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절대 행복하지 않다', 그 이유 셋만 제게

- 마음먹기, 나의 인식, 반겨주기, 작은 것은 없다. 나태주 '행복'

by 가을에 내리는 눈

오늘은 큰 마트에 가는 날이라 아침을 먹고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저 앞에 맹인 부부가 아주 느린 걸음으로 가고 있다.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평소 남자 한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여성까지 있다. 그냥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복권을 판다. 그래서 계속 움직인다. 생각 없이 한참을 지나쳐오다가 나는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적은 금액의 지폐를 한 장 여성의 손에 쥐어준다. 역시 앞을 보지 못한다. 이들은 그것이 돈인 것을, 얼마 짜리 지폐인 줄은 어찌 알 수 있을까? 분명 그들은 알 것이다, 그것 또한 그들 생존의 필수 사항이니까.


몇 년 전 어느 목사 한 분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악'의 얘기를 했다. 그 무렵 내게 일어난 고마운 일에 대해 나 자신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던 중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늘 내게 하시던 말씀이다. 꾸준히 선한 일을 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고 선하지 못한 일을 쌓아가는 집안에는 필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이런 뜻이었다.


그분이 대뜸 그런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선은 쌓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요. 그건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랍니다. 내가 받은 은혜,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것이지요. 뭐 쌓아서 나중에 따로 보상 받아야지 그런 개념은 애초에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급 썰렁해진 내가 그리 마무리했다.


유교에서도 굳이 빈 병 모았다가 나중에 돈으로 환불받으려고, 엿 바꾸어 먹으려고 차곡차곡 광에 쌓아두는 것은 아니리라. 그저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한다, 뭐 그냥 그런 뜻이다. 자신의 선한 마음이 그리 시키는 것이고 측은지심의 발로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세상에 해야 한다고 판단한 아주 작은 일들을 그냥 그렇게 하는 것뿐이다. 나중에 엿 바꾸어 먹을 생각은 아마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나의 행동도 정확히 그렇다. 물론 여전히 이기적인 동기가 강하다. '제가 이런 일을 합니다. 봐 주시고 살짝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 일어나는 아주 작은 즐거움들이 그렇게 제게도 일어나게 해 주세요. 그들에게도 또 제게도 그런 달콤함은 좋은 일이잖아요?' 이런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 또한 구월 새로운 달의 첫날이라 그 시작을 좋게 하고 싶은 감성적 동인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써놓고 창고에 묵힌 지가 벌써 여러 날 되었네요).


사실은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것들이 나의 기분을 좌우한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그래서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 삶에서 사실은 이처럼 아주 작은 것들이 최종적인 평결에 큰 영향을 준다. 권투 마지막 라운드 마지막 30초의 인상이 저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듯이!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논리학자, 역사가,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사회 개혁 운동가인 버트런드 러셀 백작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은 워낙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학교 다닐 때 그분의 글을 보며 영어 구문 독해 해석을 공부하느라, 그런 계기로 그분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워낙 그의 문장은 명문이고 논리적이라 (그도 그럴 것이 수학자에 논리학자, 철학자였으니까!) 모두들 그의 글을 마치 수학의 정석 혹은 해법수학만큼이나 금과옥조로 여기던 때였다.


아무튼 그분의 글 중에 내가 평생, 아주 어려서부터 마음에 담고 있는 문구가 하나 있다 - '행복은 만족에 있다 (Happiness lies in contentment)'. 'lies in' = consists in, 이것 때문에 시작된 그와의 만남이었다. 그의 명저 '행복의 정복 (The Conquest of Happiness)'를 그래서 읽게 되었다, 그때는 오직 영어 독해 실력을 위해서. 1930년 그의 나이 28세 때 쓴 책,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고 겨우 영어 문법과 구문 독해 공부를 하고 있다니! 사람의 두뇌와 그 역량은 이렇게 크게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때이기도 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오유지족 (나는 만족의 개념을 안다, 아니 만족을 안다)', '지족불욕 (만족을 알면 후일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삼계유심 만법유식 (과거 현재 미래는 결국 우리네 마음 속에 있고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의 인식 속에 있다)', 이 모든 것 또한 그 궤를 같이 하는 말들이다.


