 유목민 사회였고, 남부는 상대적으로 비옥해 농경사회 전통이 강하다. 이에 따라 남부에서는 북부를 야만적이라면서 무시하고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북부는 영국의 간접통치 결과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 즉 소말리아 특유의 씨족사회 질서가 남아있고, 남부는 이탈리아의 직접통치로 이런 전통과 질서가 많이 흐트러진 상태다.


먼저 중요한 차이점 몇 가지를 열거했다. 이 정도 만으로도 이미 통합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2025년 현재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북부의 소말릴란드는 독립국, 푼틀란드는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 공화국’, 나머지 중부와 남부는 ‘전국시대’다. 전국시대라 함은 이슬람 과격 무장세력 알 샤바브와 국제사회가 공인한 연방정부, 그리고 다른 무장세력들이 어지러운 내전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다. 소말릴란드가 독립국을 자처해도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소말리아연방의 일부로 간주된다.


반면 통합 요소도 강하다. 무엇보다도 소말리아는 국민 대다수가 소말리인으로 사실상 ‘단일민족국가’다.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질적인 부족이나 민족과 섞여 인위적으로 한 국가를 이루는 바람에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다. 당연히 언어도 모두 같은 소말리어를 쓴다. 소말리인은 지부티, 에티오피아, 케냐, 예멘 등 이웃 국가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의 오가덴은 소말리인 다수 지역이어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 외에 ‘디아스포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송금이 GDP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소말리아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이다. 해외 최대 소말리아 공동체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로 그 인구가 1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소말리아가 이처럼 복잡한 내전으로 빠져들게 된 경위는, 글이 길어지므로 아래 책 소개 말미에 첨부한다.


아수라장 속의 평화


그렇다면 소말리아는 왜 이런 수렁에 빠졌으며, 헤어날 길은 없을까? 그 답이 여기에 있다. 원인은 같지만, 각기 다른 해법으로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것을 찾기 위해 가야 할 곳은 소말리아의 북서부의 자칭 독립국 ‘소말릴란드’다. 한 일본인 르포라이터가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한’ 놀라운 기록을 소개한다.


『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다카노 히데유키/글항아리/2019


저자 다카노 히데유키는 1966년생으로 와세다대학 ‘탐험동아리’ 출신의 전업 논픽션 작가다. 실크로드, 미얀마 반군 지대 등 오지와 분쟁지역을 넘나들며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생생한 르포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라는 것이 ‘모토’라고 한다.


이 책은 일본에서는 2013년 발간되었다. 그 내용은 2009년과 2012년 두 차례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국내 번역 소개된 것은 2019년이므로 한참 시간이 지났고, 따라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은 2019년은 물론, 이 글을 쓰는 2025년 현재까지도 소말리아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물론 씨족, 군벌 등의 세력 구도와 실력자들은 일부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라가 갈갈이 찢어져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대로다. 또 한 가지, 앞서 소개한 누르딘 파라의 『해적』과도 시기가 겹친다. 그러므로 이들 두 작품을 같이 읽으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이해도 더 쉬워진다. 어느 쪽이 먼저냐는 별로 상관이 없을 듯하다.


소말리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수라장’이다. 수도인 모가디슈조차도 무장 경호원 없이는 한 발짝도 시내에 나가 다닐 수 없을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현지 르포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 분위기는 살벌하다. 수시로 총탄이 날아다니고, 테러가 일어난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느 한 지방은 전투도 테러도 없는 무풍지대로 주민들이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국제사회에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독립국을 자처하며, 민주적인 선거,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저자도 나와 똑같은 의문이 들어 소말릴란드를 직접 가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 책은 일단 재미있다.

우선 어떻게 가야 하는지부터 막막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소말릴란드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말리아와는 다른 별도 비자를 받아야 하는지, 받는다면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지 등등 기초적인 정보가 없는 것이다. 수소문 끝에 일본에 있는 소말릴란드 사람도 만나고, 인터넷에서 소말릴란드 홈페이지도 찾아내는 등 정보를 최대한 모으고,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소말릴란드 연락사무소를 찾아 비자도 받고… 등등으로 소말릴란드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 마치 저자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처럼 스토리가 이어진다.


소말릴란드의 수도는 하르게이사다. 그곳에 발을 내디딘 저자는 너무나 평온한 분위기에 놀란다. 소말리아 관련 뉴스에서 늘 보는 것처럼 총을 메고 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경찰이나 군인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시장은 활기차고, 살벌한 분위기도 느낄 수 없으며, 호텔 카페 등의 서비스는 정확하고 빠르다. 마치 일본이나 유럽 어느 나라의 지방 소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삶은 ‘정상적’이다.

hargeisa.jpg 소말릴란드 수도 하르게이사의 시장

소말리아는 아수라장인데, 공식적으로는 소말리아 연방의 한 주(州)인 이곳은 어떻게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저자가 취재한 바는 이렇다.

앞서 소말리아 북부는 영국, 남부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였고 이에 따라 문화와 정서에 다소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에 따라 북부는 고유의 관습과 전통이 많이 살아있고, 남부는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는 씨족 사회의 전통이다.

저자는 씨족을 모르면 소말리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특히 분쟁이 그렇다. 모든 분쟁은 씨족 간의 문제로 다뤄지며, 씨족 간의 조정으로 해결된다. 따라서 이런 전통이 살아있는 북부 소말릴란드는 평화를 이루었고, 씨족 간의 조정 능력이 실종된 남부는 분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씨족’을 핵심 키워드로 보았고, 실제 ‘씨족’ 중심의 시각으로 보면 많은 의문이 해소된다.


