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많은 당시의 여자 친구와 달리, 나는 친구가 없었다. 청첩장을 돌리기 위한 식사 자리에서, 아내의 친구들은 "얘는 친구가 많아서 하객이 대박 많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복닥복닥한 결혼식장에서 나만 혼자인 장면을 상상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결혼식 즈음이 되면 계모임을 만들고 동호회를 하는구나. 지금이라도 계모임을 만들어야 하나?
결혼식 때, 하객 중 누군가가 "신랑 친구는 이렇게 없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불안은 자가 증식하는 법이다. 불어날 대로 커진 불안의 덩어리는 결국 내 자존감을 짓밟았다. 발로 밟아 쪼그라진 빈 깡통 같은 마음으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빠듯한 결혼 준비가 의욕 없는 나로 인해 더 촉박해가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자존감 수업' 책을 사서 자존감을 올리려 했다. 당연히 도움이 안 됐다. 자존감 수업비 14000원을 환불받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옛 친구들에게 연락해 봐. 이 기회에 끊어진 인연 다시 연결하는 거지."
당시의 여자 친구는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타당한 여자 친구의 말이었지만, 당시의 내 자존감의 무게는 흐리멍덩한 영혼의 무게와도 같았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을 할 용기가 없었다. 거절당했을 때의 무안함과 절망감이 정말로 두려웠다.
내 영혼마저도 나를 포기하고 도망치려 할 때였다. 그때 슈퍼히어로의 비밀 메시지처럼, K 선배의 카톡이 왔다.
- 너 결혼하냐?
와우. K 선배. 오랜만입니다. 8년 만인가요?
- 난 청첩장 모바일로 줘
알겠습니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 짝번 후배가 결혼하는데 내가 필요한 거 사줄게. 말해 봐
엥? 결혼식만 오셔도 감사할 뿐입니다.
- 신혼집에 가전 들어간 거 없지? 그럼 내가 아무거나 넣는다. 주소 불러줘
K에게 신혼집 주소를 알려줬다. 주소를 받은 그는 "그럼 잘 살아"라는 말 한마디를 남겼다. 여전히 쿨한 선배군. 며칠 뒤 엘지 물품 센터에서 스타일러 해피콜이 왔다. 해피콜을 받고 보이스피싱을 의심했다. 스타일러? 이거 백만 원 넘는 거 아냐? 구매자가 그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실제 상황임을 깨달았다. 고마움이 가장 먼저 든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지인으로 뒀다는 사실을 주변에 말할 수 있다는 얄팍한 기쁨의 감정이 들었다. 도망간 자존감이 나약한 육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정된 일자에 스타일러가 설치되었다. K가 백만 원짜리 스타일러를 결혼 선물로 사준 것이다. 이 날 이후, 당시의 여자 친구는 모임에만 가면, "우리 오빠 아는 사람은 백만 원짜리 결혼 선물도 해줬다"라고 나를 치켜세웠다. 그가 되찾아준 자존감을 당시의 여자 친구가 꼿꼿하게 세우고 지켜주었다. 당시 나에게는 좌우로 든든한 아군이 있는 것 같았다.
탄력 붙은 자신감으로 나는 당시의 여자 친구가 말한 대로 적극적으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한 친구 모두가 결혼식에서 왔다. 연락 안 했으면 진짜 서운했을 거라는 지인들의 축하를 받을 때는 눈물이 났다. 군대에서 악독하기로 악명 높은 선임이 나에게 휴가를 양보했을 때 흘렸던 눈물 이후로 처음이었다. 감동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자연 발생한다. 내적 성장도 마찬가지이다. "통과의례=결혼=성장, 외우기 쉽게 통결성!"라고 말하며, 암기를 강요하던 중학교 때의 가정 선생님이 떠올랐다.
결혼식 당일은 예상대로 수많은 아내의 하객이 복닥거렸다.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나의 하객들도 자리를 가득 채우는 예상외의 광경을 보였다. 또 눈물이 났다. 결혼식 전에 울먹이는 신랑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사회자가 놀려댔다. 겨우 눈물을 멈추고 결혼식을 마무리했다.
