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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행복권 Oct 21. 2023

약속 생각

약속을 어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꼭' '반드시' '다른 것은 몰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따위의 불필요한 말을 붙이는 것이다. 평범한 문장 구성의 약속일수록 잘 지켜진다. 나는 여태껏 무수한 약속을 했다. 많은 것을 지켰고, 또 많은 것을 어겼다. 물론,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것들 뿐이다. 그리고 지켜지지 않은 약속 앞에는, 언제나 불필요한 수식어들이 있었다.


아내를 처음 만날 때 나는 아메리칸 슈퍼 히어로와 같았다. 매력적이지만, 가짜였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기분이 좋았다. 낯섦과의 대화.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 말고는 전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대화였다. 목적에 충실한 그 대화는 상대를 웃기게 하고 들뜨게 했다. 결과적으로 대화를 나눈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호감을 느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주기 위해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호감을 얻었다.


첫 직장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회사에는 많은 여자 직원들이 있었지만, 나는 특히 그녀가 좋았다. 그녀를 처음 본 날, 나는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이마 끝까지 이어지는 짙은 색의 눈썹 아래로 크고 동그랗게 빛나는 그녀의 눈에서 나는 미친듯한 설렘을 느꼈다. 나는 회사에 처음 출근한 날부터 그녀를 좋아했다. 


나는 퇴근하고 나서 그녀에게 일부러 연락했다. 그녀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업무를 핑계로 연락하곤 했다. 대학교 때부터 갈고닦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는 이야기로 그녀에게 호감을 샀다. 삐삐. 그녀와 전화를 하는 중간에 다른 전화 연결음이 들리는 일이 많았다. 매력적인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그녀에게 더 내 마음을 쏟게 했다.


"말을 참 재미있게 하네요. 호호"

대화 중간에 그녀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얼마 안 있어,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생겼다. 어떨 때는 업무 이야기에서 시작된 통화를 2시간씩이나 휴대폰 배터리가 꺼질 때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메신저로 더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런 날이면, 나는 그녀와 더 진전되어서 사귀자고 고백할 수 있을까, 손잡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두근거렸다.


그녀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날, 그녀는 단순히 고개만 끄덕인 것이 아니라 엄청난 감동을 받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엉엉. 말 그대로 그녀는 눈물을 쏟았다. 섣부르게 고백하는 나에게 안기며 그녀는 엉엉 울었다. 격하게 반응하는 그녀를 안으면서, 내가 가장 최근에 울었던 적이 언제인가를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이름 모를 한국 현대 단편 소설을 읽고 찔끔했던 기억뿐이었다. 물론 그 작품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먹을 만큼 먹은 이 나이의 내가 그 작품을 다시 본다고 한들 엉엉 울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보다 겨우 세 살 어린 그녀가 내 말에 감동을 받아서 울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흐느낌이 내 심장을 떨리게 했다. 매력적인 여자인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했던 크게 티 나지 않는 나의 어색한 호감 표시들. 전화로 채운 수많은 시간들. 그녀와 같은 차를 탈 때면, 은은하게 향기로 퍼졌던 그녀의 바디로션 빅토리안 시크릿. 지금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있는 내 팔. 나를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큰 눈. 다시는 느끼지 못할 감동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매력적이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인생에 거짓이라는 힘을 가득 줬다. 당시는 '미라클 모닝' '기적의 새벽 운동'이라는 아침형 인간이 현대 직장인의 트렌드였다. 하지만 저녁까지 야근하고 밤늦도록 회식을 하는 직장인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자기 계발을 하고 운동을 하는 것은 초인적인 일이었다. 직장인들은 모두 그것을 꿈꿨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다. 네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메리칸 슈퍼히어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약속했다. 내 약속을 듣던 그녀는 "우와 멋있다. 그럼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 끝내고 나갈 때 나한테 모닝콜해줘"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네시 반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씻고 헬스클럽 나가는 새벽 여섯 시에 모닝콜을 해줄게. 그녀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새벽 네시 반에 알람이 울렸다. 울리자마자, 알람 시간을 여섯 시로 변경했다. 여섯 시 알람 소리를 듣고 겨우 일어나 그녀에게 아침에 운동을 다녀온 것처럼 모닝콜을 했다. 


그녀와의 첫 번째 약속을 그렇게 어겼다. 꼭 지키겠다고 말한 그 약속을 어겼지만, 그녀 앞에서 나는 성실한 직장인 그 자체였다. 그녀는 내가 약속을 어겼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만나면 내 팔뚝을 안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눈은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팔을 만질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힘을 줬다. 그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새벽마다 운동을 열심해서 몸이 탄탄해졌다고 감탄했다.


이후로 그녀에게 한 수많은 약속을 어겼다. 잠은 반드시 집에서 잘게. 다른 것은 몰라도 회식자리에서 만취하지는 않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담배를 피우지 않을게. 모두 그녀에게 한 약속이었지만 지키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내가 이런 약속을 모두 지킨 줄 알고 있다. 


대학교 친구들과 밤새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는 날이면 그녀에게는 지금 시골 고향집에 있다고. 술을 많이 마시고 정신을 놓고 싶은 날이면 만취하기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집에 잘 있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담배를 내밀면 거절하지 않고 텁텁함을 내뿜었지만 그녀에게는 금연 중이라고. 약속을 지킨 척 거짓말을 했다.


그녀에게 나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매력의 대부분은 내 입에서 나온 약속이라는 말로 만들어낸 가짜였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나만 바라보게 하고 싶어서. 했던 수많은 약속들과 무수한 거짓말들. 이런 일들이 지속된다면, 나는 그녀에게 내 본래의 모습보다 거짓된 모습을 더 많이 보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소용없어. 결국 남게 되는 것 아무것도 없을 거야. 나는 거짓으로 포장하는 스스로를 애처롭게 생각했다. 당장에 책상 위에 있는 펜을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한 거짓말과 지키지 않은 약속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내가 어긴 약속보다 지킨 약속이 훨씬 많았고, 거짓된 모습보다 진실된 모습이 압도적이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소중한 관계를 망칠 뻔한 나를 성찰하며, 앞으로의 다짐을 적었다.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을 꽉 주며 진심을 담아 마지막 문장을 완성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는  지킬 약속만 할게.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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