<씨족 문화>

‘씨족’은 영어로 ‘Clan’으로 번역된다. 보통 아프리카 국가들은 ‘Tribe’, 즉 부족 단위 사회이고, 따라서 부족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크기, 즉 규모로 보면 대략 씨족 < 부족 < 민족 순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혈연 중심의 씨족이 모여서 부족을 형성하고, 큰 부족 또는 몇몇 부족이 모여 ‘추장국’을 이루고, 그것이 확대되어 민족을 형성하거나 여러 민족이 어울려 ‘왕국’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씨족은 공동의 조상을 둔 혈연관계이지만, 부족은 이미 정치-언어-지리적 공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씨족은 수백, 수천 명의 소규모이고, 부족은 수만, 수십만, 때로는 수백만에 이르는 대규모가 된다.

그런데 소말리아 씨족은 조금 다르다. 다른 나라에서는 ‘부족’이라 해야 할 정도의 구성과 규모이지만, clan, ‘씨족’이라고 한다. 그것은 혈연 중심으로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독립적이면서 수평적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이슬람 율법이 들어오면서 씨족은 ‘법적 종교적’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슬람법 ‘샤리아’에 근거한 분쟁 해결 방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경험한 씨족 문화는 이렇다. 소말리아에는 5대(大) 씨족과 그 외 군소 독립 씨족이 있다. 씨족은 공통의 조상을 가진 집단이다. 세대가 내려가면 당연히 분가가 생기고, 그것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이룬다. 이것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씨족-분가-분분가-분분분가-분분분분가…. 실제 소말리아에는 20대 조상까지 순서대로 줄줄 외우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족보는 따지지만 차원이 다르다. 결국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소말릴란드가 ‘평화로운 민주국가’가 된 것은 이 씨족 사회의 분쟁 해결 전통이 잘 작동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소말리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끼어들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들 대씨족 분류는 우리나라에 대입한다면, 경기 중부 호남 영남 등의 지방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이들 지방이 씨족 중심 사회라고 가정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끝까지 내려가면 구성원 수가 1, 2천 명 대가 되는 말단 가문 단위가 된다. 그러므로 분쟁은 씨족 단위 분쟁이 될 수도 있고, 같은 씨족 내부 분가 단위의 ‘내전’, 또는 말단 ‘가문’ 간의 다툼이 될 수도 있다. 이러니 복잡할 수밖에 없다. 실제 소말리아 내전은 씨족 단위, 분가 단위의 대결이 뒤섞여 있고, 또 씨족 간 합종연횡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 세력은 여러 씨족 구성원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분쟁 조정 메커니즘>

그러면 우선 소말릴란드가 평화를 이룩한 비결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소말릴란드의 경우 최대 씨족은 ‘이스자아크’다. 이스자아크 뿐만 아니라 다른 씨족에서도 내부 또는 씨족 간 모든 분쟁은 씨족, 분가, 가문 단위에서 해결된다. 예컨대 누군가 다른 씨족 사람을 살해했다면, 가해 씨족이 피해 씨족에게 남자일 경우, 낙타 100마리, 여자는 낙타 50마리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식이다. 현대에는 낙타 대신 현금으로 지불하되 낙타 한 마리 값을 250달러로 정해 두고 있다. 그러므로 살인의 배상금은 2만 5천 달러인 셈이다. 배상금은 해당 씨족 또는 분가나 가문 전체에 부과된다. 그러니 그 구성원이 1천 명(성인 남자)이라면 1인당 25달러가 부과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온갖 사안에 대한 분쟁 조정 규칙이 있다. 또 여자, 어린이, 노인, 종교 지도자 등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 전쟁을 하더라도 이들은 보호되는 것이다. 소말릴란드는 이런 관습에 의거해 평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두 차례 내전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전 희생자도 이런 식으로 일일이 몸값을 계산해서 ‘정산’을 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씨족 원로회의에서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내전 쌍방이 각각 아리따운 처녀 20명을 선발해 상대방으로 시집보내는 것으로 배상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보복의 악순환 고리 끊기>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보복의 악순환을 끊었다는 것이다.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부의 ‘하위예’ 씨족이 북부의 ‘이스자아크’를 공격하고 학살했다. 이때 북부의 ‘다로드’ 씨족도 학살에 가담했다. ‘이스자아크’가 ‘하위예’를 몰아냈을 때 ‘다로드’는 당연히 보복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스자아크는 보복하지 않고, ‘다로드’와 협상을 통해 함께 소말릴란드 독립국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발견한 소말릴란드의 평화 비결은 철저한 ‘계산’이었다. 즉 내전을 치른 후라도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과거사는 어떠한 지 등을 일일이, 감정적으로 따지기보다는 서로의 피해를 계산하고 배상하는 것으로 문제를 종결 지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금전만능주의로 비칠 수도 있지만, 끝없는 논쟁과 분쟁의 고리를 끊는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다.


소말리아의 다른 지역은 달랐다. 그들은 여자, 노약자 등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뜨렸고, 씨족 간의 보복을 계속했다. 여기에 알 샤바브가 득세했다. 알 샤바브가 득세한 것은 거대 씨족이 군소 씨족을 홀대하고 탄압한 데 따른 반작용이다. 즉 알 샤바브는 씨족 차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강요한 율법, 예컨대 음악, 춤, 서구식 옷차림, 음주 등은 어차피 시골 서민들은 접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금지의 압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원의 저주'의 역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로 ‘자원의 저주’의 ‘역설’이 있다. 즉 소말릴란드에 이렇다 할 자원이 없기 때문에 분쟁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지나친 논리의 단순화이긴 하지만, 실제 영향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자와 현지 언론인으로 안내를 맡았던 사람의 대화는 이렇다.