하객이 많은 결혼식도 뿌듯했지만, 더 뿌듯했던 것은 결혼식 이후로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도 주말이면 지인들의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고 있다. 결혼식에 갈 때마다 행복하고 뿌듯하다. 아내가 말했던 끊어진 인간관계가 다시 연결된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친구 없는 사람에서 친구 많은 사람으로 내가 바뀌게 된 계기는 K의 연락이었다. 그의 스타일러 때문이었다.
K 선배와 나는 K 대학교 동문이다. K 대학교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능 입학 성적을 자랑하는 A 학과를 다닌다는 자부심은 선후배 간의 연결고리를 더 강하게 했다. K 대학교 A 학과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묶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복수 전공생과 편입생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들을 했는지 알 수 있었을 만큼, 구성원들의 끈끈함이 만든 안과 밖의 경계는 공고했다.
짝번 제도가 대표적이었다. 대학교에서 일괄적으로 부여하는 학번의 순서가 같은 후배를 선배가 끝까지 챙겼다. 가령 학번이 K-A-2007-11인 선배가, 2008 학년 입학생 중 학번이 K-A-2008-11인 후배를 끝까지 기르는 것이다. 기른다. 당시에 선배들은 후배들을 기른다고 표현했다. 후배들은 선배들에 의해서 무럭무럭 길러졌다. 당시에 짝번 후배는 짝번 선배를 캥거루라고 불렀다. 선배들 모두가 헌신적이었고, 후배들 모두가 선배들을 따랐다.
K의 학번이 K-A-2007-11이었고, 내 학번이 K-A-2008-11이었다. 우리는 짝번이었다. 다른 짝번 선배들은 짝번 후배에게 아웃백에 가서 밥을 사줬다. 시험기간에는 족보를 넘겨주며 공부 방법을 조언했다. 짝번 선배로서 그는 나에게 술을 사줬다. 진짜 노는 애들은 시험기간에 논다며 유흥 거리에서 나에게 술을 잘 마시는 방법을 알려줬다. 금요일과 토요일 새벽 2시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를 조언했다.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이면, K는 캥거루처럼 자신의 흰 코란도 차량 옆자리에 나를 넣었다. 대학교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곳까지 운전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은 4개의 전문대학과 2개의 종합대학, 그리고 대형 공단이 모여 만든 지상 최고의 유흥가였다. 적어도 시골에서 자란 내 눈에는 그랬다. 주말이면, 수많은 대학생들과 더 많은 젊은 공장 직원들이 쏟아져 나와 젊음을 낭비했다. 그중에는 그와 나도 있었다.
처음 그 유흥가로 K가 나를 안내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주차하는 동안 차장 너머에는 남자와 여자들에 각자의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시 인기 아이돌인 2PM 멤버들처럼 가꾼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당시 여신으로 불리던 소녀시대 멤버들처럼 생긴 여자들이 삼삼오오 2PM 멤버들 사이를 누비며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주차를 다한 K가 나에게 “야 입 다물어”라고 했던 것이 확실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그는 내가 놀랄 때마다 입을 벌리는 것을 보고는 “야 입 다물어”라고 말하곤 했다.
악악. 입 다물게요 선배. 그나저나 여기 진짜 대단하네요. 이런 곳이 있는 줄을 몰랐어요. 벌린 입으로 시골 티를 팍팍 풍기던 나에게, K는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내가 널 왜 좋아하는 줄 아냐? 넌, K 대학스럽게 생기지 않았어. 작년까지는 나 혼자 다녔었는데, 이제는 네가 생긴 거야. 우리가 이 동네 짱이야” 그의 말을 듣고 K 대학스럽게 생겼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K 대학교의 밤을 밝히는 것은 도서관의 형광등과 같은 정직한 조명들이었다. 이곳을 밝히는 것은 현란한 네온사인들과 취해 비틀거리는 젊음이었다.
짝번 선배의 캥거루 주머니에 안겨, 유흥가에서 젊음을 낭비한 한 학기였다. 결국 K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나는 학사 제한을 받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 학기 휴학을 한다고 했다. 14학점만 들을 수 있게 제한된 내 처지를 자조하며, 나는 그가 없는 대학 교정을 6개월 간 허망하게 있었다. 낭비한 젊음의 대가는 매우 컸다. 14학점만 채울 수 있는 학사 제한 조치로 내 시간표는 텅텅 비었다. 유흥 말고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보이는 허무함의 컬러 렌즈가 내 각막 안쪽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정상적인 졸업을 못하고 1학기를 더 다닐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도 큰 대가 중에 하나였다.
