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심리 해부학 301 ~ 310
한 줌도 안 되는 머릿속 생각의 저울을 미련 없이 내동댕이치고, 아무 생각 없이 유리한 방향으로 기계적인 등락에 몸을 맡겨야 한다. ‘아는 것’과 ‘아는 자리에서 진입하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수익을 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지독한 복기와 반복의 목적이며, 시간을 온전히 이해했을 때 깨닫게 되는 투자의 본질이다.
손실이 아까워 확정 짓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역설적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현명하게 자를 수 있는 때다. 미련을 버리고 빨리 벗어나 재차 진입점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다. 손실이 커질수록 더욱 자를 수 없게 되는 '스노우볼 효과'를 두려워해야 하며, 눈덩이가 커지기 전에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감정을 내려놓으면 생존하고, 생존하면 진화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파산만은 피해야 한다. 결국 살아남은 종이 강한 종이며, 오직 살아남은 자만이 다음 단계로 진화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저절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며, 늘 그렇듯 시간은 끝까지 살아남은 자의 편에 설 것이다.
작은 부분에 집착하게 만드는 ‘돋보기’를 내려놓고, 전체를 크게 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시야가 넓어져야만 유리한 방향이 선명해지고, 그 유리한 방향 위에서 기계적인 반복을 거듭할 때 확률도 비례하여 높아진다. 작은 수익에 연연하거나 사소한 흔들림에 안절부절못해서는 큰돈을 만질 수 없다. 아니, 그런 조급함으로는 시장에서 제대로 버텨낼 수도 없다.
매물대가 밀집된 구간에서 지지나 저항을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 생각이 꽂혀버리면, 지지선이 뚫리거나 저항선이 돌파될 때 예상외로 많이 잃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의 노력과 손실에 얽매인 매몰 비용에 매몰되면 집착은 강해진다. 뇌동과 추격, 이 두 가지만 극복할 수 있다면 투자의 세계에 무엇이 문제겠는가!
생각이 꽂히는 곳에 집착이 자리한다. 꽂힌 마음이 클수록 파산의 여지도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지지저항은 참고할 이정표일 뿐, 맹신해서는 안 된다. 매몰 비용의 늪에서 헤쳐나와 유리한 방향으로 담담하게 베팅을 반복할 때, 큰돈이라는 결실을 얻을 것이다.
오직 실전에서의 반복만이 막연한 기대 속으로 이끄는 희망을 사그라들게 한다. 그 희망이 줄어든 만큼 이전과는 다른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어느 날 문득, 그동안 내가 알던 내가 아닌 자신을 발견하는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삶의 대부분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삶의 법칙이다, 미래를 기약하며 현재를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순간이 온전하기를’, ‘반복을 통해 남겨진 몇 장의 이미지가 선명하기를’, 그리고 ‘곧 잊힐 이 순간들을 헛된 희망으로 더럽히지 않기를’ 소망하며 현재를 살아야 한다. “다음부터는”, “이번 한 번만 잘 풀리면” 같은 말들은 지렁이의 꿈틀거림보다 무력한 인간의 기도일 뿐이다. 신은 그런 공허한 메아리를 들어줄 만큼 한가로운 존재가 아니다.
다음이라는 말은 도망치려는 자의 비겁한 변명이다. 승리를 위한 답은 이미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며, 그 답은 오직 ‘지치지 않는 반복’뿐임을 깨달으면 충분하다. 희망은 현재를 좀먹는 독이다.
어느 장사꾼은 시비가 붙으면 차라리 돈을 돌려주고 손해를 보는 쪽을 택한다고 했다. 그래야 진상들이 걸러지고 나중에는 장사가 훨씬 편안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투자도 세상사와 매한가지다. 아닌 것을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주인 마음이 편안해야 돈도 비로소 안심하고 새끼를 치게 된다. 손실이 적을 때 잘라주는 것은 돈이 새끼를 키우는 터전에 울타리를 단단하게 일이다.
아닌 자리를 손절로 거듭해서 잘라내다 보면, 나중에는 그 자리를 걸려내게 된다. 잘못된 자리에 머물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손절로 공간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만 그 자리에 수익이 들어설 수 있다. 손절은 시장에서 큰 꿈을 꾸는 자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비워야 채워진다는 세상의 숭고한 이치다.
비움이 곧 채움의 시작이다. 손절은 실패가 아니라 풍요를 위한 예의다. 손실을 확정 짓는 비움은 장차 다가올 채움에 대한 경건한 예우다. 손절은 미래의 풍요를 위해 내 삶의 궤적에서 나쁜 것들을 정갈히 치워가는 예의 바른 행동이다.
우상향하는 누적 수익 그래프를 장기간 그려내기 위해서는, 손실과 친숙해지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손실이 뇌동 매매를 부르는 독약이 아니라, 우상향 그래프의 단단한 양분이 되도록 심리를 다스려야 한다. 투자의 본질은 공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시간을 골대 앞에서 멈춰 선 채 기회를 기다리다, 가끔 확실한 흐름이 올 때 비로소 몸을 실어 인내의 과정이다.
기회가 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부분은 기회가 아니다. 기회가 아닌 자리에서 조급하게 진입하고, 틀렸음에도 고집스럽게 버티기 때문에 인생과 계좌의 실타래가 속절없이 꼬여버리는 것이다. 꼬인 뒤에 풀어내려 애쓰는 것보다, 애초에 꼬이지 않도록 멈춰 서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하지만 알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것, 그것이 바로 기다림이다.
손실은 수익 그래프를 지탱하는 양분이다. 심리가 꼬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수익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심리의 평온을 지키는 것이 가장 빠른 수익의 길이다.
