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밥벌이는 할 수 있는 계약직으로 겨우 입사했을 때, '나 혼자 산다'라는 관찰 예능을 즐겨봤다. 타지에서 혼자 살면서 무기력해지기가 싫어서 더 몰입해서 봤다. 그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은 혼자 살면서도 그럴듯한 요리를 하고, 자신의 취미를 갖고, 시간을 내어 봉사 활동을 가곤 했다.
미디어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혼자 사는 청춘들은 그 모습을 매력적으로 느꼈고, 곧 그것을 따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는 정성스럽게 요리를 했고, 피아노 연주라는 취미를 가졌고, 주말이면 보육원으로 봉사 활동을 갔었다. 당시 보육원에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나이의 아이들이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가난의 맨얼굴을 봤다.
보육원에서 내가 하는 봉사는 예전 학교 소사가 하던 잡일이었다. 수명이 다한 안전기를 교체하고, 예초기로 주변의 풀을 베고, 홍감자를 캐고, 원숭이 우리를 치우는 일이었다. 보육원에 왜 원숭이 우리가 있지? 나무 사이를 후다닥 뛰어다니는 원숭이들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원숭이들은 꺅꺅거리기만 할 뿐 명쾌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봉사하는 스스로를 참 멋지게 생각했다. 왠지 주변에 가상의 카메라 수 십 대가 나를 촬영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2의 사춘기가 아니었나 싶다. "주말에 뭐 했어요?"라는 옆자리 여자 동료의 인사치레의 질문에 멋진 대답할 수도 있었다. 보육원에서 봉사를 했어요. 하하. 저는 봉사할 때마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예상대로 동료들은 주말에 봉사 다니는 나를 좋은 남자로 봤다. 그때부터 소개팅이 밀물처럼 쏟아졌고, 그럴듯한 술자리에 항상 나를 불렀다. 나는 그럴 때마다 평일 저녁에는 피아노 레슨을 받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주말에는 보육원으로 봉사를 다닌다는 레퍼토리를 반복해서 말했다.
의도는 불순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육원 봉사를 꾸준히 다니게 되었다. 보육원 담당자도 이렇게 꾸준하게 봉사하는 사람은 오랜만에 본다면서, 나와 사적인 말을 자주 섞으며 너나들이했다. 자연스레 내가 졸업한 대학교와 전공을 알게 된 담당자는 "생긴 것과 다르게 공부를 열심히 했나 봐요?"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번에 ㅇㅇㅇ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된 거 아시죠?"
노란색 교복 입고 왔다 갔다 하는 여자애 말인가요?
"맞아요. 걔가 중학교 때 공부를 곧잘 했는데, 고등학교 올라가니 혼자서는 버거워하더라고요. 그래서 크게 부담이 안되면, 공부를 좀 봐줬으면 해요."
국어랑 영어 정도는 봐줄 수 있는데, 수학이랑 과학은... 죄송합니다. 문과라서.
"괜찮아요. 일단 국어랑 영어만 봐주세요. 수학이랑 과학은 대학생들 교육 봉사 오면 부탁하면 돼요"
그럼 국어랑 영어도 대학생들한테 받는 게 낫지 않아요?
"그게, 사범대 학생들이 교육 봉사를 오는데, 자발적인 게 아니라 교원자격증을 따려면 필수적인 거라서 딱 2개월만 채우고 그만두더라고요. 꾸준히 오래 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하거든요. 우리 애들은 마음이 약해서 사람이 자꾸 바뀌면 불안해하더라고요. 이미 아이들은..."
이미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말을 보육원 담당자가 전부 내뱉기 전에 내가 크게 대답했다. 네, 제가 할게요. 저는 바로 옆이 직장이라서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이상 계속할 수 있어요. 하죠 뭐! 내 대답이 너무 컸는지 갑자기 흥분한 원숭이들이 소리를 꺅꺅 질러댔다. 도대체 보육원에 원숭이는 왜 있는 겁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담당자는 식사 준비를 하러 건물 안으로 바삐 들어가고 있었다.
여학생의 공부를 봐줄 때 한 달 동안은 담당자도 함께 공부방에 있었다. 가끔씩 쪄서 가져다주는 홍감자가 참 맛있었다. 한 달이 지나자 담당자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을 공부방에 데려다 놓더니, 얘도 공부에 흥미가 있으니 함께 봐달라고 했다. 그러곤 보육원 업무가 있다며 옆 방의 사무실에 있겠다고 했다. 나를 보육원 직원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졸지에 나는 두 학생의 과외 교사가 되었다. 물론 두 학생은 나를 과외 교사가 아닌 동네 아는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공부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이라고는 했지만, 학업 수준과 집중력이 현저하게 낮았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할 때, 여고생에게는 아이돌 인피니트 이야기로 예시를 많이 들었고 남중생에게는 게임 LOL에 빗대어 설명을 자주 했다.
내가 예시를 잘 들어서인지, 두 달만 하고 그만두는 대학생들과 달리 꾸준하게 학습 지도를 한 덕인지, 두 학생은 시험 기간이면 스스로 계획을 세우며 공부를 할 정도가 되었다. 가끔씩 학생들이 되묻는 질문에 당황할 정도로 학업 수준도 올라갔다. 이들의 학업 성취도가 오르는 만큼, 나는 두 학생들과 친해졌다.