“그래 맞아. 남부 소말리아가 엉망인데 소말릴란드는 평화를 이뤘잖아. 식민지 상황, 관습의 차이 같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소말릴란드에 돈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게 가장 확실한 이유라고 생각해.”
와이얍(현지 언론인)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소말릴란드에는 원래 산업이라고는 목축밖에 없다. 수도 하르게이사도 폐허가 됐다. 아무것도 없는 나라니까 이권이 있을 수도 없다. 이권이 없으니 부패가 생길 여지도 없다. 그러니까 토지와 재산, 권력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
“그런데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원조 물자와 돈이 들어오면 부패가 창궐할 거야. 바깥세상에서 마피아 조직이 들어오고 지하 경제가 밀려들겠지. 그 과정에서 돈과 권력을 둘러싸고 남부 소말리아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겠어?”(p.135)


이런 논리는 후에 저자가 남부, 즉 모가디슈 취재 과정에서도 되풀이된다. 남부는 ‘문제가 곧 산업’이라는 것이다. ‘문제’를 만들면, 즉 아수라장 속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국민이 굶주리는 상황이 되면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리고, 지원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것이 내전 주체 세력들에게 이익이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자기들끼리 싸우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이야기일까?


저자는 이런 사정을 현장 답사, 현지인, 특히 현지 언론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하나하나 파헤친다. 이 과정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카트’다. ‘카트’란 그 잎을 씹으면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노박덩굴과’의 식물로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소말리아, 특히 소말릴란드에서는 남자들이 모여서 같이 카트를 씹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다. 저자는 소말리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기 위해 매일 같이 카트를 씹는다. 그렇게 약한 환각 상태에서 비로소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고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트 상인.jpg 시장에서 카트를 팔고 있는 사람들

<소말리인의 기질>

앞서 누르딘 파라의 『해적』에서 소말리인들은 “천성적으로 폐쇄적인 관계를 맺고, 기질 상 분리할 수 없고, 성향 상 잔학하며, 쌍둥이들의 싸움처럼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싸움은 일상”이라고 묘사된 것을 보았다. (제18화 「어부와 해적 - 납치와 약탈의 세계사」) 그와 비슷하게 이 책에서 저자는 소말리인들이 성마르고, 거칠며 남의 말을 절대로 끝까지 듣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이는 나쁘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말하자면, 애정 어린 평가다. 그러면서 소말릴란드의 ‘평화’에 대하여 흥미로운 진단을 내린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뻔한 거짓말을 끝도 없이 우긴다. 저자는 안내를 맡은 사람이 먼저 돈을 받고도 안 받았다며 끝까지 우기면서 다시 돈을 받아내는데 질려서 이렇게 쓴다.


마치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지금까지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이라도 물어뜯어버리는 맹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맹수 같은 소말리인은 혼자 독립해 돌아다니는 호랑이가 아니라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자였다. 즉 무리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사자 무리의 규칙은 매우 엄격하다. 소말리인이라면 누구나 무리(씨족)의 그물망 속에 있어서 큰 일탈행위를 하긴 어렵다. 씨족 간에 전쟁이 나도 해결 방법이 정해져 있었다. 그 위에 성립된 것이 바로 소말리공화국인 것이다.(p.140)


<소말릴란드 정치 시스템>

소말릴란드의 정치 시스템도 재미있다. 앞서 소말리아는 씨족 중심 사회라고 했다. 그런데 소말릴란드는 씨족과 정치를 분리했다. 씨족의 원로회의 ‘구루티’가 있고, 의회가 있다. 말하자면 ‘구루티’가 상원이고 의회가 하원인 셈이다. 양쪽 다 씨족 별로 의석 수가 정해져 있다. 원로회의가 다른 국가의 상원과 다른 것은 정치 조직이 아니라 중립적인 위치에서 분쟁을 중재하고,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경우 해결책을 제시하는, 말하자면 대법원 판례를 내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또 원로회의에서 부결되면 의회에서 재의결할 수 없다.


의회와 대통령 선거는 일반 민주주의 국가와 비슷하다. 다만 선거구가 지역이 아니라 씨족 단위로 나눠져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어떤 분가에 의석이 분배되면 그 분가 내에서 의원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10년마다 정당 투표를 해서 상위 3개 정당만 활동토록 한다는 것이다. 이때 3위 이내에 들더라도 어느 한 주에서라도 20% 이상 득표하지 못하면 탈락이다. 참으로 묘안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정당을 무제한 허용하면 결국 씨족, 분가 단위의 정당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정치는 씨족 간 권력쟁탈전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아무리 강력한 씨족이나 분가라도 다른 군소 씨족 또는 분가를 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 때문인지 소수 씨족에서 대통령이 배출되기도 한다.




푼틀란드도 소말릴란드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소말릴란드와 달리 연방 소속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으며, 씨족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푼틀란드도 자치, 독립의 길로 점점 기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또 한 가지 푼틀란드는 해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상황도 작용한다. ‘정부’는 해적을 소탕한다고 하지만, 해적이 ‘씨족 사업’이 되어 있어 근절이 어렵다는 것이다. ‘씨족 사업’이라는 것은 곧 집권 세력도 해적 사업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 소개했던 누르딘 파라의 『해적』이나, 지금 소개한 『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 둘 다 이미 10년 이상 지난 이야기지만, 2025년 현재의 상황도 크게 나아진 것이 없으므로, 그 내용은 지금도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로서’ 유효하다. 여기서는 씨족 중심 문화와 소말릴란드에 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지만, 이 책에는 이외에도 많은 유익한 내용이 있다. 특히 푼틀란드와 모가디슈까지 직접 취재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소말릴란드와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소말리아 내전 경위>

1960년 독립 당시 소말릴란드는 별도로 독립선언을 했다가, 5일 만에 소말리아와 합병했다. 그렇게 그럭저럭 국가 형태를 갖추었다. 국가 붕괴는 1991년 바레 정권의 사회주의 독재가 무너지면서 시작되었다.


