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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행복권 Oct 21. 2023

친구 생각

M과 나는 20년을 친구로 지내다, 3개월을 의절했다. 20년 동안은 다른 누구보다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3개월 동안 남보다 못한 관계로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서로를 속 좁은 놈이라고 욕하진 않았지만, 스스로를 속 좁은 놈이라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이 모든 것은 양복 한 벌 때문이었다. 그깟 양복 한 벌이 뭐라고. 사건의 처음은 M의 부탁 전화였다.


"브라더. 어려운 부탁인 거 안다. 사회 좀 봐줘라. 상황이 거시기 해"

결혼을 일주일 앞둔 그는 나에게 사회를 부탁하는 전화를 했다. 대타 사회자라니.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상대의 골치 아픈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은 천박한 호기심 그 자체이다. 갑자기 기존 사회자가 부담을 느껴서 못하겠다고 그에게 연락을 한 것이 분명했다. 20년 지기 친구인 그의 다급한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알겠어 브라더. 대본 보내줘. 


"정말 고맙다. 구구절절한 스토리는 나중에 말할게. 나 양복점 오픈한 거 알지? 양복 한 벌 해줄게"

M의 말에 나는 크게 즐거워하며 낄낄거렸다. 그 양복 거절하지 않으마. 지금부터 사회 연습한다. 어깨 쫙 펴라. 축가도 해 줄 수 있다. 내 말에 그는 "네가 결혼하냐? 축가는 내가 할 거다"라고 말하며 낄낄거렸다. 당시 우리는 갓 구운 빵 같은 우정의 촉촉함을 심장 깊숙이 느꼈다. 빵과 우정은 공통점이 많다. 


아내 앞에서 M과의 우정을 자랑하면서, 양복 이야기도 꺼냈다. 아내는 좋은 친구를 서로 뒀다면서, 나중에 양복 맞출 때 같이 가자고 했다. 결혼날 달달 떨고 있는 그와는 달리, 나는 양복 한 벌의 값어치에 걸맞은 사회 역할을 제대로 했다. 사진 촬영까지 모두 끝나고, 그는 예전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그는 내 두 손을 한동안 잡고 너무도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알겠어. 신혼여행 잘 다녀오고, 난 양복도 받으니 여행 가서 선물은 사 올 필요 없어. 내 말을 듣고, 그는 "그래도 하나 사 올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잘 발효된 빵 반죽 같은 구수한 냄새의 존 바바토스 향수가 집 앞에 있었다.  


M의 결혼식은 겨울이었다. 나는 겨울 양복에 비해 여름 양복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에게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름이 되면 양복점에 가서 한 벌 선물 받으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양복점을 오픈 한 지 얼마 안 된 겨울은 더 바쁠 것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이 들었다. 여름 즈음엔 가게도 안정화되겠지? 무엇보다 겨울 양복보다 여름 양복이 더 저렴하니 서로 부담이 적겠네. 하지만, 그 생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얼치기 샐러리맨이었던 나만의 것이었다. 


빵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굳어 딱딱해진다. 곧 말라비틀어진다. 그것은 우정도 마찬가지이다. 양복 한 벌에 담긴 우정의 유통기한은 서로 달랐다.


M은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아이가 생겼다. 임신을 축하할 겸, 여름 양복을 선물 받을 겸, 아내와 함께 일부러 그의 양복점에 들렸다. 마감 타임을 맞춰 커피와 케이크를 사들고 가서 축하해줬다. 그 자리에는 그의 아내도 있었다. 축하를 받은 그는, "온 김에 여름 양복 보고 가"라고 말했다. 아내들도 있었기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 준 그가 무진장 고마웠다. 역시 내 친구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5개월이나 지났기에, 내가 먼저 약속된 그 양복을 가져가겠다고 이야기하기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골라줘. 내 말에 M은 양복점에서 꽤나 값이 나가는 옷을 나에게 권하며, "이걸로 할래?"라고 말했다. 그래. 고맙다. 저녁은 우리가 살게. 내 말에 그는 엷은 미소로, "저녁까지? 내가 더 고마운데. 오늘 축하 제대로 받는 날이구만. 어쨌든 알겠어"라고 말했다.


젊은 사장답게, M은 살뜰하게 직원 할인까지 적용해서 27만 원에 가격을 맞췄다. 그리고 곱게 포장한 양복을 종이 가방에 담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종이 가방을 받으며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잘 입을게. 아이 생긴 것도 축하해. 여기까지가 우리의 촉촉한 우정 이야기이다.


