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차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적어 보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트라우마라고 생각했던 경험을 쓰다 보니 참으로 별일이 아니었다. 이걸 트라우마라고 하기에는 스스로가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어린 나이에 종종 겪을 수 있는, 어른에게 받았던 미미한 상처들이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며 더 큰일을 많이 겪었는데 어릴 적 기억이 더 선명했을 뿐이었다.
< 내가 다루고 싶었던 트라우마들 >
1. 7살, 영어 연극에서 돼지 역할을 맡았는데 '꿀꿀'이 아닌 'Oink Oink'라고 해서 선생님께 된통 혼났던 일
2. 8살, 수업 시간에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만들어 봐도 좋을 거라던 선생님 말씀을 듣고 직접 소금을 만들어 갔더니 어이 없어하던 선생님의 표정
3. 11살, 자유 주제였던 여름방학 사회 숙제를 위해 방학 내내 아빠와 함께 집 앞 사거리에서 신호 위반 차량을 체크하고 통계까지 내서 제출했는데 본인이 직접 한 게 맞냐고 물어보셨던 선생님까지….
(누가 들으면 코웃음 칠 일들뿐이다.)
아무래도 꼬마였던 내가 자기주장을 조리 있게 말할 줄 몰라서 더 상처를 받은 것 같다. 그때는 전적으로 믿고 있던 어른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비췄을 때 대응하는 방법을 몰랐다. 혹은 알고 있었더라도 어른 앞이라서 꾹 참았을 수도 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내 의견 또는 생각을 선생님께 또박또박 말했다면 이 기억들이 이렇게까지 오래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생님, '꿀꿀'은 영어로 'Oink Oink'인데요."
"선생님, 그때 각자 한 번씩 소금을 만들어 봐도 좋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선생님, 제 노력을 왜 깎아내리세요?"
적고 보니 조금 많이 되바라진 어린이 같긴 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모님께 하소연하거나 일기에 푸념이라도 적을 걸 그랬다. 그땐 왜 혼자서 마음에 담아뒀던 걸까. 조금 나이가 찬 이후로는 혼자 끙끙 앓지는 않았던 거 같다. 그래서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11살까지의 경험만 떠오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상처받을 만한 일을 겪었을 때 마음에 꾹 눌러 담고 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짓궂은 기억이 더 오래갈 수 있다. 나처럼 말이다. 서른일곱이 되도록 기억나는 안 좋은 기억이라니, 그것도 별거 아닌 일인데!
당사자에게 직접 의견을 전달하고 원만하게 합의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만, 이게 어렵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신세타령이라도 해 보자. 요즘은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말이 생겨나면서 지인에게 슬픔을 토로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당한 선에서 상호 감정을 공유한다면 서로가 힘이 되는 순간이 있다. 도저히 상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전달하기가 꺼려진다면 일기를 쓰며 감정을 다독여 보자. 어떤 방법으로든, 응어리질 수 있는 감정을 잘 풀어내서 훌훌 날려버렸으면 한다.
물론 이는 일상에서 겪는 생채기에 관한 이야기다. 큰일을 겪은 사람들은 그 기억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에 맞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꼭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건강하게 어려움을 이겨냈으면 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절대 혼자서 끙끙 앓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조금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트라우마를 다 잘 극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일도 없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