시아드 바레는 19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바레 정권은 남부 씨족 중심으로 강력한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북부를 차별했다. 이에 분노한 북부지역 씨족 중심으로 반정부 무장 투쟁이 시작된다. 바레 정권은 북부지역을 무자비하게 폭격하고 학살한다. 이후 여러 군벌이 내전을 벌이다가 1991년 유력 씨족 세력인 아이디드 군벌이 바레 정권을 무너뜨린다. 이때 북부 소말릴란드는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한다. 혼란의 와중에 소말리아 임시 정부가 출범하지만, 이미 내전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정부는 통제력을 잃는다.


이에 1993년 미국 주도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1994년 이른바 ‘블랙 호크 다운’ 사건이 일어난다. 미군은 유력 군벌 지도자 아이디드를 제거하기 위해 정밀 폭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아이디드는 살아남았고, 대신 회의차 모여 있던 여러 유력 씨족 원로 80여 명이 몰살당했다. 벌집을 건드린 셈이다. 이에 분노한 반군과 소말리아 사람들이 미군 헬기를 격추시키고 사망한 미군 장병들 시신을 백주 대로에 끌고 다녔다. 이 장면은 TV 화면을 통해 전 세계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 내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결국 1995년 소말리아를 무법천지로 내버려 둔 채 유엔군은 철수해 버린다. 미국과 유엔의 개입이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킨 것이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의 한 장면

이후 아이디드는 사망하고, 내전 상태가 지속되다가 2006년 과도연방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정부를 위협한다. ‘이슬람법정연대’가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해, 연방정부는 수도에 입성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이슬람법정연대의 과격 분파 ‘알 샤바브’가 득세해 모가디슈와 남부 대부분을 장악한다. 그러나 2011년 에티오피아와 케냐가 침공,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에서 쫓겨나고, 2012년 21년 만에 소말리아의 공식 정부가 다시 들어선다. 그러나 알 샤바브가 여전히 준동하고, 씨족 간, 군벌 간 대립, 테러 등이 계속된다. 한때 정부군에 밀려 위축되었던 알 샤바브는 다시 반격에 나서 야금야금 세를 키우면서 2025년 현재 수도 모가디슈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30년 넘게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지리적 문맹이 세계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앞서 ‘블랙 호크 다운’ 사건을 잠깐 언급했다. 그 사건이야말로 현지 사정에 무지했던 것이 원인이다. 크게 2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씨족 중심 문화다. 외국군이 분쟁지역에 가면 활동을 위해 현지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말리아에서 미군과 유엔평화유지군이 고용한 현지인들은 당연히 모두 어떤 씨족, 분가, 가문에 소속되어 있다. 이들의 활동이 낱낱이 소속 가문을 통해 씨족에 전해지는 것이다. 씨족 중심의 군벌이 평화유지군의 움직임을 꿰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역시 씨족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최대 군벌 우두머리로 바레 정권을 무너뜨린 아이디드는 당연히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졌고, 정권은 넘어가 버렸다. 분노한 아이디드는 무력으로 권력을 되찾고자 했다. 즉 소말리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그 걸림돌을 제거하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군의 공격에서 아이디드는 살아남았고, 주요 씨족 원로들이 대거 사망했다. 이것이 소말리아 전체가 평화유지군에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분노가 있고, 정보가 있으니 ‘블랙호크 다운’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지리학’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모든 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이기고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하는 족족 골칫거리만 만들어냈다. 베트남이 그랬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이 그렇다. 문화와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해서 그렇다. 이는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정설’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을 ‘지리적 문맹’으로 규정하면서 하나하나 짚어주는 친절한 책이 있다.


『왜 지금 지리학인가』/하름 데 블레이/사회평론/2015


여기서 말하는 ‘지리학’이란 단지 지형이나 땅과 바다 이름을 외우는 교과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리적 위치와 형태가 삶과 문화에 어떻게 작용하며, 그것이 세계정세에는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폭넓은 의미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지리 문맹’이 세계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는 경고다.

저자 하름 데 블레이((1935~2014)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지리학자다.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등지에서 공부했고 미시간 주립대, 마이애미대 등에서 강의했다. 20년 이상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의 연구 및 탐험 위원회, 내셔널 지오그래픽 리서치 저널의 창립 편집자 등으로 활동했다. 지정학적, 환경적 문제를 주로 연구했다. 그의 역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대규모 환경변화, 인구 이동, 문명의 충돌 등 21세기 인류의 도전을 지리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유용하다.


나의 기억 속에 학창 시절 ‘지리’는 “지리지리 한 지리”란 말로 통했다. 당시엔 수능이 아니라 ‘예비고사’란 이름으로 대학 입시 본고사에는 점수가 반영되지 않고, 일정 수준 이상만 되면 대입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자격시험’이었다. 지리는 사회과의 한 부분으로 점수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고 대부분 대학 본고사에 지리 시험은 없었기 때문이 공부하기도 좀 애매한, 게다가 산, 바다, 산맥, 특산물 등등 외워야 할 것만 많은 재미없는 천덕꾸러기 과목이었다. 우리 학교 지리선생님은 참 독특한 분이셨다. 아주 대놓고, 지리는 입시에 큰 비중이 없으니, 당신 수업시간에는 필기도 하지 말고, 집에 가서 따로 공부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단 한 가지, 졸지만 말고 그냥 들으라는 것이다. 수업 방식도 독특했다. 어떤 한 가지 사실이 나오면 교과서에 나오는 연관된 사항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1년 동안 교과서를 열댓 번 되풀이하는 셈이다. 그렇게 ‘세뇌’시키는 것처럼 해서 사지선다형 문제를 잘 ‘찍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지금도 칠판에 수도 없이 지도를 그렸다 지웠다 하시는 선생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런데 그 ‘지리’가 21세기 인류에게 도전하는 문제에 답을 준다고?

