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의 힘, 그 무한성.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저녁 노을을 보며'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 이 도시에 온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나는 물리학 지식이 거의 없다. 문과라 학교 다닐 때 물리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사회에서도 물리학은 나의 세계가 아닌 듯 그리 살았다.
이곳에서는 노을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보름달 아니 밤하늘의 달을 본 적도 거의 없다. 왜일까? 고도 때문일까 아니면 위도의 영향이 있는 것일까? 위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우선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것이다. 이곳은 지금 우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짧게 비가 내린다. 흐린 하늘이 많다. 그러니 아침 저녁의 노을이든 밤하늘의 달이든 보기가 힘든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한다. 밤하늘의 별들도 거의 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나의 이런 짐작이 맞을 것 같기는 하다.
나이 들면서 물리학의 세계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당연 어렵고도 어려운 분야였다. 그래도 두 달 정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나니까 핵심 큰 줄기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특수 상대론 중 특히 '동시성의 상대성', 그리고 '질량 에너지 등가의 원리'가 기억에 남는다. 특수 상대론과 일반 상대론의 개괄적 차이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쓴 글이 '불필요한 무게를 줄이면 당신에게 엄청난 에너지가 생긴다'였다. 아직 발행은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양자역학을 공부했다. '양자 도약 (quantum leap)'의 어원을 알게 되었다. '양자 얽힘 (quantum entanglement)'도 살짝 이해가 되었다. 내 아들 녀석과의 그 긴밀한 그리움의 관계를 이 양자 얽힘이라는 용어를 이용해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재미있는 실험과 주장도 접하게 되었다. '웜 홀' (wormhole)의 개념, 그러니까 '아인슈타인-로젠 브리지' (ER Bridge)도 알게 되었다.
노을이 붉은 이유를 알게 되었고, 아침 노을과 저녁 노을을 비교하는 즐거움도 누렸다. 비구름이 검은 이유, 맑은 하늘이 파란 이유도 이미 오래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문득 저녁 노을과 황혼의 차이가 궁금해졌다. 바로 공부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답을 얻었다. 오늘의 이 글은 그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의 흥미를 끌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못한다. 봉주르, 메르시, 실 부 플레 혹은 실 트 플레 (부탁합니다) 정도가 다다. 그래서 불어를 잘하는 분들이 늘 많이 부럽다. 역시 궁금한 것이 있다. '왜 불어로 쓰여진 책은 하나같이 그리 길고 만연체 (많은 말을 사용하여 수식, 반복, 부연 설명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문장이 크게 길어진 문체)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모두 일곱 권으로 된 대작 (무려 4천쪽이 넘는다)이다. 14년이나 걸려서 쓴 책이라니 그럴 만하다. 그런데 그 문장의 길이가 정말 미친듯이 길다. 긴 문장이 전체 텍스트의 1/3 정도라니 말 다했다. 이를테면 '노을이 진다' 이 문장을 그의 글에서는 '지금 이토록 슬픈 빛으로 빛나는, 마치 보닝턴이 그린 아드리아해처럼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차차 어둠이 태양을 쫓아가는 형국의 하늘은 그 그윽한 풍광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나무위키에서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힌다>, 이런 식이다.
하긴 내가 요즘 푹 빠져있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도 그렇다. '레 미제라블'이 그렇고 '노트르담 드 파리'가 그렇다.
언어가 가지는 표현력, 그 언어가 그려내는 한 나라의 문화, 그리고 그 속에서의 그 나라 사람들. 나는 늘 이것이 궁금했다. 관심이 많았다. 내가 불어를 모르니 불어라는 언어가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 문학작품에 미친 결정적 영향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뭔가가 있다. 그들은 그저 '노을이 진다' 이렇게 표현하고 끝내는 법이 없다. 언제나 그렇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의 제목이 탄생했다.
그들은 저녁 노을이 지는 그 시간대를 '개와 늑대의 시간' 이렇게 표현한다. 실제로 일상 속에서 이렇게 쓴다. 그냥 들어도 멋지고 시적이고, 괜히 지금 파리 중심가 어느 노천 카페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저기 언덕 너머에서 지금 내게로 다가오는 저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을 이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 하나가 내게 발견되었다. 밤의 어둡고 짙은 푸른색과 낮의 황금빛 혹은 붉은색이 만나는 이 시각을, 그들은 붉은색보다는 밤이 다가오는 푸르스름한 색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드뷔시의 아름다운 피아노곡 '달빛 (Clair de Lune)'에서 clair는 밝은, 맑은 뭐 이런 뜻이다. 그런데 그 빛은 정작 흰색에 가깝다기 보다는, 어느 보름달이 뜨는 밤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스러움 가득한 옅은 푸르름의 색, 그 오묘한 청자의 색깔 그런 것으로 그들은 본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중에 권옥연이라는 분이 있다. 함흥의 최고가는 부잣집 귀한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독자였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나? 추사 김정희가 귀양 갈 때 그 집에 잠시 머물러 신세를 졌다는 그 집이다. 할아버지가 귀하고 귀한 손자를 위해 호랑이 육포를 구해다가 먹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 시절 그 지역이라면, 그리고 그 부와 권세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수도 있는 에피소드. 그 덕인가, 이분은 88세까지 사셨다. 1923년생 옛날 분임에도.
