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인 내가 미워하는 세상 아버지들의 유형 몇 가지

- 내 이익은 뒤, 선함과 노력, 애정. 예이츠 '내 아들을 위한 기도'

by 가을에 내리는 눈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농경의 신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언젠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 자기를 몰아낼 것이라는 어머니 가이아의 저주와 예언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집어삼킨다. 그러나 아내 레아의 속임수에 넘어가 막내인 제우스는 미처 삼키지 못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의 눈을 피해 무사히 성장했다.


어느 날 제우스는 아내 메티스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에게 먹은 것을 토해내게 하는 약을 먹인다.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먹힌 형과 누나들을 그렇게 무사히 구출한다. 그 후 올림포스 산에 진을 친 제우스는 오틔뤼스 산에 포진한 아버지 크로노스와 그가 속한 티탄 신족과의 10년 이상의 긴 전쟁에서 결국에는 승리한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제우스도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것인가? 앞으로 메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자신의 아들이 자기를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개구리로 변신한 그는 아내 메티스를 파리로 변하게 한다. 그러고는 딸 아테나를 임신하고 있던 메티스를 그대로 삼켜버린다. 자기 아버지 크로노스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내 메티스는 이제 다른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제우스의 뱃속에 있으니까. 이미 잉태하고 있던 딸 아테나는 아버지의 뱃속, 그리고 그 안의 어머니 메티스의 몸에서 출산이 된다. 이제 제우스는 엄청난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자기 몸 안에 이미 태어난 딸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문제 해결을 위해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나선다. 그가 제우스의 머리를 쪼개자 그 갈라진 틈에서 이미 성인인 상태의 아테나가 큰 소리를 지르며 이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어머니 메티스가 딸을 위해 만든 갑옷과 방패로 완전무장한 상태로 그렇게. 하늘과 땅, 바다가 아테나의 탄생을 크게 축하한다.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낸다. 아내 메티스는 그 후에도 계속 제우스의 뱃속에 있었고 제우스는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테나는 제우스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자식이다. 딸이니 자신의 자리를 넘볼 위험은 이제 사라졌고 첫사랑 메티스의 자식이니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아테나가 참으로 대단한 여신이기도 했고.


성경 속에도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많은 얘기들이 나온다. 다윗왕의 장남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반역을 한다. 그 외부적 표식으로 아버지의 여인들을 취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지고 만다. 절대 죽이지는 말라는 다윗왕의 명을 어긴 심복 요합의 손에 의해 잔인하고 허망하게 죽는다.


현실 속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났다. 아들을 죽인 영조, 역시 자기 아들을 죽인 러시아 표트르대제, 그리고 이반 4세 (우리가 알고 있는 이반 뇌제 - 워낙 행실이 잔인하고 공포정치로 유명하다. 뇌제의 '뇌'는 번개, 우뢰다. 두렵다/끔찍하다 뭐 이런 뜻이다. 영어가 더 쉽다, Ivan the terrible 무섭고 끔찍한 이반 황제)도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 그야말로 끔찍하고 무섭고, 잔인한 짓이다. 친아버지와 친아들 사이 아닌가? 권력이란 것이 인간을 그렇게까지 만드나? 허무하고 슬픈 일이다.


아버지인 내가 미워하는 세상 속 아버지들의 유형, 이제 시작한다.


하나, 늘 자기 자신이 우선인 아버지. 남보다 자기를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의 이익과 안위가 타인의 그것보다는 앞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내와 자식은 남이 아니다. 소중한 자신의 가족이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신이 존재하게 만든 자기 영역 속의 참으로 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아버지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 어떤 이유로나 자신이 먼저다. 그저 자기밖에는 없다. 자기가 다 먹고 다 쓰고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때 마지못해 자식과 아내에게 준다. 나는 살면서 이런 유형의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역겨운 존재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이런 인물이다. 조금은 민감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해해 주시기를. 성경 속의 아브라함과 그의 그 귀한 아들 이삭의 이야기. 나는 지금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 이삭은 그 뒤에 어떤 눈으로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늘 궁금하다. 자신의 믿음은 그저 자신의 것이다. 그것과 자식의 생명을 연결지을 수는 없다. 종교를 잘 모르는, 성경의 깊은 뜻도 잘은 모르는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둘, 가족을 위해 자신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가장. 아버지는 가장이다. 전통적 의미에서는 더욱 그렇다. 리더다. 리더십이란 기본적으로 식량과 안전을 의미한다고 예전에 하버드대학 카네기 리더십센터에서 나온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것은 책무다. 그들에게 먹을 것과 일상 속의 안전, 가능한 한 편안한 삶을 주기 위해 늘 자신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혹 배움의 끈이 그리 길지는 않은 아버지, 뭐 어떤가? 애초에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는 가장, 그 또한 어쩌겠나?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낮은 자리의 일에서 적은 돈을 받고 있더라도,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서 최대한 처자식 굶기지 않으면 된다. 아내와 자식들 또한 그런 가장을 존중하고 존경할 것이다. 그의 성실함, 그의 한결같음, 가족을 위한 그의 변하지 않는 커미트먼트. 아름다운 덕목이다.


