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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행복권 Oct 21. 2023

층간소음 생각

쿵쿵쿵. 

눈을 다시 감을 수가 없었다. 어두운 벽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동자까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청각의 시각화.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 떠올랐다. 


"특정 소리는 너무도 인상 깊어서 우리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눈을 감아도 보일만큼 선명하기도 하죠. 그것을 청각의 시각화라고 한답니다. 교과서에 있는 구절을 보면 종소리가 푸르다고 하지요? 시인에게는 종소리가 그만큼 선명한 대상인 것이죠."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 문학 교사의 설명을 이해했다. 그렇다. 나는 눈을 감아도 보일만큼 선명한 층간소음을 겪는 중이었다. 엄청난 소리를 내는 집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침대 어딘가에 둔 휴대폰을 찾기 위해 이불을 들췄다. 버튼을 눌러 화면을 밝히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네시 반이었다. 쿵쿵쿵. 일정한 속도로 발뒤꿈치로 망치질을 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너무도 뚜렷하여 바로 내 앞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위층에서 소음을 내는 장면이 그려졌다. 층간소음의 시각화였다.    

 

한참 만에야 나는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시들어빠진 배춧잎처럼,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로 침대에 걸쳐 앉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당장에 안방을 나서 거실로 나갔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들이밀었다. 좌우를 살펴보고 아래로 고개를 떨구었다가 대각선의 먼 곳까지 둘러보았다. 


윗집에만 전등불이 켜져 있었다. 티브이 소리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쿵쿵쿵. 이 소리의 정체를 확실히 알아냈다. 러닝머신을 걷는 소리. 시속 5km로 티브이를 틀어 놓고 새벽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나를 깊은 잠에서 끌어낸 것이다.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숨을 한껏 죽인 채로 경비원이 말했다. 내가 평생 들은 ‘여보세요?’라는 인사 중에 가장 작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지금은 새벽이라서 이 아파트에 있는 그 누구라도 반드시 조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윗집에서는 이 규칙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경비원에게 말했다. 지금 윗집에서 러닝머신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전화 좀 부탁해요. 내 말을 들은 경비원은 "예? 지금 러닝머신을 한다고요?"라며 난생처음 겪는 일처럼 말했다. 당장 조치하겠다고 했다.      


이미 잠은 완전히 깬 후였다. 잠자던 침대로 돌아가 그대로 이불속에 파고들어 휴대폰을 들었다. 층간소음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했다. 아이들의 뜀박질로 인한 소음, 늦은 밤까지 피아노 연주로 인한 소음, 밤늦게 의자를 끄는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고민들이었다. 


새벽 네시 반에 러닝머신을 뛴다는 고민은 없었다.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집에서 러닝머신을 뛴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시간이었다.     

 

쿵쿵쿵. 

소리가 계속 나고 있었다. 아직 관리사무소에서 전화를 안 했나? 아니면 전화를 받고도, 그냥 무시한 것일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마에서부터 등까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쿵쿵쿵.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아랫집에 사는 내가 조용해 달라고 예의 있게 요청을 했는데도, 계속 러닝머신을 하다니. 나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당장에 층간 소음 보복 제품을 검색했다. 너도 당해 보니 어때?라는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얼마 안 되어 소리가 멈추었다. 아마도 관리사무소에서 윗집 전화번호를 찾는데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윗집에서는 그 이상한 새벽 운동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화를 한 그다음 날부터는 전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고요한 밤을 채우는 것은, 아파트 앞 대로변을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의 은밀한 배기음뿐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나는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각은 항상 네 시 반이었다. 그렇게 눈을 뜨면, 숨소리를 죽이고 어둠 속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해서였다. 윗집에서 쿵쿵 소리를 낸다는 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조용해야 할 새벽 시간에 층간소음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예의 있게 요청했다. 그런데도 만약 쿵쿵 소리를 낸다는 것은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새벽 시간에 잠에서 깬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무시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깊게 잠에 들지 못하고 새벽에 계속 일어난 것이었다.   

  

층간소음 고통의 첫 단계를 "귀가 트였다."라고 말한다. 한번 인지된 소음은 귓속 아주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게 된다. 이후로는 그 소음과 비슷한 소리만 듣게 되더라도 귀가 예민하게 반응한다. 심지어는 집을 벗어나더라도 그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는 층간소음 고통의 첫 단계를 잠시 겪은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윗집의 어떤 사람으로 인해 나는 한동안 괴로워했다. 물론 소리 같은 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시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 괴로워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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