책 선전 문구는 점입가경이다. “21세기를 읽는 키워드는 지리학적 통찰”,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압도적 지식과 탄탄한 현장 조사로 분석해 낸 세계 이슈와 미래전망!”… 게다가 목차를 보니 인구증가와 지구의 미래, 기후변화, 환경, 전쟁, 테러, 중국,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온갖 테마와 지역이 망라되어 있다. 지리가 이런 것에 답을 준다고? 그냥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먼저 미국 교육이 ‘지리학’을 홀대하는 데 대한 비난과 경고로 시작한다. 그는 지리학을 “단순히 바다와 산맥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공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역사학이 ’시간적’, 정치학과 경제학이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대비된다. ‘공간’이란 개념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내게는 상당한 설득력으로 다가왔다. 지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지리학을 빼고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은가? 공간을 빼 버리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지도의 왜곡>

지도의 왜곡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메르카토르 투영도법에 따른 지도는 둥근 구(球) 모양의 지구를 평면에 옮기다 보니 극지방으로 갈수록 왜곡이 심해진다. 예컨대 그린란드가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여 남아메리카 대륙과 비슷해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그 면적이 1/8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뿐 만 아니다. 지도는 정치, 경제, 군사적 목적에 따라 고의로 조작되기도 하고, 표기에 따라 분쟁이 일어나거나 정세가 바뀌기도 한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저자는 동해 표기문제를 거론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이라크가 1990년 발행한 지도에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표기된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쿠웨이트 침공 징후로 본 저자가 회의 참석 중 만난 하원의원에게 이 문제를 가지고 질문했다. 그랬더니 그 하원의원은 현지 대사관이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으며, 단순히 이웃나라 사이의 사소한 분쟁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이에 따라 미국은 쿠웨이트를 구하기 위하여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1991년 제1차 걸프전쟁이다. 지도가 한 나라의 전략을 대변하고, 전란을 예고할 수도 있다는 좋은 사례인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지도를 왜곡하여 정치적 전략적 목표를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의 핵심부와 주변부>

‘주제도’ 이야기도 재미있다. 인구 밀도, 인종 분포, 종교 구분 등 특정한 주제에 맞춰 그리는 지도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것이다. 19세기 런던에서 콜레라 발생 빈도를 나타낸 지도를 바탕으로 방역에 성공했다든가, 오늘날 특정 범죄의 발생 빈도를 지리적으로 분석해 치안 수요를 결정하는 것 등이 주제도의 활용가치를 잘 보여준다. 인구 문제에 있어서도 도시화, 출생률, 인구밀도 등을 나타냄으로써 많은 추세를 말해주며, 그것은 곧 미래 정책을 결정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인상적인 것은 세계를 핵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어 나타낸 지도다. 아메리카 대륙을 중앙에 놓고 세계지도를 그리면 북미와 동쪽에 유럽, 그리고 서쪽에 한국과 일본, 호주를 포함하는 구역을 묶을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인구의 15% 소득의 75%를 차지하는 핵심부다. 이 지도를 보여주면서 저자는 평등, 즉 빈부격차 문제를 거론하면서 일종의 ‘운명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 중 일부는 장기간 평화와 안정을 누리는 지역에서 태어나겠지만, 나머지는 고국의 고질적 분쟁에 직면할 것이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분쟁의 수라장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열대 저소득 국가의 한 촌락에서 시작된 삶의 지평은 부유한 국가의 현대적 도시에서 태어난 갓난아기의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리고 세계 모든 지역에서 심지어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에서도 장소는 여성과 남성에게 매우 다른 의미를 띤다. 세계화의 물결은 모든 배를 띄워 올리지만 그곳에 탄 승무원은 대부분 남성이다.(p.136)


세계 핵심부 지도.jpg

이 책에 따르면, 수많은 주변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핵심부로 진입하기를 원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자기 출생지가 아닌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전체의 3%에 불과하다.(이 수치의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서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지구 유람선’ 승객의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자기가 태어난 선실 안이나 그 근처에서 죽는다.” 한 마디로 ‘핵심부’에 태어난 것은 행운이고, ‘주변부’에 태어난 사람 절대다수는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여러 에피소드에서 살펴본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핵심부보다 주변부의 인구 증가율이 월등이 높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기후변화>

인구문제 다음으로 거론하는 것은 기후변화와 환경이다.