그런데 도무지 그런 개념이 없다. 무엇보다 게으르다, 뭔가 분연히 일어나 해보려는 마음 자체가 없다. 본인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기회가 그의 문을 두드린들 그가 그것을 알아채겠나? 그 황금같은 기회를 낚아채겠나? 그저 모든 것이 재미없기만 한 그런 나태와 무책임의 가장. 이런 유형 또한 나는 많이 보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책도 없이 자식은 또 많이 낳는다. 어쩌자고? 그 자식들은 어쩌라고? 그들에게는 한마디 항변의 기회조차 없다, 태어나기 전에.


흥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디 이런 게으르고 대책 없고, 아무 생각이 없는 '뭐 어찌 되겠지!' 식의 아버지는 아니었기를. 그저 모든 것을 세상과 운에만 맡기는, 그 또한 자식들의 몫이라고 지극히 이기적인 스탠스를 취했던 가장은 아니었기를.


셋,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다. 슬픈 일이고 불행한 결과다. 사실 그동안 잘 살았다. 가족 모두 당연 그 혜택을 보았다. 그가 망하고 싶어 망했겠나? 그에게 그럴 고의나 중과실이 있었겠나? 그저 시장의 변화, 조금은 과했던 의욕, 전략과 전술상의 작은 미스, 경쟁의 격화, 제도와 규제의 급격한 수정 이런 외부 환경적 요인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리라. 누구를 탓하고 누구에게 그 잔인한 책임을 지울 것인가?


그러나 많은 경우 가장이 독박을 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경우도 주위에서 자주 본다, 많이 보았다. 그렇게 쓸쓸히 은둔의 길을 걷는 가여운 아버지들. 때로는 가족도 냉정하다. 이해는 한다, 현실 속 삶의 고난이 가져오는 감정의 뒤틀린 변형을!


그러나 이와는 그 비난의 가능성이 전혀 다른 경우도 많다. 소위 '작심하고 말아먹은' 경우다. 과도한 주식 투자의 반복, 그로 인한 침몰/도박과 약물, 알콜에의 습관적 의존/육체적인 외도와 그것이 초래한 가정의 분리... 많다 이런 유형의 재산 소멸과 가족관계 파탄의 모습은. 100% 그의 책임이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때 자식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무슨 낯으로 그들을 보겠나?


베토픈의 아버지가 이랬다. 베토픈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음악가였다. 궁정에서 일했으니 수입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베토픈의 아버지는 술에 잡아먹혔다. 결국 17살의 여전히 어린 나이 베토픈이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으로서의 모든 책임을 짊어진다. 불행하게도 그가 어릴 때부터 목격했던 아버지의 음주습관과 과도한 가족 통제의 나쁜 모습은 그대로 베토픈 그에게 옮겨왔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경험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모짜르트의 아버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늘 아들에게 다정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넷, 자식은 자신이 원해서 혹은 자신의 요구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부모가 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태어나게 한 것이다. 오직 그들의 필요와 욕구 충족의 행위의 결과로. 당연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게 한 그 자식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적어도 상호 암묵적 동의와 기대에 따른 의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는 그리 본다.