기다림의 최대 적은 ‘지금 당장’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성급함이며, 누적의 최대 적은 ‘지금 당장’ 큰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희망이다. 인간의 지독한 본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이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굽이치던 강물이 결국에는 바다에 도착하듯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나중에 마주할 ‘미래의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진화해 있을 것이다.
상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의 시간을 깨치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여유로운 마음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자다. 가장 중요한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오직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성급함이나 희망 같은 감정들 역시, 내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봐야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수시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이 더해져 투자는 더욱 고통스러운 미궁이 된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 변하기에 인류는 진보하듯, 우리 역시 진보하며 나아갈 수 있다.
강물처럼 흘러가야 바다에 닿는다. 투자는 '승산이 있느냐와 반복할 수 있느냐'를 따져야 하는 확률의 세계다. 맞히고 싶어 하는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돈과 심리가 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투자는 결국 깨달음을 얻은 소수만이 생존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다.
“많이 잃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나면 손실을 최대한 줄이고 수익을 늘리는 대신에 얼어붙는다. 이에 따라 작은 손실이 깊고 넓은 구멍으로 변한다. 마치 바닥에서부터 물이 차오르는데 헤엄도 못 치는 사람이 삽으로 계속 땅을 파는 형국이 벌어진다. 나는 손실을 줄였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았고, 수익을 늘렸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신고가에 뛰어들었는데 가격이 하락하고 있으면, 어떤 시장이든 털고 나와야 합니다. 손절매해야 살아남습니다. 정말입니다.”
<부의 원칙 – 래리 하이트>
투자자가 가장 먼저 이행해야 할 의무는 ‘생존’이다. 그리고 그 생존을 담보하는 단 하나의 규칙은 ‘내가 이번 판에서 얼마만큼 기꺼이 잃을 것인가’를 미리 확정해 두는 것이다. 내일도 시장이라는 무대에서 활약하려면, 오늘 나의 계좌를 유지해야 한다. 돈과 달리 시간은 결코 다시 얻을 수 없으며, 유리하고 과감한 손절의 결정만이 더 많은 기회의 시간을 준다. 거대한 수익은 수많은 작은 손실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란다. 상수는 ‘질 것을 예상하고 대비했기 때문에’ 결국 이기는 자다.
흔들리고 조급해하는 그 불완전함 또한 투자자의 일부다. 언제 패를 붙들고 있어야 할지, 그리고 언제 깨끗이 판을 접어야 할지를 아는 안목이 상수를 만든다.
주가는 마치 스프링과 같다. 위로든 아래로든 스프링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인지, 아니면 제자리로 돌아온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통찰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프링이 이미 당겨진 상태에서 더 당기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며, 더 큰 문제는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반발력이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이다. 시세가 폭발한 직후에는 횡보나 조정이라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각적인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개미들에게 시세 직후의 유혹은 너무나도 위험한 덫이 된다. ‘더 갈 것 같다’라는 주관적 생각이 객관적 시각을 가리는 뇌동이 시작되고, 시각적인 약점이 이성적 판단을 흐리는 추격이 뒤따른다.
당겨진 스프링은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진입하려는 그 자리가 당겨진 스프링의 끝자락일 수 있다. 뇌동과 추격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스프링의 긴장이 풀리면서 재차 에너지를 모아가는 자리를 기다려야만 한다.
얕은 실력은 필연적으로 막연한 기대와 자만으로 흐른다. 병아리 눈물만큼 작아 보이는 경험과 복기, 그리고 반복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만 실력은 조금씩 깊어지며, ‘확률적 사고로 시장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확률적 사고로 접근한다는 것, 즉 ‘아무도 미래를 알 수 없다’라는 이차적 사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매 시간과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것이 뇌동(파동의 흔들림에 뇌파가 동기화되는 일차적 반응)으로 흐를 확률과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일상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반응하는 일차적 사고의 세계다. 그러나 투자의 세계는 그와 정반대인 이차적 사고의 영역이기에, 다수에게 투자는 쉽게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다. 가령, 시세가 분출할 때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원칙으로 정한 선이 올라오다 꺾이는 자리를 기다려 매도점을 찾는 것이 이차적 사고의 전형이다. 반대로 ‘올라가니까 더 가겠지’라는 추격, ‘원칙이 아닌 갈 것 같다’라는 뇌동, ‘많이 내렸으니 이제 오르겠지’라는 근거 없는 반대 매매는 언젠가는 폭삭 망하게 되는 일차적 사고의 예다.
투자는 본능을 배반하는 이차적 사고의 예술이다. 화려한 움직임은 본능을 낚으려는 미끼일 뿐이다. 일차적 사고는 당장은 편안하고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그 끝은 언제나 처절한 절망의 계곡으로 연결된다. 반면 이차적 사고는 수행의 과정처럼 불편하고 시리지만, 그 끝에는 오직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생존과 수익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지울 수 없는 욕심의 본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족을 배워가는 모진 과정, 그것이 바로 투자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죽음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외쳤듯, 투자자 역시 ‘나는 성급함과 희망을 극복했다’라는 위대한 선언에 도달하기까지 아프고도 시린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시장에 위험하지 않은 자리는 없다. 다만 그 위험이 조금 덜할 뿐이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 완벽한 자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후회의 무게가 조금 가벼울 뿐이다. 그러하기에 투자자는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이어야 한다. 어느 현인의 말씀처럼, 걸어온 길이 행운이었는지, 재주였는지, 아니면 무모할 정도로 위험했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삶이 그러하듯 익어가는 벼처럼 겸손해야 하고, 침묵으로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
시장은 준비된 자가 묵묵히 거두어 가는 곳이다. 매매가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은 성급함이라는 채찍으로 자신을 희망 고문하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가 두려움과 바람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유를 얻었듯이, 성급함을 내려놓고 희망에 목매지 않을 때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