기후변화에 대하여 저자는 신중한 입장인 것 같다. 기후 변화는 우리 사고 범위를 벗어나는 장구한 세월의 문제다. 이와 관련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이 재미있다. 40세인 사람이라면, 1억 년을 1년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 달은 약 8백30만 년에 해당하며, 한 주는 2백만 년에 조금 못 미친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하루는 약 27만 5천 년에 해당한다. 그렇게 놓고 보았을 때, 우리의 일생에서 현생 인류는 바로 오늘 출현했으며, 현대 문명이 발생한 지는 불과 한 시간이 못 된다.(p.154)


이 장구한 세월 속에서 지구의 기후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빙하기가 있었고, 유성이 충돌하기도 했고, 그래서 달이 생기고, 생물 멸종도 몇 차례 있었다. 지금은 1만여 년 전부터 시작된 ‘홀로세’라는 간빙기의 온난한 기후를 장기간 누리며 인류가 번성한 상태라고 한다. 최근 수십만 년의 지구 역사를 살펴보면 추워지면 빙하가 극지방에서 적도 쪽으로 많이 내려오고, 따뜻해지면 극지방으로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했고, 그에 따라 생명체가 살기 좋은 곳으로 옮아 다니면서 멸종을 피하고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무수한 생명체가 멸종되기도 한 것은 물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인류 문명, 예컨대 화석연료 등이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므로 그 요인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과연 사람이 지구의 기후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 물음과 관련해서 학자들이 지구연대기 상의 현시점을 ‘플라이스세’니 ‘홀로세’니 하는 구분 대신 ‘인류세’로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 흥미롭다. 이는 이전까지 지구 환경의 변화가 모두 자연적인 것이었다면 이제 인류의 활동이 그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타당할까? 가장 합리적인 생각은, 이 책의 저자도 주장하듯이, 인간이 자연을 바꿀 수는 없지만, 변화를, 또는 재앙을, 가속화하거나 지연시킬 수는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류가 현재 기후 변화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대기 오염률을 줄이는 것이 환경은 물론 보건과 관련해서도 국제적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멈추는’ 형태의 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빙하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왔다 갈 것이며, 빙하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할 것이다. 해수면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다. 생물종과 문화와 문명들은 번성했다가 몰락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연의 힘이 승리할 것이다.(p.221)


<전쟁과 테러>

이제 논의는 전쟁과 테러로 옮아간다. 어쩌면 전쟁과 테러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지리에 관심을 갖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일반 대중의 지리 지식, 또는 상식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1,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기간이었다고 한다. “전쟁은 우리의 지리 교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미국이 곱씹고 있는 최악의 실패는 무엇일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도 있지만, 가장 뼈아픈 것은 베트남이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의 중심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국방장관을 인용한다.


회고록에서 맥나마라는 “베트남에서 우리가 재앙을 맞게 된 열한 가지 주요 원인”을 열거했는데 그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친구와 적 모두를 오판한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의 역사, 문화, 정치에 대한 우리의 심대한 무지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주의가 사람들을 추동하는 힘을 과소평가했으며 (….) 세계 여러 곳에서 같은 실수를 계속하고 있다.(p.229)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은 곤욕을 치렀다. 국내적 진통으로 저자는 “세대 간 불신, 권위에 대한 의심, 문화적 규범의 부정, 예의범절의 파괴를 초래하며 사회조직을 손상시켰다”면서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질서는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되었다”라고 지적한다. 그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고 그 원인은 오직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반전운동의 문제점도 지적된다. 한 대학 신입생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베트남을 짚어보라고 했더니 제대로 찾은 사람이 7%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사실상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반대 시위에 휩쓸린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자들에게 지도를 들이밀어 그들이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유튜브 쇼츠의 원조격이다. 만약 지리 지식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적어도 정책입안자나 군 고위 지휘관들의 경우라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전쟁과 테러와 관련해서는 세계 ‘정치지리학적 지도’가 주목을 끈다. 이 지도는 세계를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유럽, 북부아프리카-서남아시아, 사하라이남아프리카, 남부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부아시아, 러시아, 호주권, 태평양권 등의 지리영역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새뮤얼 헌팅턴이 1990년대 초반에 내놓은 ‘문명의 충돌’이 소환된다. 헌팅턴은 세계의 지정학적 무대가 문화적 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으며 미래의 충돌은 그 경계에서 문화적 ‘단층선 전쟁’으로 폭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서구 대 비서구’의 충돌이 될 것”, 즉 주로 서구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지배 영역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런 예측은 숱한 반론을 불러일으켰고, 시간이 지나면서 과도한 단순화와 일반화, 서구 중심주의 등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 책의 저자는 여기에 “다음번 갈등에는 중국이 연관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슬람 테러에 대하여>

테러와 관련해서 화두는 단연 이슬람이다. 이전에는 아일랜드공화군, 스페인의 바스크 분리주의자, 스리랑카의 타밀 호랑이, 프랑스의 코르시카인, 러시아의 체첸인, 중국의 위구르인 등등 자신들을 지배하는 국가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테러가 기능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차원이 다르다. 알 카에다, 탈레반 등이 등장하면서 세계 테러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저자는 이에 대하여 이전까지 있었던 테러는 ‘적국의 도시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벌인 것’이었지만, 이슬람 테러는 전지구적이고 무작위적이며 “지리적 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극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저자는 역사상 무슬림 지배 영역 지도를 제시한다. 이런 지도가 세계 거의 모든 마드라사(이슬람학교)에 걸려 있으며, 이것을 보는 무슬림은 누구나 ‘과거 이슬람의 영광’을 떠올리면서 오늘날의 ‘굴욕’을 되새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분노의 지리학’으로 규정한다. 즉 이 영역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그 너머로 팽창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 이슬람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신경정신과학자 샘 해리스를 인용한다.


