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는 내게 각별한 도시다. 푸르고, 아름답고, 역사와 문화가 약동하는 도시. 과거에는 온갖 대문호들과 대음악가들이 거쳐갔으며, 현재에는 ‘뉴 베를린‘이라 각광받으며 독일 내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이주하고 싶은 장소로 손꼽히는 도시. 내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곳은 아니지만, 독일에서 내가 가고 싶어서, 살아보고 싶어서 선택한 최초의 도시. 이곳에서 나는 3년 반 동안 흥분과 불안과 실패와 도전을 만끽하는 시간을 보냈다. 온갖 것에 다 서투르고, 온갖 것이 다 재미있던 시절. 웃을 일도 울 일도 너무나 많았다.
떠올리면 언제나 짠한 그리움이 드는 곳인데, 함부르크와는 나름대로 거리가 있어 자주 가보지는 못한다. 땅덩어리 넓은 독일에서 그렇게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막상 가려고 하면 큰맘 먹어야 하는, 편도 네다섯 시간의 일정. 작년 5월에는 한 번 다녀왔지만 올해는 못 가볼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일정이 잡혀서 지난 주말 아주 즉흥적으로 다녀오게 되었다.
출발은 금요일 오후 네 시였다. 요즘 독일 철도의 연착과 운행 취소가 정말이지 유례 없이 최악이어서, 기차를 탔다가는 한 시간 앞의 행보도 예측할 수 없는 익스트림한 여행을 하게 될 게 불 보듯 뻔한 상황이라 기차 대신 blablacar의 카풀 서비스를 이용했다. 이번 차는 다른 독일인 남자 두 명(운전자까지 세 명)과 타고 갔는데, 다들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시간 반 동안 정말 거의 한시도 쉬지 않고 다 함께 수다를 떠는 기염을 통했다.
할 얘기가 다양하긴 했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는 노르웨이인 여성과 결혼해서 독일과 덴마크 국경 지역에 사는데, 본인은 독일로 출근하고 부인은 덴마크로 출근한다. 헌데 최근 부인이 임신을 했고 본인은 노르웨이와 독일 두 나라 모두에서 이직 기회가 생겨서 어째야 하나 깊은 고민 중이었다. 와중에 대학생 때 중국에서 교환학생을 했기 때문에 중국 생활에 관해서도 들려줄 이야기가 많았고, 요즘 독일과 덴마크 국경 지역의 부동산이 유망하다는 정보도 빼놓지 않고 귀띔해주었다. 뒷자리의 내 옆에 앉은 남자는 목수인데, 전공은 영상이라 작년에 우크라이나로 전쟁 다큐를 찍으러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스티로폼 따위를 방탄조끼랍시고 입어야 하는 열악한 상황과, 서유럽에서 정의의 사도인 척 하는 사람들이 몇 주 들어와서 안락하게 지내다가 직접 전쟁에서 싸우기라도 한 것 마냥 경험을 부풀려 돌아가는 전쟁 투어리즘이 만연한 것에 경악했다고.
여행 깨나 해봤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이런 적은 또 처음이었다.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휴게소에 한 번 들리지도 않고 열심히 달려 도착한 라이프치히에서는 해거름이 지며 푸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제 겨우 아홉 시인데 벌써 어느새 이렇게 밤이 길어졌나 싶어 아쉬웠지만 가로등처럼 크고 밝은 달이 뜬 밤하늘과 한낮의 맹렬한 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밤이 따스했다. 중앙역에서 내린 나는 지체없이 친구와 만나기로 한 Connewitz(코네비츠)로 향했다.
라이프치히는 극우와 극좌가 맹렬하게 대립하는 도시다. 이 정도 인규 규모의 도시가 라이프치히 뿐만이 아니고, 구동독 내에 젊은이들이 많이 거주하는 대학 도시가 라이프치히 외에도 꽤 있지만, 이렇게 양극단의 정치색이 뚜렷한 도시도 찾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라이프치히의 남쪽에 위치한 Connewitz는 동네 전체가 극좌의 정치색을 표방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 성차별, 나이차별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반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축소를 부르짖는 이곳 사람들은 경찰과 종종 충돌하기도 하고, 극좌 테러리스트들이라며 언론의 경계를 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극단주의는 그것이 어느 종류의 것이건 바람직하지 못하며 폭력은 절대 장기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믿지만, 독일에 사는 동양인 여성으로서 사회의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 속하는 나는 이 동네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편안하고 안전하며 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류의 인디음악이나 펑크밴드들의 공연도 풍부하기 때문에, 나는 라이프치히 생활 초창기부터 이곳에 드나들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그곳의 터줏대감 격으로 라이프치히 뿐만이 아니라 독일 전국적으로 이름난 라이브하우스 Conne Island에서 2년 가량 일도 했다. 이번에 친구와 만나기로 한 곳도 그곳이었다.
마침 Conne Island에서는 Punktreff, 즉 펑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와서 같이 맥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도 맥주와 음식을 사서 벤치에 앉아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작년에도 라이프치히에 왔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못 만났던 친구였다. 2년 조금 넘어서 보는 거라 너무나 반가웠고,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게 놀라웠다. 나는 굉장히 많이 변했는데. 함부르크에 간 지 2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4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친구도 나를 보자마자 어른이 된 것 같다며, 예전의 불안해하던 태도는 사라지고 훨씬 여유로워진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타고나길 예민하고 까다로운 스스로를 달래가며 사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래도 무던해지려 부던히 애쓰고 있는 노력이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 같아 기뻤다.
참고로 여자화장실 내부는 대략 이렇다. 여전히 대쪽같은 그런지함이 반가웠다. 와중에 못보던 스티커가 새로 하나 붙었길래 읽어봤더니 내용이 너무 재치 있어서 낄낄대고 웃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친구에게 들려주니 친구도 맞는 말이라면서 같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잠시 소개해보자면, 오른쪽 하얀색 스티커 안에 쓰여진 „Der genderneutrale Begriff für AfD-Mitglieder ist Arschloch“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여기서 der genderneutrale Begriff는 성 중립 용어(지칭하는 대상의 성별을 내포하지 않는 용어), AfD-Mitglieder는 독일의 극우 포퓰리즘 정당 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의 당원, Arschloch는 영어의 Asshole에 해당되는 욕을 뜻한다. 독일어에는 남성/여성/중성의 세 가지 관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영어와 달리 거의 대부분의 단어에서 성별의 구분이 가능하다. der Freund/die Freundin, der Mitarbeiter/die Mitarbeiterin, der Kollege/die Kollegin 등등. 심지어 형용사와 결합해서 사용도 가능하다. der Angestellte 라고 하면 male employee를, die Angestellte라고 하면 female employee를 가리키는 식이다. 하여튼 이렇게 성별의.구분이 엄격한 언어다 보니 최근에는 성차별의 가능성을 줄이고자 공문서에서는 반드시 Mitarbeiter*innen이나 Kolleg*innen 같은 식으로 남성형과 여성형을 묶어 표기하고, 스스로를 여성과 남성 그 어느 범주에도 넣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D(Divers)라는 제 3의 성별 또한 사용한다. 헌데 Arschloch의 관사는 중성이다(das Arschloch). 즉, 해당 욕은 성별에 관계없이 쓰일 수 있고, 해당 정당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행보로 유명하기에 오직 그 욕만이 그 당원들에게 유일하게 적합한 성 중립 용어라는 것. 꽤나 스마트하고 신랄한 위트라서 굉장히 잘 썼다고 생각했다.
(다음 내용은 2부에서 이어집니다)