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것

- 소망, 용감한 고백, 그 아름다움의 세계. 정연복 '소원'

by 가을에 내리는 눈

아들 녀석이 대여섯 살 때쯤 제 엄마와 둘이서 부산에 갈 일이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전벨트 등이 꺼지자 아들 놈이 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엄마, 우리 오늘은 왜 비즈니스 안 타?"


나는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시던 어머니의 말씀/'알아야 면장을 한다'던 (답답한 벽을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그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아버지의 말/아는 것이 힘이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경구를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들이 어릴 때는 가끔, 아주 가끔 장거리 해외여행 때 비지니스 클래스를 탔다. 아들 대학 시절 방학 때 서울 집에 올 때도 아주 가끔은 비지니스 좌석을 끊어주었다. 오해 마시기를, 저는 결코 부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개자랑은 더욱 아닙니다. 그저 오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뿐입니다.


돈의 힘, 자본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비행기 타는 경험이다. 공항까지 가는 과정 (일부 국가, 일부 항공사의 경우)/체크인 과정/출국심사 통과 후 기다리는 공간/탑승의 시작, 서로 다른 통로/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되는 서비스/다른 스튜어디스들에 의한 전혀 다른 질의 서비스/제공되는 음식과 음료의 수준, 모든 것이 천양지차 다르다.


돈의 의미와 무서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주관적 판단, 부모가 지금 자신에게 해주고 있는 것들에 대한 고마움의 인식, 이런 것들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기를 바랐다. 지난 학기 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큰 가치와 체감으로 다가왔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나는 내가 치른 금전적 비용이 충분히 그 몫을 했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것을 실감한다. 아들이 어릴 때 KLM (네덜란드 항공)을 타고 런던까지 갈 일이 있었다. 비행 몇 시간 지났을 무렵, 나이 든 거구의 금발 스튜어디스가 내게 말한다. 조종실 한번 보시겠냐고? 와이 낫?


한 명의 메인 조종사와 두 명의 부조종사, 복잡한 계기판, 그들의 따뜻한 인사. 그곳에서 바라본 하늘의 세계는 또 많이 달랐다. 나의 가족 모두 평생 처음 해보는 좋은 경험이었다. 결국은 이 또한 돈의 힘이었다. 물론 어린 나이의 아들이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어쨌거나!


을지로 3가 우래옥 본점 내가 늘 앉던 이층의 그 자리, 이틀 전 예약 때 미리 주문한 생갈비 1인분과 물냉면 한 그릇. 갓 버무려낸 숨이 살아있는 배추 겉절이.


오랜 비행 끝에 현지에 도착, 5분의 정말 신나게 짧은 무인 입국절차를 마친다. 무사히 수하물을 찾고 세관을 잘 통과한 후 자유 공간에 다다른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들과의 격하게 반가운 재회의 포옹.


누군가가 나를 그저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면 좋겠다. 조 말론 (JO MALONE) 시트러스 계통의 은은한 향기가 나는 여인이면 더욱 좋겠다.


이루어질 것들도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이리 바라고 기대하고, 마음 속으로 꿈을 꾼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얻은 것이 많다. 그것이면 되었다!


이제는 조금 시들해진 것 같은데, 예전에는 유행처럼 '버킷 리스트' (Bucket List)라는 말이 우리나라 전역을 날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하긴 힐링이라는 단어도 그랬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많이 슬프고 그래서 조금은 무서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사형수들의 집행 바로 전날 그들은 간수에게 마지막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것 혹은 꼭 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교도소측은 가급적 그들의 현세에서의 마지막 그 바람을 들어주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그들이 죽기 직전 밟고 올라서 있는 그 양동이 (bucket), 어제 저녁 먹은 그 맛 있었던 햄버거 (혹시 런던의 '파이브 가이즈'의 것이었을까?)가 그것과 맞바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사실은 그 소원 아예 하고 싶지조차 않을 것이다.


다섯 가지 혹은 많아야 열 가지면 모를까, 스무 개 서른 개가 넘는 그 많은 버킷 리스트상의 바람은 어쩌면 이미 버킷 리스트는 아닐지 모르겠다. 우선 그 절실함이나 희소성의 의미가 많이 떨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간까지 살아있는, 살아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욕심이 거슬린다. 그래도 '나 죽기 전에', 그런 슬프고 그만큼 간절한 소망 아닌가? 늘 그놈의 과욕이 문제다.


곧 천조 원 (미화 1조 달러, one trillion US dollars)의 보너스를 테슬라로부터 받게 될 것이라는 일론 머스크에게도 죽기 전 여전히 남은 바람이나 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까? 이미 다 하지 않았을까? 글쎄, 다른 세상에 가서도 쓸 수 있는 화폐로 자기 재산을 바꾸어 가지고 갈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은 또 모르겠다. 그는 그 많은 돈을 송금을 할까 아니면 직접 몸에 지니고 갈까?


내 선한 마음을 알아주고 나의 이 그리움을 꼭 안아주는 존재가, 우연의 모습을 하고 필연처럼 가까이 오는 그런 날이 있으면 좋겠다. 이리 말하면서도 조금은 겸연쩍어 나는 서둘러 분위를 확 바꾼다 - 조금 전 내가 있는 숙소의 내 방과 거의 눈앞으로 마주한 집에서 한참이나 요란한 다툼의 소리가 났다. 저리 죽을 듯이,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것은 필시 부부밖에는 없다. 어린 자식 한 둘의 외마디 비명 소리도 들린다. 왜 저리 서로 죽일 듯이 싸울까? 문득 서양인들도 저리 싸울까 궁금해졌다. 다음번 아들 녀석과의 팀즈 영상통화 때는 조심스럽게 물어볼 생각이다. '너는 혹시 본 적 있니? 그들도 이렇게 싸우냐?'


거의 9년 10년 만에 들어보는 공포스러운 소리다. 신이, 섭리가, 스피노자의 대자연이, 그리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가 내게 물으시는 듯하다 - "그래 이래도 외롭다고 징징댈 것이냐? 그럼 옛날의 그 상황으로 돌아가게 해 줄까? 그럴 수는 있는데? 저런 공포와 두려움의 장면이 여전히 그리워?"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바로 납작 엎드려 대답했다 - "아니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저 잘못했습니다!" 마치 성경 속 욥기의 욥이 구름 사이로 나타난 하느님에게 무조건 잘못했다고 쿨하게 인정했듯이.


오늘의 시를 본다. 이 얼마나 예쁘고 고운 시인가? 이 시인의 마음은 어찌 이리도 선할까? 브런치 내 다른 글에서 소개하는 독일의 위대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아름다운 달 오월에' 그 바로 다음에 이어지게 놓고 읽으면, 생갈비 다음에 먹는 우래옥 물냉면처럼 완전 최고의 결합일 것 같다.


물론 절대 도둑놈 혹은 범죄자로 몰리는 그런 말 안 되는 불행의 사태는 없는 상황이기를. 이미 오랜 시간 충분히 공들이고 충분히 가까워진 그런 사이이기를. 그녀도 내심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기를!

소원

- 정연복

잠깐만

아주 잠깐만


별빛 담은 너의 두 눈

감고 있으렴.


앵두 같고 또 돌돌 말린

장미나 동백꽃 같기도 한


너의 입술

황홀히 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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