오랜 친구 중에 나이 오십 중반을 넘어 사별하고 재혼을 한 사람이 있다. 이해는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과 아무 상관도 그 어떤 말을 할 위치에도 있지 않은 친구인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그런 서류와 제도상의 두 번째 혼인을. 왜? 나의 논거는 단순하고 유치하다 - 이미 존재하는 두 명의 자식들의 재산상의 권리를 심하게 침해하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인가?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나도 몇 번 만났다. 그들의 아버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은 아버지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것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역할과 기여도 클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몫도 있다. 그런데 새로운 존재가 이 구조에 들어온다. 똑같은 지분을 가지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유럽 여러나라 왕실의 왕위 계승 절차는 아주 보수적이고 까다롭다. 많은 것을 규정해놓고 있다. 우선은 적자, 그리고 맏이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려면 충족해야 할 요건이 참으로 많다. 그렇게 보면 다윗왕의 아내 밧세바 (Bathesheba)와 훗날 막판 뒤집기를 통해 왕이 된 그녀의 아들 솔로몬, 결국 통일 이스라엘을 두 나라로 갈라지게 한 주역 손자 르호보암 (솔로몬의 아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다섯, 나이 들어서도 자신의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래서 결국은 재산상의 큰 손실을 가져오는 가장. 얼마 전 70세가 넘은 홍콩의 어느 남자 배우가, 30세 가량의 미모의 여성과 재혼을 위한 서류 절차를 끝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나는 그런 뉴스 관심 없다, 그냥 뜨길래 본 것이다. 다만 그때 위에서와 동일한 의문이 들었다 - 자식이 없나? 돈이 정말 많은가, 나누어도 나누어도 여전히 많은? 불화가 있나 자식들과? 그 상대 여성의 스탠스와 판단의 근거가 궁금했다. 왜? (무엇을 위해? What for? - 상대적으로 짧을 기대 잔존 수명/재산/아니면 사랑?)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유튜브를 위한 허구인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 이런 영상을 하나 보았다. 역시 70에 가까운 혼자된 아버지다.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다. 둘 다 결혼은 한 듯하다. 그들 결혼 때에도 뭐 제대로 보태준 것은 없다. 그 두 자식은 지금 힘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냥 그렇다. 서로 먹고살기 바쁘니까!


어느 날 이 아버지가 돌연 동남아 어느 가난한 국가로 간다. 국제결혼을 위해 갔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 상대는 20대 중반의 현지 여성이다. 그곳에서 한 1년쯤 '나름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듯하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불보듯 뻔한 것 아닌가? 결국 얼마 안 되는 가진 돈 다 잃고 쓸쓸하게 한국으로 돌아온다. 당연 자식들의 냉대가 따른다.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다 쓰고 죽겠다고 자랑스러운 듯 그리 말하고 다니는 나이 든 부모들을 본다. 글쎄, 뭐 그렇게까지 떠들며 다닐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다른 자기중심주의다, 끝까지.


여섯, 자기의 일시적인 체면 혹은 유치한 과시를 위해 가족들의 중요한 이익을 쉽게, 자주 습관적으로 포기하는 아버지. 밖에서 남에게는 아주 잘 한다. 타인을 위해 그처럼 너그럽고 그처럼 자신의 돈과 이익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당연 칭송이 자자하다, 가정 밖에서는.


그런데 집에만 들어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사소한 것,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벌벌 떤다. 아내를 닦달하고 자식들의 모든 것을 옥죈다. 단돈 만 원을 타내려고 해도 영 쉽지가 않다. 밖에서는 그토록 너그럽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쉽게, 가족들의 중요한 일정과 그들의 이익, 그들에게는 중요한 기본적 자존심의 영역까지 내어주던 사람이. 사실 그것들은 자기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것도 아닌데?


특히 옛날 아버지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많이 관찰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나의 아내 내 새끼를, 내가 챙기고 내가 아끼고 내가 치켜세워주지 않으면 누가 그리 하겠나? 내가 나의 가족을 우습게 여기면, 특히 남 앞에서, 그 타인들은 정말 나의 그 귀한 가족들을 우습게 본다, 늘상!


일곱, 어리석은 아버지. 배움의 길고 짧고는 이미 논외로 했다. 사실 지혜와 어리석음이 꼭 학문적 배움의 길이와 직결된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어리석음에 더해서 편협하고 고집이 세고, 그러니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늘 그저 자기 생각대로다.


나의 지금 이런 판단과 결정, 이런 행동이 내 자식과 가족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까를 언제나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나와 이미 공동의 운명체니까.


성경 속에서 몇 명 정말 어리석은 자들을 나는 본다. 그중 하나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 된 사람 시드키야 (Zedekiah)라는 인물이다. 그때는 이미 신흥 강국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리석고 그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친구들의 말만 듣고는, 다른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강대국 신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든다. 그야말로 대책없고 뜬금없는 돌출 행동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Nebukadnessar)은 즉각 그를 응징한다. 비겁하게 신하도 백성도 버리고 도망치다가 결국은 잡힌다. 아들들은 모두 그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도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다 죽는다. 어리석음이 가져온 가족 모두의 불행이다. 다음 왕이 되었을 아들들, 그들은 후일 다른 세상에서 만난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만나고 싶어하기는 할까?


