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순간에 슬픔이 찾아오는 건 최근의 일로,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했다. 지금 나는 기쁜 걸까 슬픈 걸까? 기쁘면서 슬픈 건 그냥 슬픈 것보다 나은 걸까? 나의 기쁨이 슬픔에 잠식당한 것은 아닐까? 나는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못마땅했다.
이건 노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나 책에서 보면 고생 끝에 기쁨이 찾아왔을 때, 나이 든 여인은 잠시 기뻐하다가 이내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거나 이미 여기 없는 사람들을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늙었고 분명 슬퍼 보였다. 기쁨 뒤에 슬픔이 찾아오고, 슬픔 뒤엔 기쁨이 찾아오는 삶의 이치를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기쁨이 찾아오면 저 멀리 슬픔의 기운을 느끼고, 슬픔이 찾아오면 저 멀리 기쁨의 기척을 느끼다 결국엔 그냥 동시에 느끼는 지경이 된 것일까.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일단 감정의 진폭이 줄어든다. 정반대의 감정이 동시에 찾아오니 서로를 중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감정) 에너지 절약, 나쁘게 말하면 세상만사에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노화(?) 현상을 선물로 여긴다면 분명히 선물이다. 그 어떤 슬픈 일이 닥쳐도 언젠가 닥쳐올 기쁨을 예감하며 견딜 수 있으며, 기쁜 중에는 다가올 슬픔을 생각하며 현재를 소중하고 감사히 여길 수 있다.
신체적인 노화와 정신적인 노화를 심심치 않게 겪고 있는 요즘에 새롭게 다가온 감정적인 노화는, 그나마 셋 중에 가장 나은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노화가 아니라 진화인가 싶기도 하다. 나는 인생을 다 살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나의 생도 기쁨과 슬픔이 두루 섞인 모양새일 것이라 확신한다. 그 둘을 따로 삼키는 것도 좋지만 동시에 씹어 삼킬 때 맛의 조화도 오묘하고 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은 각각 따로 맛보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둘을 함께 삼켜서 조화로운 맛을 볼 차례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기쁨과 슬픔 사이에 놓인 무수한 감정의 맛을 발견하고 놀라겠지. 역시 감정적 진화로 보는 게 맞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