아무튼 이분 작품 중에 바로 이런 옥색 옅은 신비의 푸르스름과 역시 옅은 보랏빛이 은은하게 어우러진 저녁 무렵 달빛 속 정물을 그린 그림이 몇 개 있다. 몽환적이고 뭔가 꿈 속에 있는 듯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국 화단에서 '앙 포르멜' (비정형적 추상주의) 운동을 시작한 분이다. 그의 여러 그림들에서 그의 그런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어에서는 이 시간대를 '타소가레'라고 부른다. '거기, 그대는 누구입니까?'라는 뜻이다. 8세기말부터 12세기말까지의 헤이안 시대에 황혼이 깔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이 시간대가 되면, 저기 앞에 누군가가 희미하게 보일 때 그 존재가 사람인지, 사람이라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레타소' (거기 누구시오)라고 묻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옛부터 황혼이 사람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의 시간인 낮, 즉 '황'과 귀신과 죽음의 시간인 밤, 즉 '혼',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간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때에는 여러 신이나 요사스러운 것들이 사방에 돌아다닌다고 믿었단다.
그들은 신들이 사는 세계이자 시간의 흐름이 없는 밤의 세계로 이어지는 시간이 황혼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돌아다니면 화를 입는다든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든가 요괴를 만난다고 믿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냥 황혼이라고 부른다.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아쉽다. 간결함이 주는 명료함과 산뜻한 단순함이 아니다. 우선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고, 애매하고 그래서 왕왕 생활 속 오해가 많이 생긴다. 공자님이 그러셨다, 우리가 우리네 일상 속에서 '용어만 정확하게 사용해도' (말과 글에서 가급적 명확하고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면) 이 사회의 분쟁의 많은 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그 옛날을 살다가신 공자님 아닌 것 같은 현대적 경구다.
완전히 어둡지도, 그렇다고 그리 밝지도 않으면서, 붉은 듯하지만 또 동시에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간. 이 신비 가득한 상황을 그저 황혼 이 단어 딸랑 하나로 짐작하라고 하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중국의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뜻이 명확하다. 우선 '누를 황' - 누렇다/누래지다, 여전히 한낮의 그 화려했던 태양의 빛이 조금은 남아있다는 의미다. 이 누를 황 자는 방위로는 중앙을 뜻하고 오행상으로는 흙에 해당하며, 계절로는 여름이다. 중국에서는 가장 고귀한 색으로 여긴다. 황금이 그렇고 황옥이 그렇고 황하가 그렇다.
다음은 '어두울 혼' 자다. 어둡다/저녁때/밤/어지럽히다/현혹하다 이런 뜻이 있다.
어찌 보면 내가 황혼과 저녁 노을의 차이가 궁금했던 것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오는 것이리라. 황혼은 저녁 노을이 지는 그 무렵의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고, 저녁 노을은 황혼의 그 시각에 우리가 보는 하늘의 붉은색 빛의 모습 그것이다. 하나는 시간대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중국 한자의 영향이 크다. 그냥 그들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따오는 경우가 많다. '박명'도 그렇다. 한자는 그 자체 글자 한 자가 품고 있는 뜻과 숨겨진 의미가 많고도 많다. 중의, 다의의 문자다. 영어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 한글은 그렇지 않다. 빨갛다는 그저 빨간 것이고 달리 표현하려면 불그스름하다, 이리 다른 표현을 써야한다. 한 단어가, 한 표현이 세 개 다섯 개, 아니 열 가지가 넘는 뜻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어 원서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으면, 그 분량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많이 아쉽다!
오늘의 시를 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기 위해 오늘 이리 멀고 먼 길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좋은 영어 번역본을 찾아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이미 오래 전에 끝냈다. 그런데 정작 마땅한 등장의 무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야 이 시를 선보인다.
깊고 그윽한 시를 쓰기로 유명한 독일의 시인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이 시를 처음 읽고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의 말년 (죽기 1년 전 84세 때) 그 유명한 그의 마지막 작품 성악곡 '네 개의 마지막 노래' (Four Last Songs)를 작곡한다. 이 시와 함께 헤르만 헤세의 시 세 개를 사용해서 그렇게 네 개의 곡을. 웅장하고 아름답고 심오하고, 음악과 시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25분 가량의 그리 길지 않은 '대작'이다. 꼭 한번 들어보시기를.
체코 출신의 소프라노 루치아 포프 (Lucia Popp)가 부른 버전을 나는 즐겨 듣는다. 시퍼런 파도, 그 칼날 같은 물살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내리는 윈드 서핑을 눈 앞에서 보고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 여성의 목소리가 그 웅장하고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결코 단 한순간도 밀리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들 간의 아름다운 '콘체르타타' (두 개 이상의 악기가 서로 독립적, 대립적으로 연주하는 형식)다.
저녁 노을을 보며 (At Sunset/Im Abendrot)
-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부족할 때에도 그리고 큰 기쁨 속에서도
우리는 그동안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이제 우리 둘 다 우리의 긴 여행을 그만두고 마음 편히 쉬고 있다,
조용하고 편안한 시골에서.
우리 주위로 골짜기들이 비스듬히 몸을 내밀고 있다.
이미 공기는 슬픈 듯 음울하게 변해간다.
반쯤은 꿈을 꾸듯,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두 마리의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이리로 오라,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날아가게 두어라.
곧 잠을 잘 시간이다. 우리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쓸쓸한 곳에서.
오 웅대하고 차분한 평화, 땅거미 질 무렵의 그 심원함.
그동안의 여행에서 우리는 얼마나 피곤하고 지쳤던가 -
이것이 아마도 죽음일까?*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 Ist dies etwa der Tod? (Is this perhaps de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