샘 해리스는 『종교의 종말』에서 “쿠란은 거의 매 페이지마다 종교적 갈등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냉혹한 평가지만 그나마 실제보다 누그러뜨려 말한 것이다. 독실한 무슬림들은 “이교도”의 요건을 충족하는 이들에 대한 쿠란의 성난 탄핵, “불신자”들과의 교류를 금하는 경고, “하나님의 계시를 불신하는 자들을 화염 속으로 들게 하며 그들의 피부가 불에 익어 다른 피부로 변하니 그들은 고통을 맛보더라”(쿠란 4:55) 하는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물라들은 이를 거의 여과 없이 설교한다. 이슬람의 “교의의 기본 요점은 불신자의 개종, 정복, 살해임은 부정할 수 없다. 즉 불신자와 배교자를 죽이고 세상을 정복하라는 것이다”라고 해리스는 주장한다. (254 ~255)


이슬람의 특징은 발원지 쪽으로 갈수록 강경하고, 반대로 멀어질수록 온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다소 회의적이다. 이슬람 교의가 불신자는 물론 배교자와 개종 권유자까지 모두 죽음으로 단죄하도록 하고 있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테러 행위에 대해 혐오나 거부를 표현하는 것도 이란 같은 곳에서는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로 죄악시되기 때문이다. 즉 “교의는 힘이 있고 우세한 반면 이성은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어 그 어떤 ‘온건한’ 무슬림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슬림 영역 지도.jpg


아프리카 지도에 나타난 과거 이슬람 지배 강역은 현대의 이슬람 세력권을 거의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며 그 남쪽 경계선이 ‘충돌’ 지역이자, 오늘날 무장 테러집단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저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종, 종교와 그 분파, 역사적 경험, 문화, 지형, 교육, 인프라 등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미국의 개입 실패 원인으로 ‘지리적 문맹’을 지적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앞서 소개한 소말리아 사태다. 그러면서 “지도를 읽음으로써” 테러 공격 대상을 예측하고 예방책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테러 집단의 은신처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논의의 방향은 이제 주요 국가 또는 지역 정세로 옮아간다. 모든 지역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선택한 것은 중국,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등 4곳이다.


<중국 - '신식민주의'>

중국에 대하여는 ‘신식민주의’라는 용어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눈에 띈다. 중국의 급속한 성장은 저자의 예측이 지금까지 우리가 본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중국의 맹렬한 세계 진출이 과거 유럽 식민 열강들의 활동과 비교되면서 ‘신식민주의자’로 일컬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중국의 세계 지배’를 예측하는 시각을 소개한다.


몇몇 학자들은 이런 중국인들의 부지런함을 앞으로 닥칠 중국의 세계 지배를 예고하는 신호로 해석하기도 한다.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When China Rules the World)』이라는 책을 쓴 마틴 자크는 세계를 지배하는 이 “문명국가”가(이 책의 영문판 부제의 표현을 빌리면) “서구 세계의 종말과 신세계 질서의 탄생”을 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은 문제는 그 시점과 방식뿐이다.(p.335)


그렇다면 중국은 결국 미국과 충돌할 것인가? 그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저자는 중국의 권위주의, 인권 무시, 남초(男超)의 인구구성, 군사적 팽창, 민족주의 대두, 원자재 확보 필요성 등을 든다. 반대의 요소로는 이데올로기 수출을 추구하지 않는다든가, 세속주의 입장에서 이슬람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경제 개발을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과 중국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호 이해와 교류 확대’라는 처방을 내놓아 다소 맥이 빠지게 한다. 이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결국은 뻔한 것이 정답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유럽 - '종이호랑이'>

유럽은 넓이가 미국 서부 정도밖에 안된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인간 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그 중요한 요인은 문화적 다양성과 자연적 다양성이 겹치기 때문이다. 산맥 계곡 등의 장벽이 심하지 않은 북유럽 저지대에는 크고 강한 나라가 형성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곳은 수많은 문화와 언어의 파편화가 이뤄졌다. 자연적 장벽은 더욱 복잡하지만, 거기에는 온갖 광물과 에너지 자원이 풍부해 유럽의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50개쯤 되는 나라가 지금은 하나로 통합을 이루어가고 있다.


유럽인들은 땅속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묻힌 온갖 자원을 가지고 세계 시장에서 대적할 바 없는 생산물을 만들어냈다. 스위스 시계, 네덜란드 치즈, 아일랜드 리넨, 프랑스 와인, 스웨덴 가구, 핀란드 전자 제품 등이 그것이다. 또 유럽 각국의 중공업은 기차와 선박, 자동차와 비행기, 트럭과 탱크를 생산했다.(p.36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분쟁의 도가니’다. 유럽은 20세기에만 두 차례나 인류를 참혹한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유럽연합(EU)은 다시 이런 사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다짐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이 서유럽 부흥을 위하여 막대한 지원을 한 마샬 플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이 지금까지 이뤄낸 통합과 경제성장은 놀라운 성취이지만, 저자는 이미 EU가 봉착한 난관을 열거하고 있다. 회원국 내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경제 쇠퇴, 고령화에 따른 복지비용 증가 압력 등 숱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유럽인들이 유럽연합 프로젝트를 양의 탈을 쓴 세계화이자 각 나라(그리고 역)의 생활 방식에 대한 달갑잖은 개입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의 국민이든 아니든, 이제 공동의 불가피한 희생 없이는 유럽인들도 조기에 은퇴하고, 구시대의 재정 모델에 의거한 연금 및 복지 혜택을 받고, 짧은 노동일과 긴 휴가를 누리기 힘들어질 것이다. 지도자와 시민들 사이에는 지나간 성장과 번영의 시대에 유럽인들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의사소통과 설명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럽은 종이호랑이다.(p.396)


저자의 이와 같은 진단은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유효하며, 실제로 일부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 - 골치 아픈 땅>

러시아는 한 대륙에 버금가는 광대한 영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그러면서도 거의 내륙에 갇혀 있는 나라라는 것이 특징이다. 광대한 영토 대부분이 추운 고위도 지역이라는 한계점도 분명하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제국의 해체’를 경험했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대의 불안전하고 위태로운 민주주의 실험기를 보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이 권좌에 오르면서 권위주의와 중앙집권 강화를 통하여 국내정치와 경제를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 안정은 소수민족 갈등, 민주주의 위축 등이 수반된 것이다.

