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들어가는 직업 중에 가난한 사람 없어요. 의사. 변호사. 교사. 저 ㅇㅇ중학교 교사예요."
술 때문에 거칠어진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가방 안쪽을 뒤지더니 손에 닿는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담배와 교직원증이었다. 교직원증은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고, 그녀는 담배를 입술에 물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고갯짓 했다. 같이 피겠냐는 의미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한번 더 고갯짓을 했다. 이번엔 바텐더가 있는 쪽이었다. 라이터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건 무슨 콘셉트일까? 스스로가 교사라고 나를 학생 취급하는 건가?
어쨌든, 지시를 받은 나는 술을 먹다 말고 종종걸음으로 바텐터에게로 갔다. 불 좀 가져갈게요. 박스 채 쌓여 있는 라이터를 하나 집어 들고 말했다. 바텐더는 대답 대신 고갯짓을 했다. 이쪽 동네 특징인가? 다들 고갯짓을 즐겨하네. 내가 고갯짓 하는 바텐터를 응시하자, 바텐더는 한쪽 눈으로 윙크까지 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여자가 취한 것 같으니 잘해보라는 의미 같았다. 나는 힐끔 그녀가 있는 쪽을 봤다. 잘 하기는 무슨, 내 인생 레전드 소개팅으로 남겠구먼.
입사 이후, 대략 2년 동안 50회의 소개팅을 했다. 만나는 이성마다 나는 애프터를 신청했다. 그중 애프터 수락은 겨우 4회였다. 처참한 수준으로, 프로야구라면 당장이라도 퇴출당할 1할 미만의 성공률이었다. 내 인생에 연애는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옆자리 대리가 나에게 소개팅을 주선했다. 아내의 친구로 90년생 중학교 과학 교사라고 했다.
결혼 적령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소개팅이라는 말에 유쾌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런 사람이 왜 나를?'이라는 꺼림칙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좋습니다. 소개팅할게요. 나는 로또를 사는 심정으로 소개팅에 응한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소개팅을 거절해본 적이 없다. 사진을 보여주세요. 나는 로또 당첨 번호를 미리 몇 개 알고 싶다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말했다.
내가 사진을 미리 보여달라고 한 것은, 내 마음속의 미혹된 마음을 끊기 위함이었다. 망상과 망념에 사로잡혀 소개팅 전부터 사랑에 빠지는 등신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진 받은 건 따로 없고, 카톡 사진이 여러 개 있으니 이것 봐" 대리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양심까지도 깨끗해 보이는 듯한 새하얀 피부의 여자가 있었다. 젊다기보다는 어린 느낌이었다. 청결하고 날카로운 턱선은 그렇지 않아도 혈색 좋은 입술을 돋보이게 했다. 미녀였다.
그렇게 그녀와 만난 것이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카톡 사진을 봤을 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마지막은 아니었다. 나는 라이터에 칙칙 불을 붙이며 다시 그녀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테이블 끝에는 잭 다니엘과 콜라가 있었고, 내 자리 쪽에는 얼음이 가득 담긴 통이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가장 많이 녹은 얼음을 하나 집더니 재떨이 위에 두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문 입술을 나에게 내밀었다. 불을 붙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콘셉트일까? 나는 그녀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이룬 그녀는 신이 나 있었다. 미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얀 다리를 이리 꼬았다가 저리 꼬았다가 하면서, 큰 소리로 웃었고 거침없이 나에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보석이 박혀 있는 긴 손톱으로는 내 팔에 난 털을 쓰다듬었다. 지독한 담배 연기가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
"나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그녀가 담배를 하나 피우고는 말했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네요.
"그거 말고는?" 그녀는 꼰 다리를 풀더니, 갑자기 말을 놓았다.
뭐? 그거 말고는 똑같은데? 나는 팔짱을 끼면서, 말을 놓았다.
"지금 나 떨고 있어. 미세하게. 지켜보는 사람은 모르는데 나는 아는 미세한 떨림"
뭐? 난 처음 듣는데? 무슨 뜻이야?
"등신아. 이거 완전 등신 새끼네"
뭐?
그녀는 가방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자. 이쯤에서 나가자.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녀의 당당한 말에 나는 아까처럼 더 이상 "뭐?"가 되지 않았다. 술은 먹을수록 간덩이가 붓는다는데, 그녀와 나는 같은 양의 술을 먹었건만 한껏 부어오른 그녀와 달리 내 간덩이는 쪼그라들기만 했다. "딱 3시간이다. 농담 아니야. 3시간 뒤에도 똑같으면 우린 끝이야."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대로 하기는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그냥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몸이 흥분돼서 미칠 것 같았다. 추운 겨울 아주 뜨거운 노천탕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다. 여태 내게 이런 도발적인 말을 내뱉은 사람을 떠올려 봤다. 영화 속 여주인공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어디를 걷자는 걸까. 세 시간은 뭐지? 나를 놀리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냥 나를 자극해서 그 반응을 보려는 걸까?
우리는 바에서 나왔다. 그녀는 이쪽이라면서 나를 안내했다.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내가 따랐다. 그녀가 안내하는 이 동네는 그녀처럼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복장으로 나섰다가는 경찰이 잡아가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정도로 그녀의 치마는 짧았고 그녀의 화장은 화려했다. 과장하자면 그녀는 밤에 떠오른 태양과도 같았다.
"여기야. 여기를 좀 걷자" 그녀가 뒤따르는 나와 나란히 서기 위해서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그녀 옆에서 그녀가 말하는 그곳을 봤다. 꽤 큰 호수가 있는 산책로였다. 한밤이었음에도 호수 옆에 난 산책로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믿기지 않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갑자기 자신의 교직원증을 꺼냈다. 거기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녀의 모습과 똑같은 얼굴이 프린트된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자세히 봤다.
"뭐야? 무슨 흠을 찾아.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 다 있는데. 어머. 그나저나 귀가 빨개졌네." 그녀는 교사가 확실했다. 내가 학생 때에도 교사들은 내 귀가 빨개지는 것을 보고는 "어머, 얘 봐. 귀에 불났네!" 하며 깔깔거렸다.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도 교사답게 내 귀를 가리키며 깔깔거렸다. "나 귀 한 번만 만져봐도 돼?" 어느 순간 나에게 팔을 뻗더니 그대로 내 얼굴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무작정 들이밀었다.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살짝 닿았다. 희미한 담배 향이 났다.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까부터 내 가슴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여자 담배 피우는 것 말고는 모두 마음에 들었다. 아니, 담배 피우는 것조차도 매력 있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내 한쪽 귀를 내어주며, 그녀의 한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어떠한 것이든 사랑의 감정으로 바라보면 마음에 드는 법이다.
그녀의 말처럼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그녀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드러내며, 제대로 쓸 줄 아는 여자였다.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쟁취한 사람만이 내뿜을 수 있는 마음의 부유함인가? 나는 놀랐다. 무엇인가 뚜렷하게 성취해본 적이 없이 자란 나는 이런 부유함을 몰랐다.
아직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밤은 지금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