'당신은 행복한가요?'는 제대로 한 질문이 아니다. 이렇게 물어야 맞다 - "당신은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시나요?" 행복의 여부는 그저 내가 내 마음대로 느끼는 것이다. 국가기관 공인 점수 관리제도 없고 어떤 형태의 감독관도 없다. 누가 판정해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직 나, 내가 그 판정관이고 나의 결정과 평결이 최종적인 것이다.


코비드 테스트 결과 네, 음성입니다 이런 식으로 '네, 검사 결과 당신은 지금 행복하군요!' 이런 결과를 통보받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내가 행복한 상태에 있다고 내가 느끼는가 느끼지 못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고 있는가 그것이 답이다. 오직 나만이 그 평결 (버딕트, verdict)을 내릴 수 있다. 다른 그 누구도 못 한다.


몇 년 전 대학 때 가장 친했던 귀한 친구를, 20년 만에 다시 카톡으로 만나게 되었다.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참으로 기뻤다. 몇 달 동안 그 친구와의 톡으로 나는 밤낮을 즐겁게 보냈다. 젊은 시절 그리고 결혼 초기 매주 두 집을 번갈아 오고 가며 그리 함께 음식을 즐기고 비디오를 즐기고,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본 그런 사이다. 같은 또래의 아들 하나씩을 두고 있다.


대학 시절 그때 이미 오래된 '냉담자' (카톨릭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세례를 받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종교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였던 나, 그리고 논리로 무장된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 그런데 지금은 믿음의 구력 20년의 권사란다. 나는 그것까지도 그저 기쁘고 좋았다.


그 나라 그 도시에서 제일 큰 교회에 나간단다. 교회 얘기를 길게 한다. 자기 교회 담임목사 (그 교회에는 담임목사 외에 부목사라는 사람들이 무려 다섯 명이나 있는 정말 대형 교회였다. 시설은 물론 운영 시스템, 교회 재정이 거의 한국에서 여전히 잘 나가는 중소기업 수준이었다)의 주일 메인 설교를 들어보라고 해서 (온라인) 그 친구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그리고 그와의 보다 나은 대화를 위해 서너 번 들은 적도 있다.


사실 내가 얻은 것도 있다. 어느 날 그 목사가 하는 설교 (사사 '입다'와 그의 딸에 관한 것이었다 -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라는 존재가 없었던 그때의 얘기다. 하지만 주로 잦은 전쟁에서의 리더로서의 책무와 권한을 갖는 사사 혹은 판관 <Judge>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삼손과 델릴라의 삼손도 사사였다. 기드온 그리고 샤뮤엘도 사사였다.)를 일부러 들었다.


그런데 성경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이지만 영 이상했다, 그 목사의 논지도 해석도 강변도. 그래서 바로 영문 성경본을 찾아 그 부분을 열심히 읽었다.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읽은 그 성경본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크게 실망했다, 그 도시 제일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하는 주일 메인 설교에서 그가 한 얘기 모두에. 사실 관계도, 사람과 그 당시의 상황을 보는 눈도, 무엇보다 성경에 관한 그의 편협한 해석도.


물론 이어서 외국의 많은 성경 학자들의 이 부분 글도 여러 편 읽었다. 그것들에 따르더라도 나의 이해는 크게 틀린 것이 없었다.


그후 내가 그 친구에게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한 줄 보낸 톡이 있다 - "설교 잘 들었다. 그런데 '입다 (제프서, Jephthah)의 딸은 그때 그렇게 죽지 않았다'. 끝." 그 친구는 그날 그 자리 현장에서 그 목사의 그 설교를 들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이 친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단 한 번도 '아, 이 친구가 내게 지금 자기 개자랑을 하고 있구나, 오직 자기 과시를 위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친구가 힘들고 외로운 나를 그것으로라도 위안하려고 그리 하고 있구나. 고마운 친구,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나의 오랜 친구니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그 친구의 그런 자기자랑이 끝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이제 톡을 그만했으면 하는' 명시적 의사를 문자로 받았다. "우리 이제 서로 편할 때 연락하자"


나는 당장 그렇게 했다. 나는 평생 그 잘난 자존심 하나로, 나 자신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그게 뭐 어렵나!