두 학생들도 나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가끔씩 자신들의 가난과 관련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 말들은 프로 복서의 잽과 같았다. 가까이 붙으려는 상대방에게 프로 복서가 잽을 날려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가난의 말들은 접근하려는 나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도록 했다.
교복을 제외하고는 뻔하게 티 나는 낡은 신발과 가방 때문에 부끄럽다는 이야기,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가난한 교우 관계로 인한 답답함,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해도 변하지 않는 교사들의 안타까운 시선의 불편함.
“저는 수행 평가할 때 여러 개를 해요.”
잊어버리고 학교에 못 가져갈까 봐?
"아뇨. 게임방 가려고요. 킬킬. 애들 수행평가 대신해주고 돈 받아요"
수행평가를 대신해주고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보육원 담당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겠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장난기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자, 남자 중학생은 갑자기 울먹이듯이 말했다.
"게임방을 너무 가고 싶었는데, 보육원에서는 절대 그런 곳에 못 가게 하거든요. 친구들은 매일 롤 이야기만 하니까, 그 게임을 안 하면 대화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애들 수행평가 대신해주고 돈 받은 적 있어요. 저 이거 보육원에서 알면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걸 계속 시킨단 말이에요. 제발 말하지 마세요."
나는 수행평가를 대신하고 돈을 받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연히, 무엇인가를 잘못하면 보육원에서 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게 무엇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중학생을 황망히 보기만 했다. 내가 계속 바라보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자 여고생이 나를 부르며 말했다.
"선생님, 얘 예전에 슈퍼 마켓 창고 털다가 걸렸거든요. 환풍기 정도 되는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서 과자랑 음료수 꺼내서 먹다가 걸려서 난리 났었어요. 그때 원장님 찾아가서 빌고, 경찰 아저씨도 주인 설득하고, 결국은 잘 넘어갔죠. 그리고 얘는 그날 이후부터는 음식 앞에서 십 초 세고 먹어야 돼요."
음식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하고 먹는 것도 아니고, 십 초를 세고 먹어야 하다니. 나는 보육원의 교육 방식이 낯설기도 하고, 음식 앞에서 십 초를 세고 있는 중학생의 모습을 상상하니 어이가 없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내가 웃음을 짓자, 중학생은 내 웃음을 자신의 비행에 대한 묵인으로 받아들였는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보육원 담당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올 테니, 학습 활동 문제를 풀고 있어라. 나는 곧 울듯한 중학생의 얼굴을, 눈물 가득한 그 두 눈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했다. 보육원 담당자에게 수행평가 매매 사건을 말하자, "이런 미친..."이라고 말하며 대번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옆 공부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나무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원숭이 같아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만약 내 아이가 수행평가를 대신해주고 돈을 받아 게임방을 갔다면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자가 어떤 교육적인 처지를 할까 궁금했다. 나 역시도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원숭이 마냥 옆 방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고개 들어. 눈을 봐야지. 사람이 이야기하면 눈을 봐야지. 왜 바닥을 보고 있어?" 담당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중학생에게 고개를 들게 하고 눈을 바라보게 했다. 중학생이 고개를 들고 겨우 눈을 떠서 눈을 맞추자 담당자가 말했다. "내일 학교를 방문해서, 수행평가 부정행위에 대한 학업성적관리규정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절차에 맞게 네 행위를 바로 잡을 거야. 그리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되었을 때, 컴퓨터실의 컴퓨터에서 게임도 하게 할 거다."
이때 내가 들은 말들은 너무나도 놀랍고 뜻밖이었다. 이미 시간이 꽤나 지났건만 그때의 기억은 오히려 생생해지기만 한다. 가난은 규정마저도 번거롭게 만든다. 며칠 굶은 사람이 먹을 것 앞에서 무너지듯, 가난은 사람들을 욕망 앞에서 쉽게 무너트린다. 보육원 담당자는 오랜 경험으로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것도 가난 앞에서는 크게 느껴진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아등바등 먼저 해야 할 일이 정말로 많다. 그러니 절차를 무시하고 법과 도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 중학생만 가난했겠는가? 당시 나도 정규직이 되기 위한 스펙에는 한참 못 미치는 가난함이 있었고, 취업 준비를 이유로 애써 외면한 친구들과의 가난한 인간관계에 외로워 했고, 부족한 직무 능력을 포장하기 위해 상사들에게 아부해야 하는 비루함이 있었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려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절차대로 지켜도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담당자는 그때 그것을 교육한 것이다. 나 또한 그 말에 설득당했다.
순리대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그 중학생은 기다림과 절차를 배웠다. 덕분에 나도 기다림과 절차를 깨달았다. 중학생은 몇 년이 지나 수능을 치렀고, 나는 다른 회사의 정규직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몇 년 간의 보육원 봉사가 끝이 났다. 봉사는 끝이 났지만, 지금까지도 보육원 담당자는 감자 철이 되면 곱게 익은 홍감자를 택배로 보낸다.
내가 선물을 해도 모자를 마당에 매년 감자를 받아만 먹으니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매년 되돌려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한다. 받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인 인간관계의 마땅한 절차이거늘, 아직까지도 내 마음 씀씀이는 가난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감자 철만 되면, 홍감자가 생각이 난다.
가난은 마땅한 과정마저도 번거롭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