"계산은 안 해?" 

M이 뒤돌아 가는 나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짓궂은 친구이구만. 장난은 장난으로 응하는 것이 흥을 깨지 않는 법이지. 나는 더 큰 목소리로 답했다. 아 그거 장부에 달아둬. 저녁 먹고 와서 계산할게. 내 말을 듣던 그는 진정으로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마감했는데, 왜 저녁 먹고 계산해? 지금 하고 가. 계좌 이체도 가능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의 진심에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사회를 봐준 고마움으로 양복을 맞춰주는 절친이 있다고, 그 친구와는 알고 지낸 지가 20년이 지났다고, 그렇게 아내에게 자랑을 했던 스스로가 참 우스웠다. 그렇기에 아무 일도 아닌 척 그의 말대로 계산을 하고 나올 수도 없었다. 나는 귀가 새빨개지며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무 일 없는 2000년 1월 1일을 맞이한 종말론의 교주처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해댔다. 한 번도 한 적 없는 손짓과 고갯짓을 써가며 그에게 내가 양복을 계산할 수 없는 이유를 나열했다.


어... 어... 이거 지금 내가 계산을 할 수가 없는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음... 음... 네가 내 결혼식 때 축의금을 한 게 20만 원이었잖아. 나는 너에게 30만 원을 축의금을 했어. 신혼여행 가기 전에, 네가 나한테 전화도 했잖아. 어... 이게 아니고. 내가 말하려는 게. 왜 그랬냐면, 네가 사회를 나에게 부탁하면서, 양복을...


사회와 양복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M은 매우 낭패인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천박하게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미안하다. 내가 급할 때는 그렇게 부탁해놓고... 내가 먼저 양복 이야기를 해 놓고. 정말 미안하다. 어서 가져가" 좀처럼 당황하지 않아 기계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크게 당황해서 손까지 달달 떨면서 나에게 손짓을 했다. 결혼식 때보다 더 크게 떠는 그 손짓을 보고 있노라니, 이 모든 상황에 짜증이 났다. 지금 여기에 있는 두 아내는 우리가 멋진 친구 사이인 줄 알고 있지 않은가?


M과 M의 아내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힘없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저녁은 다음에 하자. 내가 전화할게. 그는 손을 달달 떨면서 말했다. "어... 어... 브라더... 기다릴게"


하지 않아도 되는 장광설까지 포함해, 내가 이 옷을 계산할 수 없는 이유를 두 아내와 그 앞에서 나열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훗날 내가 임종할 때, 누군가 지우고 싶은 과거를 말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이 사건을 1위로 꼽을 것이다. 지우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그 날의 기억 때문에, 나는 M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내도 크게 당황한 내 표정을 읽고는, 그 날 이후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기약 없는 엠바고가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내가 M에게 다시 연락을 한 것은 스테이플러로 유인물을 정리하다가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그가 기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도 중학생 시절의 스테이플러와 관련이 있다. 중학교 때, 옆자리에서 졸던 그를 유심히 보던 과학 교사가 나에게 짓궂은 농담을 했다. "쟤 너무 잔다. 스테이플러로 콱 집어라" 나는 그것이 농담임을 알면서도, 중학생 특유의 허세로 같은 반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고자 스테이플러로 그의 손등을 살짝 찍었다. 


자고 있다가 불의의 공격을 받은 M은 고개를 갑자기 휙 들었다. 뒤통수를 맞을 줄 알았던 나는 그의 반응을 조심히 살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스테이플러를 튕겨내고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내 손 왜 찍어?" 침착한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의 별명을 기계로 지었다.


기계 M. 당시에 친구들은 잘 지었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라는 생각이 든다. 기계에게 기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매력적인 작명은 아니지. 감정 없는 아메바가 더 어울리는 것도 같네. 아메바 기계? 기계 아메바? 중학교 때 그의 표정과 나의 잡다한 생각이 뒤섞인 스테이플러를 보면서 혼자서 낄낄댔다.


그렇게 3 개월 만에 M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걸자마자 바로 그가 전화를 받았다. 브라더. 아내 앞에서 우리가 한 허튼짓을 떨쳐내는 데 3개월 걸렸다. 늦지 않았지? 그의 전화기에서는 작은 목소리로 "잠시만 중요한 전화를 받고 오겠습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아마 고객에게 하는 말이리라. 그리고 잠시 뒤 그가 말했다. "브라더.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무엇으로 사과하면 좋을까?" 그의 말을 듣고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중학교 때 스테이플러 사건이랑 퉁쳐.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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