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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행복권 Oct 21. 2023

어머니 생각

나의 어머니는 식당 이모로 반 평생을 보냈다. 이 여사. 누군가 식당에서 그녀를 찾을 때, 그 호칭을 썼다. 그 시절 그녀의 손가락에는 모두 습진이 올랐었고, 손목에는 터널 증후군이 왔었다. 그녀는 매일 저녁으로 습진 약을 손에 덕지덕지 붙였다. 허연 약이 묻지 않은 손등으로 반대편 손목을 눌러대다 진이 빠져 잠들었다. 그녀의 손가락 열 마디의 습진으로, 나는 대학을 마쳤다. 그녀의 두 손목에 발병한 터널 증후군으로, 나는 결혼을 했다. 습진 약과 진통제를 버리는 데 무려 삼십삼 년이나 걸렸다.


나의 어머니는 한 문장을 겨우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집안일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땅을 조금 갖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식구들을 모두 먹이고 교육할 수 없었다. 5살 때, 맏딸인 그녀는 살림 밑천으로서 자신을 받아들였다. 평생 끝나지 않을 그녀의 숙명이었다. 농사일하러 간 부모를 대신해, 그녀는 동생들을 길렀다. 그리고 소녀가 된 그녀는, 중학생이 아닌 방직공이 되었다. 그녀의 노동은 오직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것 없는 성장기를 보냈다.


장녀로서 나의 어머니는 둘째 여동생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 셋째 남동생과 넷째 여동생은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정작 그녀는 국민학교 졸업장만 받았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생기 있는 얼굴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 십 수년을 그녀는 공장에 있었다. 그녀의 졸린 눈으로 형제자매들은 밤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었고, 그녀의 푸석한 피부로 가족들은 기름진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다. 예전에 외갓집에서 외삼촌 대학 졸업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사진 속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내가 평생을 봐 온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이때부터였구나.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여유 없이 살았다. 나의 아버지와 결혼하고 나서, 그녀는 방직공을 그만뒀다. 아버지의 직장 소재지에는 공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식당 이모로 일을 시작했다. 방직공장의 먼지 구덩이에 있던 푸석한 그녀의 손은, 더럽고 기름기 가득한 설거지 통에서 바삐 움직였다. 그녀는 가끔 식당에서 남은 음식 재료를 가져왔다. 주로 양념이 잘 베인 불고기였다. 그녀를 제외하고 우리 가족은 모두 맛있게 먹었다. 그녀는 불고기를 먹지 않고 새로 꺼낸 김치와 밥을 먹었다. 그때는 맛있는 불고기를 먹지 않는 그녀가 이해 안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한 이유를 안다. 하루 종일 구정물에 가득 쌓인 불고기 판을 닦던 그녀였다. 매일 역한 고기 냄새 속에서 반찬을 나르며 바삐 움직였던 그녀였다. 불고기 노린내가 코를 찌르는데, 그것을 집에 와 저녁때도 먹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은 불고기를 정성스럽게 포장해 왔다. 가족을 위해 다시 불고기를 요리했다. 유독 불고기를 볶을 때, 그녀는 헛구역질을 했다. 지금도 불고기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눈물샘이 찬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안정된 직업을 가지자 일을 그만두셨다. 나는 기쁘고 죄송했다. 드디어 그녀를 위한 삶을 사는 데 내가 일조했다는 것이 기뻤다. 꽤나 긴 취업 준비 기간 때문에 일을 몇십 년을 더 하게 한 것은 죄송스러웠다. 나에게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늦었지만 여유 있는 여생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녀는 내 바람대로 아침이면 동네 주민들과 뒷산을 탔고, 주말이면 국민학교 동창들과 식당에서 만났으며, 휴가철에는 아버지와 해외여행을 다녔다. 


최근에 나는 어머니의 어떤 선택으로 크게 다투었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소리 높여 반대했다. 여태껏 나는 그녀의 선택에 반대해 본 적이 없다. 대학도 그녀의 제안대로 선택했고, 취업도 그녀의 제안대로 했다. 아직까지도 터널 증후군으로 가끔씩 주물러 대야만 하는 그녀의 손목을 아프게 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덜 미안하기 위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따랐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였다. 나의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한다고 하며, "요양보호사로 두 명의 노인을 담당해. 엄마는 가만히 있으니깐 도저히 답답해서 안 되겠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 선언이 끝나자마자 말했다. 엄마, 이제는 일 그만해도 되잖아요. 사람들이랑 산에 다니고, 맛있는 거 사드세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나는 꽤 오랫동안 된다와 안된다를 반복적으로 말했다. 결국 그녀가 한 명의 노인만 담당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그 대화를 끝낼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일했다. 국민학교만 졸업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시골 소녀는 공장에 나가 외삼촌과 이모들의 학비를 댔다. 자식들 메이커 신발 한 켤레 사 주기 위해, 앳된 새색시는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식당 구정물에 손을 담갔다. 일주일에 딱 하루 쉬는 주말에도, 이모들과 외삼촌을 위해 김치를 담가 보냈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요양 보호사로 여생을 보내겠다고 한다. 


몇십 년을 봐온 나의 어머니였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했다.

그녀는 김치를 담가 이모들과 외삼촌에게 보낸다. 이제 그만하라고 해도 엷은 미소만 보일 뿐이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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