중학교 때 음악과 관련된 지식에 무지했던 나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Nabucco)'가 일본을 소재로 한 것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여기의 이 나부코가 바로 느부갓네살 2세였다. 이탈리아어로 '나부코도노소르'. 여기에 나오는 유명한 노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금빛 날개를 타고 날아가라, 내 상념이여')을 우리는 기억한다.


여덟, 위의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결국 기본적으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사랑'의 개념을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저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가, 그것만 보면 된다.


나의 이익보다 자식의 이익이 앞서는가?/자식은 언제 보아도 늘 마음 짠 하고 가여운가, 내 마음 속에?/정말 그가 먹는 것이, 그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내가 먹는 것보다 흐뭇하고 기분 좋은가?/집집마다, 가족마다 한 집에서 한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야만 한다면 (나이나 성별의 제한은 없다), 선뜻 내가 손들고 내가 그 위험한 싸움터에 나갈 준비와 각오가 되어있는가? (물론 자식들도 모르게 하면 더욱 좋고, 그야말로 진짜 프로다운 행동이고!)/좋은 아버지, 최선을 다한 가장이라는 개념이 늘 머릿속에 있는가? 그렇게 그 덕목을 위해 애쓰는가?


오늘의 시를 본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가슴 울리는 시다.


52세 정말 늦은 나이에 처음 결혼이라는 것을 한 예이츠. 이 시를 쓸 무렵 아들 마이클이 태어났다. 그때는 아일랜드에서 거의 2년 이상 계속된 피비린내 나는 내전 (개신교 성공회 중심의 북아일랜드와 카톨릭의 남쪽의 아일랜드, 당연 북아일랜드에 가세한 영국군)이 계속될 때였다. 그 기간 참으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이 시에서 예이츠는 신을 찾는 대신 유령을 찾는다. 신이 아니라 강력한 유령의 존재가 아들 침대 머리맡에 서서 밤이고 낮이고 그를 지켜주기를 기도한다. 아이러니다. 신을 조롱하는 듯한 구절도 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존재라면서 왜 이런 참상은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냐고. 도대체 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알기는 하는 것이냐고. 그렇다면 왜 그리 뻔히 다 보면서 방관자의 자세로 있는 것이냐고!


그러면서 그는 이번에는 인간의 사랑의 힘에 의지한다. 성경 속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마리아와 요셉이 그랬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 인간의 사랑의 힘으로 이 모든 고통과 참상을 이겨낼 것이라고. 그렇게 나와 내 아내도 사랑하는 나의 아들 마이클을 지켜낼 것이라고.


이로부터 2년쯤 지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의 수많은 젊은 시절의 시들과는 또 그 결을 달리한다. 많은 묵상과 사유를 요구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다. 내가 예이츠를,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이유다. 번역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조심스러운 자세로. 그만큼 귀한 시다. 상미하시기를! 이 번역본은 오직 이 글에서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니!


내 아들을 위한 기도 (A Prayer for My Son)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힘센 유령이 침대 머리맡에 서 있기를 기도한다

내 아들 마이클이 편안히 잘 수 있게, 울지 않고, 침대에서 뒤척이지도 않고

그의 아침 식사가 나올 그때까지 ;

물러가는 새벽의 어스름이 곧 오게 될 아침까지 모든 공포를 그에게서 멀리 하기를.

그래서 그 아이의 엄마 또한 잠을 푹 잘 수 있게 되기를.


그 강력한 유령이 손에 칼을 쥐고 있기를 기도한다 :

내 단언하건대 나의 아들을 살해할 계획을 가진 그런 악의 세력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으니, 저 어딘가에 있으니

또한 그 악마같은 존재들은, 곧 다가올 언젠가의, 자신을 위한 날들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그 극도로 오만한 행위 혹은 의도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니까,

또한 타인의 명망이나 성취에 대한 그들의 증오는 결국에는 그 악마적인 모든 것들을

실패로 끝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니


신, 당신은 매일 그 언제라도 무에서 그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리고 새벽 별들에게 노래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가장 단순한 것조차 제대로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저기 불쌍한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골육상쟁의 그 최악의 부끄러운 일들에 대해

슬피 울며 크게 탄식하는 것도 뻔히 보아 다 안다,

하지만 그저 그것뿐이다 ;


그런데 당신의 적의 부하들이 그때 그곳의 모든 마을을 뒤지며 뒤쫓아올 때,

한 여인과 한 남자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일 터,

결국에는 평탄한 길과 험한 길, 그리고 기름진 땅과 황폐한 땅을

서둘러 지나갔다,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인간의 사랑의 힘으로 서로를 보호하며 그렇게.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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