조금 더 나아가 그가 쉽게 알 수 있게, 아예 톡에서 친구하기를 끊어버렸다. 내가 잃은 것은 없다.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 나는 그리 본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욥 (Job)이라는 사람을 나는 대단하게 본다. 욥기 성경 영문본과 한글본도 여러 번 읽었다. 그가 이런 말을 한다, 그를 찾아온 소위 친구라는 세 사람에게 (나는 그들을 결코 친구로 보지 않는다) - '끔찍한 위로자들 (miserable consolers)'.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들 녀석이 어느 날 내게 이리 말한다.


"아버지, 아주 잘 하셨어요. 사실 그분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거예요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는 굳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저는 아버지와 그분의 그 오랜 세월을 알고 있잖아요? 그분은 어쩌면 오랜 시간 언젠가 그런 기회가 혹시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마침내 온 것이지요, 어리석은 그분이 보기에는? 자랑의 기회가 온 것이 아니라 이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줄 그런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었는데? 그분은 결과적으로 그 기회를 놓친 것이지요. 오직 자기 탓으로!


그분이 부러우세요? 아니지요? 지금은 그분의 삶이 살짝 아버지의 그것보다 풍요롭게 보일지는 몰라요. 그런데 저는 그것도 아니라고 봐요.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인생은 결국 총량이라고. 순간순간의 합이라고. 지난 세월의 총량을 보세요. 누구의 것이 더 커요? 무엇보디 2세를 보세요. 굳이 이런 얘기는 드리고 싶지 않지만, 그 아이와 저, 어떤 모습의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아버지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의 단면을 보더라도 승자에요. 부러울 것 하나 없어요 아버지!"


어떤 글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 그가 행복하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그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좋고, 당연 그에게는 특히. 나 또한 행복하면 그것도 좋은 일이고, 특히 내게는. 그가 얼핏 나보다 행복한 듯 보여도 그 속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그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행복은 오직 한 사람의 승자만 허용하는 그런 상대적 개념의 겨루기의 세계가 아니다. 그도 나도, 아니 우리 모두도 승자가 가능한 그런 개념이다. 골프 마스터즈의 초기 컷오프도 없다. 누군가 제 3자가 판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미리 정해진 판단의 항목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전적으로, 100% 나의 판단과 판정에 속하는 사항이다.


그러니 잘 뜯어보시라, 꼼꼼하게 냉정한 시각으로 살펴보시라. 의외로 곳곳에, 당신이 행복하지 않을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불행한 상태는 아님을 아시게 될 것이니. 행복하지 않은 것과 불행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존중하고 늘 아끼고 사랑하면, 그들은 정말 그런 존재가 됩니다. 제가 살아보니 그래요, 믿으셔도 좋습니다! 적어도 나는 나의 편이 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오늘의 시를 본다. 늘 쉬운 시어로 우리를 달래주는 이 시인의 오늘 시는, 더욱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 어떤 철학자나 사상가의 그 어떤 말보다, 나는 아래의 이 시를 읽으며 행복의 실체를 본다. 그 살아 있는 생생한 모습을 본다. 고마운 분이다!


궁핍과 결핍을 불만스럽게 입에 달고 살지만 아래 내게 없는 것이 뭐가 있나? 돌아가 머물 곳이 있고 늘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노래와 음악이 있고. 거기다가 좋아하는 그림들도 있고, 어느 해에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나 테이트 브리튼에 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지금 손에 쥔 것들을 누가 감히 작다고 할 것인가? 나 자신 또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내 두 손에, 마음에 영혼 속에 품고 있는 것은 충분히 크고도 크다. 마음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두 눈에도 보인다. 매일 보고 있다. 어제도 보았다, 아들 녀석과의 팀즈 영상 대화에서.


내게 오는 행복을, 그 고마운 존재가 어색함 속에 내 주변에서 그냥 어쩔 줄 모르고 서성거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늘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작은 달콤함도 나는 언제나 기뻐하고 크게 반긴다는 것을, 그러니 언제 내게로 와도 내가 두 손 크게 벌려 환영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존재들에게 알게 할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내가 마케팅 가이 아닌가? 왕년에 날렸던?

행복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행복은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가...


행복은 큰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것...


행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


오늘도 행복은

우리 곁에서 맴맴 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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