다행히 두 학번 위인 짝번 여자 선배가 나를 발견했다. 입학 때부터 성적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는 그녀는 휴학한 그를 대신해 나를 K 대학생답게 제대로 길렀다. 나는 K 대학생답게 변했다. 낭비한 한 학기의 학점은, 훗날 4학년이 되었을 때 재수강으로 신입생들과 당당히 경쟁했다. 신입생들을 제치고, 전공 필수 두 과목의 학점을 메웠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공부 말고는 기억나는 것 하나 없는 한 학기가 지났다. 한 학기 동안 만취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과제 많은 교수를 욕하며 술을 마시고, 헤어진 애인에 대한 넋두리를 들으며 담배를 피우는 일은 지겹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강한 자극을 경험한 사람은 더 강한 자극이 아닌 일에는 대수롭지 않는 법이다. 당시의 내가 그랬다.
K는 학사 경고가 풀리고, 복학을 했다. 그는 일부 과목을 자신의 동기들과 들었고, 일부 과목은 나를 포함한 후배들과 함께 수강했다. 수업이 끝나면 그와 점심을 같이 먹었고, 쉬는 시간에는 같이 담배를 피웠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테이블에 그가 있으면, 맥주를 두 캔 더 사서 함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예전에 그와 흥청망청거렸던 그곳을 추억했다. 입을 크게 왁왁 벌리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야 입 다물어”라고 말하며 낄낄 웃었다.
오랫동안 유지된 시스템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K를 통해 깨달았다. 학사 경고가 사라지지 않고 대학교에 존속하는 이유는, 일탈에 대한 따끔한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학사 경고 이후로 그는 그토록 싫어하던 K 대학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그는 준수한 학점을 바탕으로, 졸업과 동시에 서울 소재 공기업에 직장을 구했다. 자연히 대학생이던 나와는 연락이 뜸해졌다.
뚜렷하게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학점도 애매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다행히 졸업하고 1년 뒤에 겨우 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했다. 직장인이 되기 위한 1년, 그러니깐 취업 준비생 기간 동안 나는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지냈었다. 스스로 나태해진다는 이유로, 전화번호를 바꾸고 바뀐 번호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 방법은 K 대학스러운 방법도, K 대학스럽지 않은 방법도 아니었다. 그냥 그 시절의 지질함이었다.
그러니, 결혼식 때 부를 친구가 없었다. 비슷한 나이 때의 남자 직장 동료들 일 곱 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K가 8년 만의 연락을 먼저 해서 스타일러를 사 준 것이었다. 나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결혼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당시에는 몰라서 더 놀랐었다. 최근에야 카카오톡에서는 전화번호를 바꾸어도 같은 아이디면 계속 친구가 유지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당시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결혼 스냅사진이었다.
결혼식 날, K는 결혼식 1시간 전부터 와서 인사를 하고 밖에서 담배를 퍽퍽 피웠다. 나를 K 대학생답게 공부시킨 두 학번 위의 여자 선배도 결혼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축하해줬다. 둘은 같이 맞담배를 피웠다. 여자 선배가 흡연을 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둘은 나란히 의자에 앉아서 결혼식을 지켜봤고, 피로연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나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결혼식 비용을 정산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전화를 했다.
선배, 막상 받고 나니깐 이렇게 비싼 선물이 너무 고맙고 뿌듯해요. 제가 선배 결혼할 때는 조금 더 얹어서 선물해드릴게요. 덕분에 주변 사람들한테 면이 섰네요. 내 말에 그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난 결혼 안 할 거야. 내 장례식 때 잊지 말고, 백만 원 넣어줘." 선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자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분명히, 여자 선배의 목소리였다. 웃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그에게 말했다. 어?! 선배들 같이 가고 있어요? 나는 두 선배의 앞날을 그려보며 낄낄 웃었다. 이내 합리적인 생각을 했다.
곧 스타일러를 넣어 줘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