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 있던 동생의 편지가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철없는 막냇동생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려 했다. 눈물이 나오기 5 초 전에 내가 막았다. 어머니 아버지, 이 자식은 끝까지 방심하면 안 되는 놈입니다. 아직 감동받지 마세요. 여태 당한 것이 많았던 아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나를 냉혈한으로 내몰며 나무랐다. ‘부모님께’라는 첫 줄만 보면 바로 눈물을 쏟아낼 기세였다.
회의적인 나와 중립적인 아버지를 제치고, 어머니가 달달 떠는 두 손으로 동생의 편지 봉투를 살살 뜯었다. 부모로서 처음 받은 막냇동생의 편지가 혹여나 뜯길까 조심스럽게 봉투를 대하는 모습에 나까지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드디어 편지를 펼쳤다. 방탄 헬멧을 쓴 호랑이가 프린트된 육군 전용 편지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황당함과 당황함의 경계 어디쯤에 서 있는 듯했다.
나는 그 표정이 익숙하다. 부모님은 안방 장롱에 한가운데 있는 대동은행 증권을 볼 때마다 그 표정을 지었다. 무려 12년이다. 표정의 시작은 대동은행이 망하기 한 달 전, 그러니까 1998년 5월 아버지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거액을 투자하면서부터였다. 한 달 뒤 금융감독위원회는 대동은행을 퇴출은행으로 지정했고, 증권은 종이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가세를 휘청이게 한 대가로 침묵을 요구받았고, 어머니는 가세를 일으킨 명분으로 의사 결정의 전권자가 되었다.
휴지 조각이 된 대동은행 증권과 동생의 빈 편지지 중 무엇이 더 쓸모없을까? 정답은 “모두 쓸모없다.”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편지가 매우 가치로운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의사 결정자인 어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싹 바꾸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것은 비밀 편지이다! 우리 막내아들이 훈련소에서 특수 군사 훈련을 받으며 배운 기술로 쓴 비밀 편지이다! 그러니 이 비밀 편지 내용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어머니는 자신의 입장을 글자 하나하나마다 모두 악센트를 넣는 방법으로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인 나와 아버지는 택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훈련소에서 비밀 군사 훈련을? 그것도 공익근무요원인 내 동생에게? 하지만 나와 아버지는 오랜 세월을 통해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이 무조건 옳다.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이자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평화주의자인 나와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는 동생의 편지에 글자가 떠오르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나이 지긋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당연히 군대에 있는 막내아들 이야기라는 것은 쏙 뺐다. 글자가 안 보이게 글자 쓰는 방법이 뭐가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봤다. 다들 “글자가 안 보이게 쓸 거면 뭐 하러 글을 쓰냐. 술을 먹을 거면 곱게 먹어라. 백주대낮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언제 술 한잔 하자"라고 말하며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힐끗 보면서, 대동은행 증권 볼 때의 그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아버지를 보며, 내 인생에 주식은 없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아버지는 몇 번의 전화 끝에, 초등학교 교감으로 퇴임한 친구에게 답을 얻었다. “슬기로운 생활에 나온 방법인데, 양초로 글씨를 쓰면 당장 안 보여” 아버지는 그 친구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하면서, 그럼 어떻게 하면 숨겨진 글씨를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다급한 질문에, 교감 선생님은 "촛불에 가져다 대면 글자가 잿빛으로 나와"라고 말하며 껄껄댔다.
우리는 당장 현명한 교감 선생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창고에서 양초를 꺼내온 아버지는 그 편지를 촛불 가까이, 하지만 타지는 않을 정도로 갔다 대었다. 양초로 쓴 글씨는 열기와 연기를 받으면 잿빛으로 나타난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아버지와 나는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바라고 또 바랐다. 글씨가 바로 나와서 제발 이 쓸 데 없는 짓이 금방 끝나기를 바랐다.
이미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 두 시였다. 어머니는 주방 입구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글씨를 볼 때까지는 밥도 없다고 우리에게 지엄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글씨가 나오든 안 나오든 이 자식을 케이블 타이로 묶어서 촛불로 불태워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편지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급한 마음에 아버지가 들고 있던 빈 편지를 가로챘다. 있지도 않은 글자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가 태워 먹을 뻔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등짝을 때리려고 다가왔다.
아. 어머니, 저는 막냇동생과 다르게 어머니 말씀에 한 번도 반항하지 않고 시키는 공부도 열심히 하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죠. 그 와중에도 부모님의 부름을 받고 주말에 집에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네네. 밥을 먹고는 곧잘 설거지도 잘하며 요리도 즐겨하는 큰 아들입니다. 어머님이 끓여주신 라면을 먹고도 설거지를 안 하며 공부도 게을리하여 집에서 게임만 하며 노는 막냇동생의 있지도 않은 편지 내용을 보기 위해서 저를 때리려 하시다니요.
어머니의 한껏 올려진 무서운 손을 보고 저 말을 최대한 황송하게 하려고 했지만, 후두를 통과해서 비강과 구강에 맴돌던 저 말은 결국 할 수 없었다. 내가 저런 말을 한다면, 어머니는 장황한 설교를 늘어뜨리다 결국 자리에 퍼질러 앉아 “그래 내 잘 못이다. 내가 잘 못 키웠어. 내가 죽어야지”라고 소리치며 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이 났다! 그거야 그거 그게 확실해” 어머니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야에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잠자코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왔다. 어머니는 "이 편지는 화학 처리된 것이기에 물에 담그면 시약 반응처럼 글자가 보라색으로 나올 게다"라고 말했다. 나와 아버지는 이미 눈치를 챘다.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 편지는 훈련소에서 교육 과정의 하나로 훈련병 모두가 부친 편지이며, 그 와중에도 철이 없어도 너무 없는 내 동생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어머니는 대야에 물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물에 적셔진 편지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글씨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내가 괜히 물에 적시라고 해서 막내가 쓴 편지를 못 봤다”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막냇동생이 너무도 괘씸했다. 어른이 되면 모두 효자가 된다. 이 자식은 언제 어른이 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의 슬픈 명령대로 나는 빈 편지를 물에 담갔다. 아버지는 고개를 내밀어 대야를 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편지 대신 어머니가 평생을 보관하겠다고 하는 대동은행 증권을 넣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생각으로 대야 속 편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편지에서 글씨 같은 잉크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 나할 것 없이 어어어어 하며 편지를 흔들어 댔다. 그럴수록 글씨는 나오지 않고 방탄모를 쓴 호국이 캐릭터가 물에 번지며 문어 대가리로 변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나는 큰 탄식을 질렀다. 내가 낸 탄식에 어머니는 큰 소리로 말했다. “텅 빈 문어 대가리 같은 이 새끼 언제 와! 물을 한 바가지 쏟아부어야겠어!”
나는 당장 가졌던 동생에 대한 복수의 방법들을 잊기로 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어머니의 화를 입은 사람은 누구도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