푸틴의 러시아는 옛 소련의 영역이자, 지금은 러시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근외 지역(Near Abroad)’에 대한 지배력과 수많은 소수민족 문제에 직면해 있다. 소련 붕괴 후 수많은 테러로 러시아를 가장 괴롭혔던 체첸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체첸은 푸틴의 강경책으로 어느 정도 제압이 되었지만, 불씨는 여전하다.


또 한 가지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구 문제다. 러시아 인구는 1991년 1억 4천8백만 명에서 2012년 1억 4천1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기대 수명도 낮아졌다. 저자는 이런 추세가 러시아의 미래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본다. 최근 추세를 보면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다가 2021년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2025년 1월 기준으로 대략 1억 4천6백만 명 수준이다.


저자는 “러시아가 과거 소련이 지녔던 세계적 강대국의 지위를 다시 회복할 능력은 없을지 몰라도, 현대 세계의 주축 세력 중 하나임은 분명”하며, “유럽이 어지럽고 푸틴이 권좌로 복귀한 지금, 유라시아의 새로운 지도와 세계 속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러시아의 역할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면서 푸틴의 최대 난제로 우크라이나를 꼽았다. 2025년 시점에서 보면 저자의 예측이 대체로 적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 여덟 가지 재앙과 또 한 가지 재앙>

마지막 주제는 아프리카다. 아프리카는 가난과 부패로 인상 지어진다. 저자는 “아프리카는 잇따른 불행에 시달리고 있으며, 아프리카를 오늘날의 불리한 위치에 놓은 것처럼 복합적인 재난을 경험한 지역은 이 지구상에는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아프리카가 처한 곤경의 원인을 8가지로 정리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기후변화 = 기후변화로 사하라사막이 생기면서 그 이남 지역이 영구 고립되고 말았다.

생태적 충격 = 기후변화에 따른 온난화로 적도 기후가 강해졌다. 온도 습도가 높아져 열대우림, 맹수, 각종 질병 등으로 생존 환경이 열악해졌다.

이슬람에 의한 분열 =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소말리아-케냐 국경까지 이슬람과 애니미즘·기독교 세계의 경계선이 그어졌다. 이를 경계로 처참한 분쟁이 빚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노예무역으로 인한 인구 감소 = 1700년부터 1810년까지 교역이 이루어진 노예 수는 1천2백만 명에서 그 2배 이상으로 추산된다.

식민주의 =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로 착취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으며, 자의적인 경계선으로 민족과 영토마저 갈갈이 찢어졌다.

냉전 = 동서 양진영이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독재 부패 등을 눈감아줬고,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식민 지배자를 독재자로 맞바꾼 꼴이 되었다.

세계화 = 아프리카 국가들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해 더욱 뒤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아프리카 도시들 상당수는 식민지 시대가 끝났을 당시보다 더 나쁜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리더십의 실패 =존경받는 아프리카의 ‘국부’들은 곧 스스로 부패한 독재자가 되어버렸거나 다른 독재자로 교체되었다.

아프리카 종족 지도.jpg 국경이 아닌 종족의 영역으로 표시한 이 지도는 아프리카의 인위적 국경 획정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아프리카를 고난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은 왜 중요할까? 저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의 문제와 세계의 관심이 일치하는 이유는 세계가 기능적으로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구 마을’의 한 이웃이 복합적인 병폐로 인해 남보다 고통받고 있다면, 그 치료의 혜택은 모두에게 돌아간다. 그러므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돕는 일은 단순한 이타주의가 아니라, 나머지 세계 – 특히 미국 -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이다.(p.466)


즉 지구를 인체와 같은 유기체로 본다면, 예컨대 아픈 다리를 치료하는 것은 머리나 팔에게도 유익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다시 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저자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중국은 자본을 앞세워 맹렬하게 진출하면서 신식민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고 이것이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아프리카 침투는 냉전의 대리전이 끝난 이후 이 대륙에 발생한 가장 불길한 사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승리로 이어질지 아프리카의 또 다른 재앙이 될지는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p.465)


이렇게 저자는 “중국이 아프리카의 아홉 번째 재앙이 될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말리아에서 시작한 여정은 이렇게 아프리카대륙에 대한 중국의 신식민주의 우려로 마무리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아프리카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안정, 우리 개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리적 문맹’이 일을 그르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에필로그를 통해 내놓은 전망과 해법은 지금도 유효하다.


중국 경제는 2030년 이전에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해서 곧 중국의 정치 체제가 내구성을 갖추거나 중국의 사회 규범 – 특히 ‘한족화’ 정책 -이 글로벌화하는 세계에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쇠퇴에 대한 한탄이 나오고 있지만, 그 절대 우위는 퇴색할지언정 미국은 계속해서 국제적 국가 체제의 주춧돌로 남을 것이다. 미국은 대의 정부, 인권, 다문화의 공존, 개방적 사회 등 여러 영역에서 세계 많은 나라들과 공통 기반을 공유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계에서도 미국의 리더십은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인도에서 브라질, 유럽에서 인도네시아까지, 미국의 본질적 역사적 동맹들은 세계 무대에서 점점 중요해질 것이다. 이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미국과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국제적 동맹국들 사이의 자발적 관계 강화를 중심에 놓은 전 지구적 계획을 수립할 기회를 제시한다. 이러한 기회, 즉 확실히 검증된 기초 위에 건설된 지리적 대계야말로,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세계의 존망이 걸려 있다.(p.490, 491)


이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저자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이 미국 대통령이 될 것으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예측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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